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권] <피로 사회> -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기에 더 효율적이다

주춤주춤하던 100권 읽기 (독후감) 다시 시작합니다



.. 



012.<피로 사회>


한병철 저, 김태환 역, 문학과 지성사


1.


저는 '한병철'이라는 이름을 이코노미 인사이트의 우울증 특집 기사 속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카를스루에 조형대학에서 강의하는 한국 출신 철학자 한병철은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 같은 정신적 고통을 21세기의 주도적 질병이라고 본다. 한 교수는 현대의 능력 중심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고용주인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억압자인 동시에 피억압자라고 말한다. “일과 성취욕의 과다는 자기착취 수준으로 심화됩니다. 이것은 타인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에요. 자기착취는 자율적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동의 할 수는 있어도, 깊이 파고 싶은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2010년 독일에서 출판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책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리고 21세기 주요 질병은 정신과적 고통이다.)


백번 동의는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정신과 질병이 가지는 사회적 함의를 깊이 파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걸 숙고해 봤자 사회 구조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은 바뀌지 않을 것이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렇기에 분노와 좌절은 커질 것이며, 이는 정신적 고통을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이죠. 사회 비판적 의식을 항시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부정적 정서를 지속해서 느껴야만 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크게 소모되는 고강도의 지적 노동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 비판적 지식인/행동가들을, 그들의 정치/사상 노선에 제가 동의하느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인간적으로 존경합니다. 그들의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죠. 하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고갈된 저는, 제 정신에너지 통부터 튼튼하게 키워놓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 비판은 고사하고, 하다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주며 사는 저열한 삶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냐고요. 그렇게 저는 정신과 질병에 관한 한, 개인주의(?)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던 얼마 전, 교보를 어슬렁거리다, 어여쁜 보라색 표지의 얇은 책이 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매대에 놓인 것을 보았습니다. 예쁘고 얇아. 그런데 사회서적. 오오 수준있어. 바로 낚였지요. 한 두 페이지 읽다 보니 바로 알겠더이다. 이 책이 그때 그 기사 속의 그 분의 책인 걸. 


너무 재미있어서 흠뻑 빠져 읽었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초반에는 철학자 특유(라고 짐작되는-_-)의 사색적인 문체에 적응이 안 되었어요. 하지만 우울증에 대해 무려 철학자가 쓴 글인데, 다른 철학 책은 못 읽어도 이건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신경써서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큰둥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이 얇은 책에는 여러 철학자들의 (우울증과 관련된) 글이 비판을 받는데, 대부분 저는 모르는 철학자들이거나, 이름만 아는 (칸트, 니체) 철학자들이었거든요. 이런 부류의 글은 일종의 말싸움 구경인(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쪽 사람 말도 알아야 신나서 싸움 구경을 할 텐데, 한쪽 말만 듣자니 재미가 반감. 또 생전 처음 듣는 소설에 대한 평론 글도 있었는데, 그 글은 정말 읽어서 무슨 소린지...



2.


그래도, 얻은 게 참 많은 책입니다. 사유의 힘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직업의 소유자가 쓴 글답게, 제가 우울증 와중 겪은 많은 경험을 한 두 문단으로 압축해 버리곤 하시더군요. 덕분에, 필사해야지 마음먹은 후 처음으로 부분 필사한 책이 되었습니다. (아이폰의 그 콩만한 자판으로-_-),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런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성과사회이ㅡ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이다..'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초자아는 이상화를 통해 이상 자아가 된다. 초자아는 억압적이다....이상 자아는 유혹적이다...초자아에게서는 부정적 강제가 발생한다, 반면 이상 자아는 긍정적 강제력을 발휘한다. .. 그러나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간으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만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 자아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이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 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이다. 성과 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


이상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빋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닻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 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 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3.


특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부분은 칸트의 신이 사라지면서, 또 타인으로부터,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오히려 정신적 고통이 증가했다고 논파한 부분이었어요. 


'(인간의 도덕적 양심에서 더 발전한)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도덕적 본질로 정의되는 칸트의 신...징벌하고 심판하는 기관일 뿐만 아니라, 보상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아주 정확한 비례에 따라 윤리성만큼의 행복이 배분된다." ....윤적이고자 고통을 감내하는 도덕적 주체는 보상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진다. 보상의 위기가 닥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신은 기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신뢰할 만 하다.'


