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예외, 그리고 한계 & 자기 소개

어제 글을 올리고 나서 한 분이 이런 글을 주셨습니다.
권율의 이야기는 하나의 예외적일 뿐이라고요.
그렇죠, 사실 엄청난 예외인데다가 다른 한편으로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었지요. 그를 필요로 하는 시대 - 전쟁을 만났으니까요.

솔직히 하나의 인간은 너무나도 약해서,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의 멍에를 이겨내지 못하곤 합니다.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녀요. 사람은 약하고 세상은 차갑고 엄혹하거든요.


그러니 "저 사람은 괜찮은데 너는 왜 그러니."라는 말은 정말로 위험하죠. 틀림없이 잘못된 것은 사회인데, 그걸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버리는 거니까요. 다 잘 하는데 너만 못하는 거다. 그러니 너만 잘 하면 된다라고요.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볼께요. 치열한 전쟁이 있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하지만 그 중 한 두 사람이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살아난 사람들이 있으니까 전쟁은 괜찮은 것이다? 그건 말이 안 되지요. 어떤 사회적 환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개인의 사례들이 위험한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말마따나, 그 사람들은 정말 정말 운이 좋았을 뿐이라구요.
아무리 사람이 애써도 해결이 불가능한 게 더 많았다고요.

 

옛날엔 신분제도가 그리했지요.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신분이 낮으면 말짱 황이었으니까요.

서자에 대해 알고 계시죠? 정확히는 양인 첩에게서 태어난 게 서자고, 천민 첩에게서 태어난 게 얼자라서 합쳐서 서얼이라고 합니다. 흔히 홍길동이라던가, 능력이 있는 서얼들이 신분제도의 벽에 막혀 좌절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거여요.
그런 서얼들은... 점점 더 숫자가 불어났고 조선 후기에는 아주 서얼들의 가문이 생겼을 정도이지요. 이들은 출세가 막힌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고, 어떻게든 길을 열어보고자 자신들끼리 뭉쳤습니다.

 

선조 때는 서얼들 1,600명이 한데 뭉쳐 상소를 올렸어요. "우리도 임금님의 자식 아닙니까?" 라고 하면서요. 그 이후 숙종 때도, 영조 때도 서얼들은 임금님에게 우리도 임금의 백성이라고, 나라를 위해 힘을 다 할 수 있다는 호소를 올렸습니다. 심지어 조광조도 그랬지요. "우리나라 기껏 땅도 좁은데 이래서야 되겠어요? 정말 똑똑한 사람도 있을텐데..."
그렇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지요. 서얼들은 절망한 끝에 산야에 파묻혀서 누구도 봐주지 않을 시를 쓰거나, 혹은 사회불만 세력이 되어 반란을 일으키거나 권력의 사냥개가 되기도 했지요. 그래서 엄청나게 사회적 지탄을 받았죠. 외가의 피가 천하니까 그런거다, 라는 등등.

 

세조 때 서얼들의 다크 히어로였던 유자광이 도총관에 임명될 당시 반대했던 신하의 논리란 게 이랬습니다.

 

"신분 낮은 애를 등용하면 규율이 흐트러지고... 하극상도 벌어지겠고... 원체 신분이 낮으니 유자광도 자기 마음에 열등감이 있을 거여요. 그러니까 등용하면 안 돼요."

 

이거 참 듣는 사람 상당히 빡 돌게 하는 말이죠. 자기가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이걸 사람의 자질 문제로까지 귀결지어버리니까 말여요.

물론, 아주 능력있는 서얼이나 신분 낮은 사람들의 재능을 안타까워한 사람들도 많았지요. 조광조나 율곡 이이가 그러했지요. 또 이덕무, 박제가 같은 백탑파 사람들을 펫으로 들인 정조도 있었죠. 그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내 취미생활로 키우는 애들이얌."이라는 말로 막아주고 보호했거든요.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 한 신분제도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서얼도 서얼이지만, 천민들도 있었지요.
세종은 장영실의 천민 신분을 풀어주고 벼슬을 내려줬지만, 오직 그 사람 뿐의 일입니다. 신분제도는 그대로 남아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얽매여 있었고 죽을 때까지 사람답지 못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좋은 임금님(혹은 상관)의 한계는 여기에 있어요. 상냥하고 다정하더라도 결국 손 닿는 누군가를 구할 뿐이지 세상은 그대로여요. 일제시대 때 조선인 소작농들에게 살가웠던 일본인 지주와 다를 바 없어요. 애초에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선이 둘 사이에 그어져 있는 거죠. 물론 그 시대를 뛰어넘어 - 온 백성이 모두 평등하다라는 생각을 못했냐라고 묻는 것은 너무 혹독하긴 하지요.
심지어 차별 받는 당사자인 서얼들 조차도 "우린 그래도 중인이나 상인보다 낫다" 라는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신분제도는 없어졌지만.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가요.
가난하다거나, 여자 혹은 남자라거나, 성소수자라던가, 혼혈이라던가, 학벌이라던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거여요. 차별과 천대의 벽 바깥으로 내몰리고 새로운 기회에 도전할 여력마저 잃어버린 사람들 말여요. 그들에게 너만 잘 하면 돼, 다들 잘 하잖아 라는 말을 하는 건 참으로 잔인한 일이죠.
그건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여요.

 

솔직히, 답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알지 못하는 부조리가 당당한 상식으로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지요. 또, 알고 있다고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다만 고민하는 거여요.

