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동부연합의 힘에 관한 잡상(좀 긴글이 되었습니다)
1.
이정희 사건을 계기로 경기동부연합이 핫이슈가 되고 있네요.
저는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조직이 있다는 걸 이번 일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되었습니다.
당연히 궁금한건 "무엇이 그렇게 그들은 힘있는 조직으로 만들었나?" 입니다.
얼마 안되는 제 사회생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바로 옆에 있는 한 사람에게 조차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낸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이 공감해주고, 그걸 자신이 속한 공간(제 경우엔 우리 회사)에서 현실화시키는 건 정말 지난한 과정입니다.
때로는 제 아이디어의 부족함으로 인해, 때로는 감수성의 차이로 인해, 그리고 가끔씩은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이 가진 생각이 좌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 말하는 "정치적인"이라는 건 정당들이 나오는 정치가 아니라 사내 정치를 의미합니다.
제가 속한 팀이 한번 성과를 거두었으면 다음 번에는 다른 팀에게 영광이 돌아가야 하니까 아이디어를 접기도 하고, 그 아이디어가 다른 팀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지기도 하고.. 뭐 그런 일들요.
하물며 이건 정말 "정치"입니다. 통합진보당이라는 꽤 큰 정당을 막후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힘. 어떻게 그런게 가능할까요?
이런 저런 글들을 찾아보니까, 그들이 대단한 자금줄이나 조직력을 갖춘 것도 아닌데 왜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매번 그들이 승리하는 걸까요?
더구나 그들이 이긴 상대가 만만치 않습니다.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이런 분들은 설득력있는 언변, 화려한 운동경력으로 진보진영에서는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명망가입니다.
유시민은 어떤가요. 그는 마키아벨리적인 처세로 배신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생존해온 노련한 정치인입니다.
진보신당 분당 사건 당시 경기동부연합은 그들을 이겼습니다. 민주노동당은 경기동부연합이 장악하고,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는 민주노동당을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비례대표 추천 때에도 이긴건 그들이었습니다. 당선가능권의 비례대표 후보자는 그들이 추천한 사람들로 채워졌다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네요.
심지어 그 "유시민"도 10번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들을 내부에서 바꾸기 위하여 노심조와 유시민이 경기동부연합이 주축이 된 민주노동당과 합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좀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경기동부연합이 무슨 재벌이나 사학재단, 검찰 등의 비호를 받는 굉장한 조직도 아닌데, 내부에서 바꾼다니요.
누가 "내부에서 바꾼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경기동부연합이 우리 사회의 주류적 가치를 지배하고 있는 대단한 권력자인 줄 오해하겠어요.
2.
왜,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정치적 힘을 가져다 주었을까요?
그들이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끝내주는 비전을 가져서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씩 얘기되는 그들의 종북적 성향은 우리 국민들 중 1%도 설득할 수 없는 철지난 사상입니다.
봉건왕국처럼 3대 세습을 하고, 경제를 파탄내고, 국민들을 굶기면서 군사력 건설에만 힘을 쏟는 북한을 따르는 정치세력을 우리 국민들 중 누가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민주노동당과 사회운동단체의 내부적인 사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당연히 이 의문을 풀 수 있는 정보가 없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그들의 조직력과 문화가 정치적인 힘의 원동력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력과 문화는 "우리는 하나"라는 전체주의에 가까운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우아한 세계"였나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한 조폭영화에 나오는 말 중에 "이 바닥에서는 100퍼센트 믿을 수 있는 놈 한 명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어" 뭐 이런 대사가 있죠.
정치판도 마찬가지일 껍니다. 현실정치판은 굉장히 냉혹한 공간입니다. 공천과 당선은 딱 한사람에게 허용되는 특별한 권리입니다.
무슨 금전거래처럼 6:4로 나누고 7:3으로 타협하고, 그런게 통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거죠. 차기를 약속한다는 말도 다 허황된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정치인들이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항상 공천과 당선에 그들은 사활을 걸고 승부를 겁니다.
이런 공간이기에 유시민처럼 배신을 밥먹듯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사상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의 정당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런 공간이란 거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이해관계는 도외시하고 조직의 명령에 철저하게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조직에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동료의 승리, 조직의 승리를 온전히 제 것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람, 조직 구성원이 성공한다면 자신이 평생 음지 음지에서 살아도 괜찮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찬 조직이라면 어떨까요?
