[역사 바낭] 회의주의의 함정

오늘은 역사 얘기 아닌 그냥 속풀이입니다.

역사를 알아가면서, 가장 조심해야할 것은 역시 회의주의로 귀결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는 게 병이라 했던가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인간의 역사를 보면 참, 별 거 없다고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역사란 결국 인간 세상, 사회의 기억이지요.
현재가 지나면 과거가 되는 것처럼 역사는 지금 사는 사람 세상의 과거이지요. 이걸 찾아보다보면 재미있는 점도 많지만 환멸을 느끼기도 합니다.
훌륭하다고 이름난 위인도 여기저기 털어보면, 먼지 풀풀 날리고 잘못한 거 많고.
유명한 개혁이나 전성기도 잘 뜯어보면 부패와 문제점이 오뉴월 메뚜기처럼 팅팅 날리지요.

 

세상 어떤 일에도, 크거나 작거나 나쁘고 좋던 아예 희생이 없을 수는 없어요.
세종의 4군 6진 개척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굶주리다 죽었던 것 처럼.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없으니 언제나 누군가는 굶고 추위에 떨어요.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추진했던 것이 나중엔 아주 엿같은 것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앙시엥 레짐을 뒤엎어버리겠다고 일어섰던 프랑스 대혁명이 공포정치로 빠진다거나, 왕안석의 신법이라던가, 훈구파가 만들어낸 썩어버린 정국을 좋게 바꾸겠다고 나선 사림파들이 당파로 얼룩진 엿같은 세상을 연 것 처럼요.

 

그렇기에 역사는, 어쩌면 인간 세상의 환부를 들여다보는 의사와 같습니다.
가장 지독하고도 아프게 썩어들어간 부분을 보게 되거든요.

 

제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유난히 현대사가 아픕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책에서 버석거리는 글자로 사람 몇 명이 죽었다, 라고 쓰인 글자들이 현대사에서는 어디에 살던 누구, 어디의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사연들로 선명히 떠오르지요.
6 25 전쟁 직후 어린 네 아이를 두고 굶주리던 부부가 쓰레기통에 버려진 복어알을 멋도 모르고 집어와서 국을 끓여먹었다가 죽기도 하고, 시장에서 사온 농약 묻은 번데기를 먹은 아들을 안고 열 한 군데나 병원을 찾아갔지만 거절당해 결국 아이를 잃은 아버지가 자살을 하기도 하고, 엉뚱한 살인사건에 범인이란 누명을 쓰고, 자긴 안 죽였다고 주장하고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경찰, 기자 모두들 묵살하고, 겨우 무죄를 받았지만 고문 끝에 정신이 이상해져서 "날 먹고 살게 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신문사에 하소연을 해대던 사람도 있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전화가 오지 않게 되었다고 하지만.

 

세계사도 다를 바 없어요. 전쟁터에서 몰살당한 어린아이의 시신을 사진으로 보다가 구역질을 하기도 하고,  난징대학살에서 사람을 마구 죽였던 일본군의 수기를 읽어보고 이 사람도 결국 힘없이 떠밀렸던, 그러다 망가져버린 사람일 뿐이구나, 를 느끼기도 하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허섭스레기처럼 쌓여있는 해골들 하나하나가 원래는 누군가의 사랑하는 자식이고 가족이었노라 생각하면 마음이 뻥 뚫린 것 처럼 아파집니다.

 

그럼 이제 느끼게 되는 거지요. 역사- 우리가 봤던 사연이나 수치, 기타등등이 그냥 자료가 아니라 전부 다 사람이라는 걸. 이렇게 불쌍하게 고통받고 죽어간 사람이 백년 전에도, 천년 전에도, 그 보다 더 오래전에도 있어왔던 거죠. 죽은 사람도, 다친 사람도, 헤어진 사람도, 굶주린 사람도 모두. 그런 사연 하나하나가 무척 아프게 느껴지지만 어느 순간엔 무디어져요. 그러지 않고는 정신이 견딜 수 없지요.

 

그래서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회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어차피 별 거 없어, 라고.

그럼에도 계속 공부하는 걸 그치지 않는 건. 그렇게 위안을 얻고 싶어서인지도 몰라요.

가장 고통스러운 때도 농담을 한 사람이 있었고
끔찍하던 순간에도 자신보다 남을 도운 사람이 있었고.
그런 일들은, 어둠이 깊으면 깊을 수록 빛이 선명해보이듯 더 분명하고 아름다워요.
제가 역사 이야기를 쓰면서 재미난 부분을 골라내 쓰내는 것도 그런 뜻이 있긴 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이 실망하고 더 아끼게 되는 게 역사 뒤지는 사람의 업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이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요.

 

...뭐 여기에 해당하지 않은 사람도 있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가카라던가, 가카라던가, 가카라던가.

 

오늘은 도저히 쓸 거리가 없어서 안 써야지 생각을 했는데,
주말에 아무도 메신저에 안 들어오고 존내 심심한 나머지 끄적끄적 댔습니다.

좋은 주말 되시길.

...친구들아 놀고잡다 ㅠㅠ

 

    • 겨울이 왔어요 우리가 먹고 쓰고 보이는거 미리 만들어놓아 때 되면 내놓은거 같고 누가 나고 죽고 잘살고 못살고 세상은 단순해서 역사 공부 안해도 될거 같아요 이런 생각도 역사
    • 주말에 책상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 여기 있습니다. ㅎㅎ
      글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 그래도 현재를 보면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고 믿고 싶습니다. 노예제는 사라졌고(지구상 어디에는 남아있지만), 인간의 권리를 깨닫게 되었고, 평화라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 오늘도 글 잘 읽었습니다.
      작가의 무료함과 독자의 행복감은 비례관계 일까요? :)
    • 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 동네 도서관에서 LH님이 쓰신 역사책들을 몇권 빌려왔습니다. 잘 읽겠습니다.
    • 희망의 공허함, 절망의 어리석음. 그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역사 앞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무를 이행할 뿐이다...그대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나의 서양미술순례' 끝부분이 생각나네요. 근데 다들 LH님이 누군지 알고 있나보군요.
    • 숲고양이 / 저는 지난번 글에서 (조선시대 임금들의 자식사랑) 어떤 분이 리플에서 "나는 조선이다" 책을 언급해 주셔서 알았어요^^;; 그 책 말고도 역사책 많이 쓰셨더라구요.
    • 그러게요, 어두움이 있으면 빛도 있겠죠. 게시글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글솜씨가 대단하세요.
    • 가끔영화 / 왜 사냐건 웃지요. 그 삿구가 절실히 와 닿는 때가 있네요.

      몽슈 / 우리 잘 살아봅시다. 몽슈님도 힘내세요.

      에아렌딜 / 바로 그런 희망이 있기에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는 거 겠죠. 사실 전 낙관주의자입니다. 근거 없는...

      D-80 / 때로는 고통도, 입니다. 주변의 저완 비교도 안 되게 정말 글 잘 쓰는 작가분들 중에는 정말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더군요.

      Cksnews / 왜 우세요 ㅎㅎ

      라곱순 / 재미있게 보세요. 동네 도서관에도 있다니 좀 놀랐네요 ㅎ

      숲고양이 / 좋은 글귀네요. 저 혼자 고민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다른 누군가도 고민하는 구나 싶어 외로움이 좀 덜해졌습니다... 글고 제가 뭐 별 게 있는 사람도 아닌데 부끄럽구요.... (응?)

      Handmo / 감사합니다. 칭찬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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