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속물에 대한 쓸데없는 고찰

코선생님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부터 촉발된 교양 속물에 대한 논의는 우리나라의 교양 속물은 무엇을 선호하는지 확인해보려는 숲고양이님의 호기심으로 인해 무르익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교양 속물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 핵심은 디나님께서 언급하신 부분에 있다고 봐요.

진짜로 그걸 좋아하느냐, 있어보여서 그걸 좋아하느냐.

코선생님 글에서도 몇 번이나 강조되었지만 섬머가 스미스나 건축에 관심을 보였던건 그게 있어보였기 때문이었죠. 그게 반드시 대단하고 훌륭한 취향이거나 특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라도 상관이 없고요. 중요한건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거에요.


숲고양이님께서 열거해주신 취향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좋아하고 인디음악을 즐기며 북까페를 선호하는... 등등의 특징들은,

교양이나 속물에 관계된다기보다는 그냥 트렌디한 취향인거 같아요. 진짜 좋아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는거잖아요. 좋아서 인디음악을 즐기는거고.

사실 그런 종류의 컨텐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건 자연스러운거죠. 시대의 흐름이라는게 있고 그걸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거 뿐이니까.


근데 똑같은 컨텐츠를 좋아해도 속물처럼 보이는 방식이 있고, 전혀 속물처럼 보이지 않는 방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컨텐츠를 좋아하고 즐기는지가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속물인지 규정하는데 그렇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거죠.


예를 들어볼께요.

많은 분들이 벨엔 세바스챤을 좋아하시죠? 요새 벨엔 세바스챤 좋아해서는 교양 속물의 선두주자가 되기엔 부족한 감이 있지만, 하여튼 이 정도면 개성있는 취향이란 말을 들을 정도는 되겠죠.

제 인생의 교과서 중 하나인,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딕은 알바하는 레코드점에서 벨엔 세바스챤을 걸어놓고 차분하게 월요일 아침을 시작하려 합니다.

하지만 파괴의 신 베리가 등장하자마자 이딴 노래나 듣고 있냐며 딕을 욕하고는, 벨엔 세바스찬의 아름다운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던져버립니다. 그렇게 딕의 평화로운 월요일 아침은 날아가고요.


그리고 문제의 500일의 섬머에서, 섬머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 자기 소개란에, 벨엔 세바스챤의 노래가사를 인용합니다.

그 때문에 섬머가 졸업한 지역에서는 요상하게 벨엔 세바스챤의 앨범 판매고가 폭증하여 음반 관계자들을 골치아프게 만들죠. 아니 도대체 왜 여기서만 이 앨범이 많이 팔린거야.



두 사례에서 등장하는 취향의 대상, 즉 벨엔 세바스챤이라는 컨텐츠는 같습니다.

하지만 그 취향을 지닌 사람의 성격은 전혀 달라보여요. 섬머는 교양 속물의 선두주자처럼 보이지만, 딕은 그냥 오타쿠처럼 보입니다.

차이가 뭘까요? 여기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컨텐츠보다는 그 컨텐츠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라는게 제 주장입니다.


딕이 음반을 추천할 때에는, 자기 취향을 드러내는게 목적이 아닙니다. 500일의 섬머의 톰도 마찬가지에요. 잘 모르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취향을 내보이려 하지 않아요.

상대방이 자신의 취향과 비슷한거 같을 때, 비로소 은근슬쩍 '나 이것도 좋아하는데.... 이것도 한 번 들어보면 좋을텐데...'라는 식이죠.

뭐랄까, 기본적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취향에 관심이 없을거라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게 먼저고요, 그걸 밝히는건 나중이죠.


근데 섬머는 약간 달라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기 말로는 재미로, 벨엔 세바스찬을 인용합니다.

"내가 한 말이 누가 한 말인줄 알아? 뭐 몰라도 상관없지만. 하여튼 나는 그래"

스미스를 듣고 있는 톰에게 말을 건내는 것도 이와 유사해 보여요. 제가 베베 꼬여서 그렇게 보인걸수도 있지만 그 장면에서 섬머는,

"나도 스미스를 좋아해"라고 말하는게 아니라 "나도 스미스를 좋아해"라는 것처럼 보였어요. 취향 자체보다는 그 취향을 즐기고, 그 취향의 진가를 아는 자신을 더 뽐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다보니 교양 속물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자신이 뽐내려는 취향이 너무 일반적이거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이지요.

숲고양이님 게시물에서도 보면, 그 정도의 목록으로는 교양 속물이라고 하기에 너무 부족하지 않느냐...라는 지적이 많았었죠.

자신을 뽐내는게 목적이기 때문에, 남들 다 아는걸 가지고 그걸 좋아한다고 해서는 별로 있어보이지가 않아요. 시크해보이지도 않고.

뭔가 남들이 잘 모르는, 그러면서도 알게 모르게 그 바닥에서 식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정되는, 그 미묘한 조건을 충족시킨 컨텐츠들의 목록을 읊어야 훌륭한 교양 속물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취향, 그러니까 컨텐츠 자체가 교양 속물을 규정짓는 결정적인 조건은 아니라고 했는데, 컨텐츠와 교양 속물이 무관한 것도 아니에요.