 '후기 근대의 성과 주체는 의무적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그는 타자의 명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타자로 부터의 자유...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보상의 위이가 찾아 온다. 인성으로서의 보상은 타자 또는 제3자라는 심급을 전제한다. 스스로를 보상하거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칸트에게는 신이 보상의 심급이다. 신은 도덕적 업적을 보상해주고 인정해준다. 보상구조에 이상이 생기면서 성과주체는 점점 더 많은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다. 따라서 타자관계의 부재는 보상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초월적 조건인 것이다.'



심리치료(는 아니고 약 타 먹는) 와중 여러 번 들은 소리가 있어요.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자기가 자기 일에 끊임없이 의미 부여를 하며 삶의 가치를 찾아야지, 타인의 가이드나 사회적 인정을 따라가면 안 된다.' 들을 당시에는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내 인생에 가치 있는 게 뭔지 몰라서 헤매는 나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라 여겨 깊이 공감했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타인이 무시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자기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스스로 보상을 내린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기 혼자 이 일은 옳고 의미있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려 노력하는 것과, 타인이, 사회가, (더 나아가 신이) 인정하고 보상해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더군요. 그럼에도 저는 내 스스로의 가치,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발굴하며 내가 한 일에 대해 자가 보상을 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수도 없이 (입바른) 말로 들어온 일이기에 쉬운 일이어야 한다는 착각은 집어치우기로 했어요. 자기가 자신을,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보상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던 거에요.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그래서 삶이 미치도록 괴로울 때면, 주변에 자신을 보듬어줄 타인마저 없다고 느끼면 더더욱, 사람들은 절대적인 누군가를 찾아 종교니 영성쪽으로 달려가나 봅니다. 자신의 자유를 모두 내어 주고라도 얻을 수 있는, 100% 신뢰할 만한 절대적 보상체계, 기만하지 않는 신에 의지하기 위하여. 타인의 따스함과, 절절한 신앙심.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기대는 두 큰 기둥이죠. 




4.


그런데, 이런 성과사회 속에서, 신도 타인도 잃어버린 채 점점 더 소진되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나 눈에 확 띄는 것은 없습니다. 깊은 심심함. 영감을 주는 무위의 피로, 근본적 피로. 공동체의 부활. 뭐 이런 것들. 그런데 이런 '대안 부재'에 실망하기에는 저도 나이가 꽤 들었습니다. 제대로 현실 맥을 집어준 것만 해도 어디.  


21세기 들어 개인들은 각종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가 한계가 없는 자가 착취의 폭력이 되어 돌아오는 성과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이 담겨 있는 얇은 책. 얇디 얇은 책의 상당 부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날려버렸음에도, 그 나머지 분량만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철학자의 사유의 힘에 새삼 감탄하게 한 책. 자기 계발, 자기 경영 등의 단어가 가지는 위험함을 새삼 일깨워 준 것은 물론, 우울증 환자 입장에서 타인, 공동체, 종교(?)의 역할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책. 


예쁘고 얇은 책 껍데기에 낚이기 잘했습니다.


    • 대안부재와 비싼 가격을 접어두자면 나쁘지 않은 책 같아요. 그리고 이 책 정말 많이 팔려서 신기해요.
    • 대안(?) 부분에서 갑자기 논리가 널뛰는 것은 거슬립니다. 하지만 현상적으로 현 사회를 바라봤을 때 무척 매력적인 주제를 다뤘죠.

      무엇보다 문장이 무척 맛깔납니다. 철학자의 글 중에서 이토록 간명하고 담담하게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이게 저자의 역량인지 번역자의 역량인지 궁금해지더군요. 문장이 누구의 힘인지 궁금해져 같은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볼까 고민 중입니다.
    • 자기착취에 대한 정의가 와닿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궁금하지만 뻔할 것 같아서 안 읽을려고 했는데, 한 번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 오호, 관심가는 책입니다. 요새 이런 논의가 꽤 대중적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늘 읽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아직 못 읽어본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와 어떻게 같고 다를지 궁금해요. 으으, 읽고 싶은 책이 쌓여만 가네요. 지난번에 being님이 올려주신 추천도서목록에도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았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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