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휴가 그리고 이것도 헌팅인가요?
1. 보스 아저씨와 HR에서 갑자기 마지막 주에 휴가를 쓰랍니다. 이유는 뻔히 알지만 물어봤습니다. HR에서 중국 노동법상 일정일수의 휴가를 써야 하는데 그 숫자에 미달했기 때문이랍니다. 휴가를 안쓰면 남은 휴가만큼 일당의 세배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인걸 제가 안다는 걸 HR이 모를리가 없는데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데 화가 났습니다. 이럴땐 passive aggressive 전략이 최곱니다. 휴가라는게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야 하는건데, 크리스마스에 이런 식으로 통보하는게 어딨냐 - 난 휴가 못 쓴다 배째라고 HR에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보스 아저씨와는 구두로 연말에 휴가는 일단 내고 놀거나 말거나 한 다음에,, 내년에 연차 안 까먹고 그냥 노는 날을 가지는 걸로 합의를 봤습니다. HR은 괘씸해서 아직 얘기 안해줬어요. 하긴 연말이라 HR팀도 다들 휴가를 간 상태로 상황을 모르긴 하겠군요. 덕분에 저는 더블 휴가 획득! 휴가 열심히 모아서 뉴욕 번개하러 가야죠.
2.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버거킹에 들렀습니다. 와퍼 세트를 주문했더니 종업원이 물어보지도 않고 콜라를 담고 있길래 부랴부랴 아니 콜라말고 스프라잇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제 옆 줄에 서 있던 중국 아가씨가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보더니 중국 사람답지 않은 꽤 훌륭한 영어 발음으로 "아, 너는 스프라잇을 정말 좋아하는구나"하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다이엇 콜라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냥 콜라를 먹느니 스프라잇을 시키고 만다는 제 사정을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성은 물론 없었으므로, "응, 스프라잇 좋아해."라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와퍼의 제조 과정을 뚫어지게 노려보았죠. 제 머리속엔 와퍼를 지켜야한다는 생각 뿐이었거든요.
그러다 문득 이 아가씨 자기 주문하는 것도 잊고 무언가 다음 대화 소재를 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득 측은한 생각이 들려는 순간 와퍼 세트가 제 손에 쥐어졌고, 전 간단한 목례만 남기고 와퍼 세트를 들고 버거킹을 나섰습니다. 마지막으로 흘낏 쳐다보았을 때 그 아가씨 여전히 묘하게 당황한 표정으로 제 뒷모습을 좇고 있더군요.
그리고, 세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홀몸인 이들이 가장 외로움을 타는 날이지요. 둘째, 제가 제대로 대답했다면 그 아가씨와 함께 와퍼를 먹으며 도란도란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겁니다. "스프라잇을 좋아하시는군요" 따위의 어색한 픽업라인을 사용하긴 했지만, 어쩜 그 아가씨에겐 전 헌팅을 당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가장 중요한건데. 지금까지 제게 말을 걸었던 중국인 남자를 계속 중국 아가씨라고 표현하고 있었네요. 훗, 아가씨가 말을 걸었으면 절대 그렇게 반응했을리가 없죠. 요즘엔 남자가 남자도 헌팅하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