예를 들어 영화나 음악, 소설, 커피등에 대한 취향은 교양 속물의 자격 조건을 만족할 수 있지만, 교양 속물과는 전혀 관계없는, 아니 오히려 교양 속물이 되기 위해서는 피해야하는 취향도 많아요.

컴백키드를 좋아하는 교양 속물, 후안 마뉴엘 마르케즈를 좋아하는 교양 속물은 이상하잖아요. 콘솔게임이나 MMO RPG을 즐기는 교양 속물도 뭔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같은 분야에서도, 블레이드러너를 좋아하면 교양 속물이 될 수 있을거 같은데 스타워즈를 좋아하면 잘해봐야 오타쿠 정도나 될 수 있을거 같아요.

제 전공이라서 이야기하는건 아니지만...은 사실 맞지만, 들뢰즈, 가다머, 지젝같은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면 교양 속물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거 같은데,

D M 암스트롱, D 루이스, 김재권 이야기 해봤자, 전혀 있어보일거 같지 않거든요. 끽해야 전공자지. 우쒸 그래도 리퍼런스 인용된 건 루이스가 가장 많을텐데.



그래도 저는 듀나님이 예전에 쓰신 글과 비슷한 입장입니다. 어쨌든 교양 속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도 아니고, 멍청한 사람도 아니고, 지탄받아야 할 짓을 한 것도 아니죠.

오히려 저는 조금 부럽습니다. 나도 교양 속물이 되면 좀 있어보일거 같은데, 그러면 어디가서 좀 먹어줄 수도 있을거 같은데, 그게 아니라서 잘봐줘야 오타쿠처럼 보이거든요.

오타쿠가 싫은건 아니지만, 교양 속물이 더 멋있는거 같습니다. 단, 오타쿠들은 섬머같은 교양 속물에게 속지 맙시다. 섬머 나쁜년...





여섯 줄 요약.

1. 취향의 목록은 교양 속물을 결정짓지 않는다.

2. 취향의 목록보다는 태도가 교양 속물을 규정하는데 훨씬 더 중요한 요소이다.

3. 취향의 목록이 교양 속물을 규정하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3-1.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취향으로 포장을 해야 더 훌륭한 교양 속물이 될 수 있다.

3-2. 어떤 취향은 교양 속물을 결정하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감점 요인으로 작용한다.

4. 그래서(?) 난 교양 속물이 부럽다.






ps. 오타쿠가 교양 속물에게 차였을 때 불러주면 찌질함이 배가되는 노래를 첨부합니다.


    • 저는 교양속물보단 오타쿠가 훨씬 더 사랑스러운 걸요.
    • 'D M 암스트롱, D 루이스, 김재권 이야기 해봤자, 전혀 있어보일거 같지 않거든요. 끽해야 전공자지. 우쒸' 222

      들뢰즈와 김재권은 어감부터 확 다르네요. 왜 심리철학은 별로 멋져보이지 않을까요? 안멋져보이는 영미 이름들이 많아서 그런걸지도 몰라요, 들뢰즈 가따리 메를로뽕띠 블랑쇼 얼마나 멋져요 역시 있어 보이려면 불란서이름을 입에 올려야...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는 제목만 보고 뻔한 멜로영화일줄 알았는데 지금보니 High Fidelity였군요.. 제목을 왜 저렇게 미국중년해피멜로처럼..
    • 헉... The Clash의 Train In Vain 느무 사랑하는 곡인데... 이런노래 취급받다니.
    • Nausée/아도르노, 루카치 등등 폴란드나 독일계 이름으로만 가도 간지가 납니다. 카르납, 헴펠 등 오스트리아계 이름도 아무 쓸모없어요.
      자두맛사탕/500일의 섬머에서 톰이 그런 취급을 하던데요...
    • 적당한 교양속물은 귀여워요.... 정도가 심해지면 그 사람이 참 구려보입니다만.
    • 우워 김재권! 우어 있어보여요!

      이번 여름 김영정 추모강연 때 오셨었나요? 저 거기 있었는데!
    • 여름에는 딴 짓하느라 가지 못했죠. 갔던 친구 말이 대가의 아우라 속에서 빛나는 한줄기 날카로운 개그가 인상적이었다고 하던데...
      워낙 고령이셔서 이번이 마지막 한국 방문이실지도 모른다고요. 그런 분들 올 때마다 연예인 보는 기분으로라도 가보고 싶은데 잘 안돼요.
    • 그러셨군요. 저는 초반에 한 문장 말씀하시는 것도 숨차하시다가 강연이 무르익어갈수록 젊어지시는 듯한 모습을 보고 이게 대가의 포스인가 싶더라고요.

      이달 초의 패트리샤 처칠랜드 강연은 무산되었었죠? 준비는 안 되어있었지만 그래도 연예인 구경마냥(...) 가려고 했었는데 아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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