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듀게 급 번개 후기.

485


버스에 오른다. 국토해양부에서 허가를 내는 광역 급행좌석 7106 앞에는 M이란 글자가 붙어 있다.
메트로폴리탄의 약자다. 서울 9백만, 반경 100Km의 경기 인천 합쳐 2천만을 살짝 넘는 거대한 도시의 동맥이다.
나는 혈맥 속을 흐르는 헤모글로빈의 산소처럼 적혈구 버스에 얹혀 오랫만에 서울로 나갈 참이다.
종점에서 이미 반쯤 찼다. 당연하지만 모두들 모르는 얼굴이다. 나도 지금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이른바, '번개'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중앙로를 달리는 버스간에선 생각만 는다.
내게 새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스쳐지나가나 생각해 본다. 2천만 인구의 메갈로폴리스에서는 아마도
아침 출근에만 수천 명쯤 지나쳐갈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스침 과잉의 시대에 인연을 물처럼 흘러보내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일기일회라는 말은 더욱 무게감있게 와닿는다. 일본식 표현이긴 하지만.

기억을 되짚는다. 느긋한 토요일 아침 들어온 게시판에는 간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새벽 시간의 채팅이다.
아침 9시가 넘은 시각에는 대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몇몇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말을 잇고 있다. 번개 얘기가 나왔다. 빨래를 너느라 주마간산으로 보았다.
음식 화제가 등장하다 그러면 2시쯤 모여서 식사하고 만나서 놀자고 했다. 어떤 사람이 '총대'를 멘다.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커피에 조예가 있는 남자는 흥미를 둗운다. 또 다른 분에게는 채팅으로 잠깐 얘기한
이사 관련 화제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토요일, 날씨도 쾌청하고 추위도 물러갔는데
집에 있기는 싫다 ㅡ 라고 생각하는 찰나. 인터넷이 끊긴다.

인터넷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IPTV도, 와이파이도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급하게 인터넷 기사를 불렀다.
평일 출근 때문에 토요일이 아니면 기사를 부를 수 없는 사정에서다. 기사 아저씨는 2시에나 올 수 있다고 했다.
모임의 약속 시간도 2시였다. 이것은 포기해야 하는 일이다. 특별한 오후가 될 수 있을 거란 약간의 기대를 접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놓친 고기가 크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쉬움이다.
아까 받아 둔 연락처로, 나가지 못함을 알린다.

집에 들고 온 일거리를 켠다. 넓게 펼쳐진 형형색색의 엑셀 필드가 눈을 어지럽힌다. 그 때 인터넷 기사님의 전화는
복음처럼 들려온다. 일찍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2시 15분 - 잘 하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간절해지기
시작한다. 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약속이, 포기당하니 아쉬웠고, 가능성을 알아채니 뭔지 모를 달성감에
묘한 희열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신기하게 모든 조건이 맞았다. 마치 전투기가 적을 쫓는 어지러운 화면에서 락 온이 딱 걸린 것처럼.

홍대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다. S, B, C라는 세 분이 있었다. 나 때문에 조금 기다린 듯싶어 미안하였다.
가미우동은 오랫만에 갔지만 사진찍는 것을 깜빡해버렸기에 그 푸짐한 세트를 놔두고도 인증을 찍지 못해 아쉽다.
1차로 점심을 함께 한 후 2차로 간 카페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리가 없다. 하긴 토요일 오후의 홍대 거리는
여러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이마에 점차 늘어가는 잔주름이 내가 여기에 어울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두 번 더 헛걸음한 끝에 어느 한 곳에 자리하여 앉았다. 유러피안 초컬릿이 맛이 좋은 어느 까페였다.



C님은 커피를 많이 마셔 카페인 하이 상태라고 했고, S님은 직접 내린 더치 드립 커피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소스 병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 간장인 줄 알았다. 그들이 별안간 내 물잔에
그 갈색 액체를 툭툭 몇 방울 섞는 것을 보고 순간 아연했다. 하지만 나는 관대했다. 배가 불렀으므로(....)
마셔 보니 더치커피다. 아, 속았구나. 내가 화장실 간 사이 장난을 작당한 거야, 이 사람들(.....)



485


빛깔 좋은 더치커피 희석




485

간장으로 오해받기 좋은 소스 통(....)



나머지 시간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마침 타로 카드가 있어서 여흥의 시간을 보냈다. 점괘가 잘 맞는지는
모르겠다. 못 물어봤다. 나는 사실 타로 카드는 점괘라기보다는 정신과 카운셀링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고민은 많은 경우 패턴화되어 있고,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무의식 속의 욕망을
알아채지 못하는 때가 잦다. 나는 그것을 조금 도와줄 뿐이다 - 어쩄거나, 여흥이며,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피술자의 선택일 뿐이니까.

번개에 참석한 사람들의 세세한 묘사는, 허락된 것일지 아닐지 몰라 자세히 적기는 어렵다. 심지어
이 날 만난 세 분 중 두 분은 듀게에 가입도 안 하신 상태라고 했다.

그러니까, 완벽한 번개다.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가, 다시 구름처럼 흩어진다. 마치 육백 년 전 운종가처럼.
혹시나 싶어 듀게에서 닉네임을 찾아보았지만 내가 만났던 세 명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다. 그들은 나를
알지만, 나는 그들을 모른다. 혹시 나는 선인과 선녀들을 만났을까 하고 잠깐 상상을 해 본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마신 것은 실존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짧고 강렬하게 남은 어제의 경험을
남겨두기 위해, 그리고 이 게시판의 공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그들을 위해 잠깐 여기 표지석을 세워 둔다.

즐거웠습니다.



두줄요약 : 가가챗방에서 가미우동 원정대 결성 - 인터넷이 고장나서 못갈뻔함 - 기사가 일찍 와서 고침
- 나갈 수 있게 되어 나갔음 - 수제 더치 드립은 간장병이었음 - 타로 보느라 진이 빠짐 - 깨끗하게 바이바이                                 

    • ㅇ와 부러워요 ㅠㅠ 나도 번개
    • 연락처를 알았으면 뿌렸을텐데요[...] ㅎ
    • 저기 위에 마쉬멜로가 얹어진 저 음료는 뭔가요?? @ㅁ@)
    • 유러피안 초콜릿이었나 그랬을겁니다. 진한...
    • 진짜 진해보이네요 꿀럭거릴듯해요
    • 아, 정말로 가셨군요. 17살 꽃미남은 못가서 서러웠어요. ㅋㅋㅋ
    • 나는 사실 타로 카드는 점괘라기보다는 정신과 카운셀링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
      공감합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 타로 카드를 무지 잘 보시는 분이 계시는데, 가끔 답답할 때마다 그 아저씨의 타로 가게에 가서 상담을 받는답니다. 이 지역의 듀게 분들에게도 소개해서 꽤 많은 분들이 이 아저씨에게 타로 상담을 받았는데 모두들 만족스러워 - 아니, 아주 재밌어 하셨죠:)

      저도 듀게에서 모임을 꽤 자주 갖는 편인데 언제 봐도 다들 좋은 분들이시더라구요.^^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9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4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4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8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5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2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9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8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4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