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돌림의 추억

완전 뒷북 바낭이지만...

인기 많고 활달한 초등학교 때와는 반대로, 중고등학교 시절의 저는 체제 순응적 학생이었습니다. 눈치 없고 재미도 없는 모범생요.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저같은 학생을 편애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반작용으로 절 안좋아했죠. 설상가상으로 전 인간관계 기술도 한참 떨어졌어요.

대체로 순박한 아이들 덕택에 그럭저럭 참을 만 했습니다. 하지만 편가르고 뒷말하기 좋아하는 애들이 제 소문을 지어내거나, 적극적으로 따돌리는 것에 재미를 붙이면 학교 가는 게 똥맛이었죠. 특히나 초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B와 같은 아파트 친구 K, 숏커트머리의 짝궁 L같은 애들이 쉬는 시간에 급우들 앞에서 큰 소리로 "글루건 너는 재수없으니까 학급 화장지 쓰지 마!", "글루건 쟤 진짜 웃기는 애야." 하는 말을 들으면 아무 대꾸도 못하고 수치심으로 눈알까지 빨개졌습니다. 왜 너넨 고등학교마저 같은거니. 지금은 안녕하니, 그리고 밥은 먹고 다니니.

그땐 그런 모욕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친구들 중 누구하나 가르쳐 주지도, 위로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난 학교가 세상의 전부인데요. 어린왕자는 해지는 광경을 혼자서 꿋꿋하게 마흔 세 번이나 구경했는데, 아 이상타 난 왜 이럴까.

6년동안 가장 괴로웠던 순간은 역시 소풍과 수학여행이었습니다. 다들 짝꿍이 있는데 나만 없잖아요. 며칠 전부터 난 누구랑 짝을 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협심증이 올 것 같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지체장애 있는 친구와 짝을 맺어주었을 때나, 만화에 빠져 스스로 세상을 왕따시키는 친구와 소거법 끝에 짝으로 맺어졌을 때엔 기뻐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지요. 소풍 사진은 어쩔 땐 고속버스 맨 뒷좌석 소위 <노는 애들> 사이에 어색하게 껴서 (좌석 수가 홀수니까요.) 희미하게 웃고 있는 장면이 다예요.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부르며 캠프파이어를 마칠 때면 얏호 내일부턴 수업하는구나 안도감마저 들었어요.

연말이 되면 으레 하는 롤링페이퍼도 싫었습니다. 교실을 두 바퀴 돌았지만 유독 썰렁한 제 롤링페이퍼는 안녕 글루건아 일년 내내 너와는 말을 통 안해봤구나, 알고 보면 착한 글루건, 넌 참 모범적이야 등등의 형식적인 인사말이 대부분이었어요. 애들이 저를 필요로 할 때는 교과서 필기를 빌릴 때, 모르는 걸 물어볼 때, 시험지 답을 맞춰볼 때, 생리대나 진통제가 필요할 때, 교실에 큰 바퀴벌레가 나타날 때 등등...

희한하게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동창들은 대부분 나를 평범한, 심지어는 엉뚱하고 쾌활한 모범생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깔깔 웃으며 몰랐어? 나 은따였잖아! 하면 정말 몰랐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에요.

사랑받지 못함의 괴로움을 깨닫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친한 친구가, 친한 선후배가, 친한 주변인들이 있어요. 나를 필요로 하고 아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러나 십 수 년 전의 일인데 지금도 <따돌림>이나 <왕따>라는 글자에, 삼삼오오 짝지은 무리들 사이 홀로 축 쳐진 누군가의 어깨를 볼 때, 어쩐지 내가 절박하게 매달리게 되는 모든 상황에서 흠칫합니다. 그러고는 애써 모른 척 했던 그 때의 추억이, 크고 매끄러운 카빙턴이 지나간 눈밭처럼 아직 선명하게 패어 있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휘휘 내젓곤 합니다.
    • 저도 왕따를 당한 적이 있어요. 이유는 못 생겼겨서-_-라고 가해급우들이 알려줘서 알았지요.
      흑, 모르는 게 좋았을까요.
      그런데 원래 성격 상 저와 다른 사람을 비교 안 하는 편이기도 하고,
      어떤 이유에선지 언젠가 끝이 날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잘 견뎠던 거 같아요.
      잘 견뎠다는 건 죽지 않고, 큰 상해를 입거나 입히지 않고 보냈다는 그런 의미로.
      상처로 남은 건 입고나갈 옷이 없고 행색이 후줄근하면 하루종일 무지하게 우울해하고 그런 게 있어요.
      얻은 것은, 살면서 왕따의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저를 돌아보는 일이 자주 있다는 거 정도.
      왕따나 따돌림에 대한 기사가 있으면 항상 찬찬히 읽어보고
      전국의 왕따에게 밝은 내일이 오길 바랍니다.
      • 제 학창시절 경험을 비춰보면, 잃을 게 거의 없는 학생보다는 오히려 부러운 점 가운데서 어딘가 묘하게 다른 구석이 보이는 사람이 타겟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쟤를 부수면 더 짜릿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열아홉구 님의 외모가 못생겨서 따돌리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신 열아홉구 님의 인내심에 마음 깊은 위로를 보냅니다.
    • 내용을 떠나서 글 자체가 좀 좋네요 ^^

      성격이 활달하다던지 무엇이던 두각을 나타내서 인간관계에 별 불편함 없이 지냈던 친구들도 있겠지만
      10대라는 게 사실 미숙할 때잖아요. 내적으로도 급변하는 시기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모를 때도 있고.

      학창시절 그런 고민이나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이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어요.
      그런 것도 일종의 성장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꼭 쓰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 애들이 왕따에 휩쓸리는 것도 소풍, 수학여행, 밥 먹을때, 같이 놀고 싶을 때 .. 옆에 있는 사람이 없을까봐 그런거 같아요. 어른되어서도 마찬가지구요. 같이 말할 사람, 어울릴 사람, 웃어줄 사람 만들고 싶어서 남의 아픔엔 슬쩍 눈감아 버리는 것이 어른된다고 달라지는 것 같지 않아요.
      • 동감합니다. 오래 전, 당시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 익명게시판에 친구들이 괴롭힐 때 덜 창피하게 대처하는 방법이나 소풍가서 시간 때우는 법을 공유하며 혹시 친구 만드는 법을 아느냐는 질문을 올렸는데, 심장이 저릿저릿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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