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교> (스포)

어차피 로리콤 얘기도 나왔거니와 이 영화 얘기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처음에 영화 예고편 보고 느낀 건 한 늙은 남자의 젊은 여자에 대한 로리타 콤플렉스 정도였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단순히 그것만 다루진 않았어요.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인 이적요가 맘에 안 들어서 영화를 보는 게 힘들었죠.

 

제가 영화를 보고 받은 느낌은, 이 사람은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심장>같이 대중이 좋아할 만한, 대중에게 많이 팔릴 만한 소설을 쓸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정작 써 놓고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지는 않죠. 말로는 여태까지 자기 시중을 들어준

서지우에게 고생했다는 의미로 작가로서의 명성+돈을 얻게 하려고 했다는데 글쎄요.

 

전 이 사람이 '순수 문학'의 첨병인 시인으로서 얻은 명성을 지키기 위해

많이 팔릴 만한 문학작품을 써 내는 것에 노이로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남자의 은교를 향한 욕망이 '늙음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라고 느껴지기보다는,

명예를 지키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한 늙은 시인의 욕심 이상으로는 안 다가오더군요.

 

게다가 그의 말은 앞뒤가 안 맞아요. 처음 서지우를 만난 강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죠.

"별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별은 별일 뿐"이라고요.

하지만 나중에 이상문학상 시상식에서 자신의 소설을 훔쳐 상을 타는 서지우를 축하하러 나와서는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에 대한 상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 또한 나의 잘못에 대한 벌이 아니"라고 말하죠.

솔직히 그 대사 듣고 나서 멋있다고 느껴지기보다는 '과거의 당신 논리에 따르자면

젊음과 늙음도 사람이 나이 들면서 겪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들일 뿐이잖소.

그런데 거기에다 무슨 상과 벌이라는 의미를 마음대로 부여하는 거요, 시인 양반.'이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죠.

그의 미사여구에서 느껴졌던 것은 '자기 자신과 욕망에 대한 성찰과 지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뿐이었으니까요.

박해일의 어색한 노인연기보다 거슬렸던 것은 바로 이 나르시시즘이었죠.

 

서지우 캐릭터야 말할 필요를 못 느끼고 - 원래 물망에 올랐다던 송창의는 물론이고 김무열조차 아까웠어요 -

은교는,,, 진짜 이 캐릭터야말로 남성 판타지의 끝을 보여주더군요.

은교가 막바지에 말하죠. "날 예쁘게 그려줘서 고마워요. 난 내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어요."라고...

제가 은교였다면 "날 예쁘게 그려준 건 고맙지만 그건 할아버지의 환상이었어요.

난 할아버지 머리 속에 존재하는 인형은 아니에요."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텐데...