이런 조직에서 창의적인 생각들이 나오고, 발전을 거듭하는건 기대하기 어렵겠죠.
대신 조직과 조직의 권력싸움에서는 굉장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3.
제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NL이라는 운동집단은 조직의 승리를 위해서 개인은 희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스스로 이런 사상을 내면화하기 위해서 훈련을 거듭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90년대 후반에 학교를 들어가서 꽤 열심히 학생운동을 한 부류에 속합니다. 그리고 NL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했었죠.
대학교 3학년 중반쯤 학생운동을 그만두었기에, 조직 상층부의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는 상당히 많이 경험했다고 볼 수 있어요.
학생운동 과정에서 항상 강조되었던 것은 희생하는 성품과 조직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건 성품과 믿음이 아니라, 사회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그 대안에 대한 치열한 고민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내면화할 것을 요구받았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자본주의의 찌꺼기"라면서 일상에서 조금씩 지워나가기를 요구했죠.
90년대 후반 NL 학생운동진영에서 가장 큰 행사는 학기초에 열리는 한총련출범식, 그리고 8월 15일에 열리는 범민족대회입니다. 이런 행사는 NL의 문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곳입니다.
한총련출범식에 대해서만 말해볼께요. 한총련출범식의 하이라이트는 새로 선출된 한총련 의장이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학교 운동장을 메운 몇 천명의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의장의 등장을 기다립니다. 바다가 갈리듯 운동장의 인파가 좌우로 갈리고, 그 가운데로 의장이 등장합니다.
의장은 차전놀이에 사용되는 동채같은 것에 타고 당당히 서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동체를 짊어지고 무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죠.
숨죽인 학생들 가운데 한사람이 외칩니다. "의장님 중심으로 일심단결, 조국통일 이룩하자" 순수한 육성으로 외치는 음성이지만 정말로 몇 천명이 숨죽이고 있기에 그들은 한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구호를 외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의장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 하는 일종의 종교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르펜슈타인의 "의지의 승리"라는 영화에 나오는, 나치 전당대회, 그리고 히틀러의 모습과 정말 흡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의지의 승리를 훨씬 이후에 보고 그 유사성에 신기해 했었죠.
이런 조직문화를 일상생활 속에서도 내면화 하도록 끊임없이 훈련받는 것이 NL운동의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뇌봉"과 같은 책을 사주기도 하구요.
4.
아마 저런 문화에서 조직적 힘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넌 이번에 나오지 마"라고 지시받으면 언제든 공천권을 포기할 수 있는 문화, 혹은 "넌 이번에 포기하면 안돼"라고 하면 누가 무슨 말을 하던 총선에 출마하는 자세.
이건 "권력"이라는 희소한 자원을 두고 벌이는 게임인 정치판에서 무서운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런 자세와 문화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꽤 감동을 주기도 한다는 겁니다.
이정희의 출마 고집은 이런 문화의 단점을 극적으로 보여주었지만, 보통은 이런 자세들이 큰 감동을 선사합니다. 진화심리학이 알여주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의 희생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도록 설계되었잖아요.
경기동부연합이 일회적 승리에 머물지 않고, 대중정당인 민주노동장에서 지속적으로 다수파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들의 문화가 주는 감동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건너건너 듣기로는 민주노총 하층의 기반조직들을 NL이 상당히 장악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PD계열이 자신의 똑똑함을 자랑할 때, NL은 조직을 장악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구요.
이런 조직력의 배경에는 위에서 말씀드린 성품과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고 짐작 해봅니다.
5.
이런저런 잡설을 늘어놓다 보니 글이 좀 길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운동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면서, 운동을 했던 경험을 타인에게 말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정치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버리려고 했었죠.
현실적인 성취를 위해 운동을 그만두었다는 죄책감, 내가 했던 운동을 무용담으로 팔아먹지 않겠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을 그만둔지 10년이 넘어가면서 그런 강박도 많이 사라져서, 이제는 좀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네요.
NL에 대해 제가 아는 정보라도 좀 드릴까 하고 글을 시작했지만, 이렇게 글을 늘어놓고 나니까, 제가 가지고 있던 이상한 죄책감도 더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몇 분이나 다 읽으실지는 모르지만, 긴 글 읽느라 고생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