답은, 정확히는 해결책은 안 나와도 괜찮아요.
이게 옳은가 아닌가를 고민하고, 따져보고, 자신을 비춰보고...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조금씩 달리 보입니다. 사실 이 세상 많은 편견들은 꼭 악의를 가지고 자리했다기 보다는, 그게 나쁜 줄 몰랐기에 지켜지는 것들도 있거든요.

 

그 때 필요한 게 성찰이 아닐까요.
한 번 생각하고 난 다음, 다시 살펴본 세상의 색은 조금은 달라져 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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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좀 늦었지만 자기 소개입니다.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아서...


LH : 필명(이한)의 약자입니다. 검색하기 힘들다는 주변 분들의 민원(?)으로 그냥 실명 까버릴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토 : 소심. 지렁이는 밟혀도 지렁지렁~

나이 : 밝아오는 새해가 전혀 안 기쁨.

취미 : 서점이나 도서관 기둥에 숨어 매의 눈빛으로 지켜보기. 누군가 제 책을 보면 티 안내고 조낸 기뻐합니다...

책 검색하는 법 : 그래 24의 작가 코너가 그나마 찾기 쉬운 듯 해요...
http://bit.ly/rLybx5

좋아하는 역사 인물 : 유자광, 세종, 오성, 꼰대... 아니 정조, 그 외 기타등등.

특기 역사 분야 : 고대 중국, 조선, 르네상스, 이슬람, 생활... 신화. 결국 이거저거 잡다 냠냠입니다.

기타 :
개인사정상 2~3시간 들여 급하게 쓰다보니 오타작렬/오류발생/기타등등입니다. 살며시 지적해주시면 감사합니다. 너무 세게 지적하시면 웁니다...

마무리 : 배고파요.

 

    • 헣 시험기간 도피책으로 읽을까말까 했던 책들이 보여요(....)
    •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전 유자광은 소설 인물로만 접해서 그런지 캐악당 이미지인데 어떤 매력이 있나요? LH님이 좋아하신다니 저도 궁금해집니다.
    • 예전엔 이한으로 검색하면면 배우만 나왔는데 이제 그는 본명 김남길로 돌아갔으니 '이한'중엔 인지도 1위 아닌가요 ㅋ..
    • 다음에 유자광 이야기도 해주세요! 아, 당장 검색하고 있습니다.
    • 1) 저서들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ㅁ')~ 대학 시절엔 별 생각 없이 근대사/근대문학 위주로만 공부를 해온지라, 중세사 이야기들은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새로운 부분들에 흥미를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근데 올해는 책 안내시나요? <- 뭐임마;

      2) 위인이나 영웅은 어떻게 보면 굉장한 변태들이죠(?) 그래서 저는, 애들에게 위인들의 전기나 평전을 첨삭 없이 읽히는 걸 좋지 않게 봅니다. 하지만 아이를 M으로 키우려면 괜찮을지도(...)

      3) ...어느 시대나, 사람을 재단하려는 잣대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람의 숫자만큼의 정의가 있기도 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고 행동하고 기록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학자라면 정리하고, 작가라면 발표하고, 음악가라면 만들어 부르고, 네티즌이라면 트위팅하고...(읭?)

      4) 하여간 뻘댓글을 길게 써봤습니다. 내일이면 지울 지도 모릅니다 <-


      그냥저냥/
      여기다가 유자광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너무 길지 않을까요ㅎㅎ
      http://mirror.enha.kr/wiki/%EC%9C%A0%EC%9E%90%EA%B4%91
      유자광은, 평가가 굉장히 분분한 컬트 히어로적 인물입니다. 개략적인 설명은 위 문서로 읽어보시면 좋겠네요.
      원래 엔하 링크 말고 위키 한국판을 링크하려고 했는데, 거기의 기술은 너무 '그냥 나쁜놈임ㅇㅇ'이더군요-ㅁ-;
      이 외에 자세한 것은 LH님께서 포스팅으로 꼼꼼하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
      • 링크해주신 엔하위키 잘 읽었습니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군요.



        마지막 유자이야기에 빵 터졌습니다
    • 이한 님 이야기 늘 잘 읽고 있어요:D
    • 이슬람과 르네상스 +_+(번쩍) 그쪽 야그도 해주세요! (이제 막 대놓고 요구를..;)
    • 쑤우 / 실명을 까고 나오기엔 너무 소심해서요...

      자몽 / 헑. 읽으셨다면 제가 자몽님의 성적 하락에 기여하는 겁니까?

      그냥저냥 / 유자광은 잘 생겼습니다. 그게 중요합니다.(사뭇 진지) 이야기하자니 너무 내용이 잡다하게 길기도 하고 하니 언제 도서관 가시면 책을 보세용.

      레벨9 / 지금 완득이를 제작하신 이한 감독님 무시하시는 겁니꽈?(...) ㅎㅎㅎ

      모모씨 / 이야기하자면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미 많이들 이야기 해놔서...

      BeatWeiser / 관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작가 혼자서는 책을 못내요 ^^ 긴 댓글 감사합니다. 재미나게 읽었고요 엔하위키도 잘 봤습니다. 유자광은 일단 잘 생겼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봐요. 악당으로서도 말이죠.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고 솔직히 조선시대 서얼 중에서 가장 악에 받혀 처절하게 살았던 인물이라서, 매력이 있달까요 ㅎㅎ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여기서 자를께요.

      liece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섬고양이 / ...그래서 커피 이야기를 하려다가 다른 데로 빠졌습니다. 언제 또 이야기해볼께요.
    • 고민을 계속하는 그것 자체가 답.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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