    • 영화를 안봤는데도 공감가는 글이네요..
    • 나르시시즘을 떠나서 이적요가 내뱉는 모든 멋지구리한 대사들은 그냥 다 공허하더라구요. 감독이 영화적으로 찍어놓은 것과 하등 상관없이 노인네 코스프레에만 열중인 배우의 입에서 나오는 공허한 미사여구들만 듣고 있자니 그냥 실소만 났습니다. 뾰족한 연필 어쩌고 하는 부분들도 어찌나 오그라드는지 껌 포장지에 적힌 글들 같더군요. 이 영화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얄팍하고 가짜 같아요.
    • 매우 동의합니다.
      이적요가, 그리고 영화가 이적요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너무 자아도취적이어서 참고 버티기가 어려웠어요.
      늙음에 가해지는 사회의 시선의 폭력성을 보여주려고 했다기에는 글쎄요...그러기에는 이적요가 스스로 한 건 아무것도 없죠. 그런 수동적인 태도로 '노추'라는 관념에 저항한다는 건 별로 와닿지가 않더라구요. 노추를 경계하라는 건 잃을 게 많기 때문인데 이적요는 쌓아온 게 많은 노인이기에 앞서 시인으로든 문인으로든 자기 스스로 너무 조심하는 사람이죠. 늙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방어가 너무 강하면서 무슨...
      특히나 마지막 장면!!!!! 으으으 오글거려...본인은 앉아서 글이나 쓰고 실제로 뭔가 하는 일은 없이 품위를 지키고 그러면 젊은 여자애가 와서 고맙다면서 안아준다고요? 모든 소심한 예술가 판타지 중 정점을 찍는 장면인 것 같아요.
    •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조금 이해가 되실수도 있어요. 각색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관계로 영화에서는 다소 생뚱맞은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지적하신 부분들이 대부분 원작 소설에 나오는 부분을 억지스럽게 살린 부분들이네요.
    • 위선적이고 왕자병이라는 말씀 공감합니다. 이적요는 (대시인이라는 영화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잃을 게 많아 더욱 비겁해지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한편 젊었을 적에 좀 더 욕망에 충실하게 잘 놀아보지 못해 억눌린 부분(시대와 사회구조의 영향이든 개인의 한계였든지 간에)이 늙어서 감당이 안 되게 튀어나온 면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인민군에게 끌려갈 뻔 했던 일을 구해준 누이였던가, 아는 소녀였던가 하는 이가 당시 17세였었다고 회상하는 씬이 있었던 것 같네요. 은교에 대해서는, 저 개인적으로 은발과 주름살에 일말의 페티쉬를 느껴보곤 했던 학창시절을 보냈던 지라, 노시인에 대한 이끌림에 대해 좀 더 주체적인 부분이라든지 소녀 나름대로의 자아성장의 부분이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했었는데 그런 부분은 거의 없어보여(또는 제가 원하는 방향성이 아니라서? ㅋ)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은교가 이쁘긴 이쁘더군요...
    • 근데 사실 원작에서도 자기도취적이고 왕자병인 건 맞죠. 전 소설이 더 심한 거 같은데.
    • 원작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군요. 하도 젊음 젊음 노래를 하기에 '당신은 젊었던 순간이 없었어?' 싶었는데. 짧게라도 그 부분을 살렸다면 주인공의 행동과 심리가 지금보다는 납득되었을 텐데.
    • 이적요는 자기연민이 강하고, 뒷수작으로라도 자기 명예는 유지싶어하는 위선적인 모습도 있고, 늙음에 대한 성찰이라기 보다는 욕망에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게 맞는데,
      은교라는 영화의 괜찮은 부분은 그런 묘사 속에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중에 어떤 건 그런 택도 없는 욕망에 끌려다니며 자신을 소모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죠. 영화에서 은교와 서지우는 '외로워서' 섹스를 하는데 반해 이적요는 택도 없이 누군가를 맹렬히 원해서 외로워지는 게 아이러니로 느껴졌어요.
    • 글쎄요, 누군가를 원해서 외로워지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외로워지는 거죠. 전 이적요가 은교를 원하는 게 택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에서 '원조교제'라고 욕을 얻어 먹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본인이 뭔가 액션을 취했다면 용감했다고는 생각할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적요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안전지향적인 사랑을 한달까. 거기에 비해 자신의 행동이나 욕망에 부여하는 의미는 거창하죠.
    • 원작소설은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돌이켜 곱씹을수록 삼류 스멜이 줄줄 납니다. 굳이 그런 심한 표현까지 쓰는 이유는 소설 <은교>가 일류인 척하는, 혹은 일류 문학가를 소재로 쓰면서, 마치 여관 장면만 찍으면 리얼리티 살면서 상류층 파티 장면 찍느라 버거워 하는 80년대 충무로 영화 감독이 쓴 시나리오스러운, 덕지덕지 꾸밈과 어설픔이 곳곳에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소설보다는 그 어떤 면에서도 낫다고 봐요. 저는 원작 소설의 추리 코드를 듀나님이 칭찬한 것에 상당히 놀랐어요. 원작을 읽을 때부터 가장 우려했었고 정지우가 걷어내줬으면 했던 게 그 부분이었는 걸요.

      아... 저는 정지우가 <은교>가 삼류 소설인 줄 알면서도 영화한 거라고 봐요. 원작에 도취되어 영화화한 게 아니라는 짐작입니다. 특히나 그 문제의 서지우 사고 씬을 그리는 방법을 보면 원작의 허술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틀어 놓았지요. 그가 왜 <은교>를 택했는지는 알 것 같아요. 그가 만개했던 <해피엔드>의 치정 섞인 섬세함. 그런 코드. 그걸 비주얼로 강화해서 뽑아내고 싶었던 거겠죠. 그런데 <모던 보이>에서도 그랬지만 여전히 원작이 있을 때 그 원작보다는 나으면서도 원작의 후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고 봐요. 제발! 다음 영화는 원작 없는 영화이기를.
    • 굉장히 감정이입해서 보느라 몸까지 힘들 지경이었는데 말입니다.
      이적요 생일파티의 밤 국면전환 장면에선 내가 이적요인지 이적요가 나인지...의 지경에...
      그런데 또 여기서 지적하시는 부분 보니 '그러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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