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배를 밀며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장석남, 배를 밀며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 아슬아슬 배에서 떨어진 손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두며, 뵈지도 않는 길에서 

못다한 침묵을 부드럽게 밀어내는 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네요. 


또 한 번의 사랑이 가고, 다시 또 사랑이 오는 삶을 맞으면서,

최승자 시의 한구절처럼, '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지만, 

이순간엔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만 떠올립니다.



    •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장석남, 배를 매며
    •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 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장석남,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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