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린 일요일






문을 잠그고 나서야 열쇠가 안에 있는 걸 깨닫고

쏟아지는 폭우 속에 버스까지 놓치고

독감에 걸린 일요일이 이 정도는 돼야지

떨쳐지지 않는 그대 생각까지도


태워버린 토스트, 잊어버린 그대 번호

손가락은 베이고, 맥주는 넘치고

감기에 까지 걸렸으니

완벽한 일요일이지 뭐야

하물며 그댄 잊혀지지도 않으니


내 보라색 부츠 안에 그대의 스타킹을 넣어뒀어

내가 그댈 안 잊겠다면 어쩔래


수다를 떨다 모자를 두고 나왔어

강아지를 물고 고양이를 밟고

금상첨화로 독감까지 걸린 참 흔한 일요일

이쯤이면 그댈 그리워하는 것만 남았나


내 보라색 부츠 안엔 여전히 그대 스타킹이 들어있어

내가 정말 안 잊어주겠다면 어쩔 셈이야


쓰레기 취급을 받고 쓰레기통에 처박힌 채

도와달라 외쳐도 미친놈 소리나 들을 뿐

이 정도야 그냥 흔한 일요일 아닌가

감기는 덤이지, 잊혀지지 않는 그대 생각도


내 보라색 부츠 안에 그대 스타킹이 들어있다면,

내가 절대 그댈 놓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나올지 정말 궁금하군 그래








사실은 면역력이 떨어져서 신체 반응이 오겠다 했는데 결국 감기에 걸렸습니다

일 년에 한 두 번씩 이렇게 두통, 복통, 오한, 우울증, 불면증, 호흡 곤란, 감기, 첫사랑의 기억, 근무력증 등의 기분 나쁜 증상들이 한꺼번에 덥칠 때가 있습니다

견딜 수 있다는 건 아는데,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자체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거죠

잘 버티고

엊그제는 헌책방에 들러 몇 시간씩 책을 고르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려,는 와중에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렘의 사이버리아드 중고본을 득템하는 행운을 거머쥐고

맛있는 걸 먹어야 해, 먹어야 해, 하는 강박으로 이대앞 카리카리에 갔더니 폐업을 했네요, 여기 좋아했었는데

얼굴을 알만큼 단골은 아니었지만 가끔 비가 퍼붓거나 무척 추운날에 가면 '괜찮으시다면 차 한 잔 드릴까요'라고 삼가듯 묻는 일본인 주인 아저씨가 계셨죠

결국 아무데나 들어가 만두를 먹다가 희망은 희소하고 추상적이지만 시련은 산재하며 구체적이라는 구절을 읽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뭐, 누구나 가끔은 유행가 가사에 울먹이는 것같은 그런 순간이 있는 거 아닌가요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비극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따라 일어나는 게 아니라

시간 그 자체에 의해, 시간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 일어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꼬깃꼬깃해지도록

너덜너덜해지도록


아마도 장자가 그런 얘길 했는데

강을 건너다 빈 배가 떠내려와 부딪힌다면

뱃전이 흔들려 넘어지고 다쳐도 당신은 불운하다 여길 뿐

빈 배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딪혀온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향해 즉시 화를 내고 원망을 퍼붓게 된다

전자에는 화를 내지 않고 후자에는 화를 내게 되는 차이가 어디서 오는가, 하고 말이죠


아주 어릴 때부터 코끼리를 좋아했는데, 어린이 대공원에서 생전 처음 보았던 코끼리는 지금은 죽어 뼈만 전시되어 있지만 아무튼

지상에서 가장 큰 몸집을 가진 생명체가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참 오묘합니다. 피식자도, 특정한 포식자도 없이 이 세계와 최소한의 관계만을 맺으며 군집해 살고 홀로 죽는. 그들에 관한 종교가 없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을 거예요

고독히 걸어간다. 악을 낳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적다. 숲속의 코끼리처럼.

공각기동대의 이 글귀는 마음 속으로 오랜 시간 아주 여러번 되뇌어보곤 했습니다


장자의 빈 배와 공각기동대의 코끼리, 그리고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감기 걸린 일요일의 우화는 루이스 캐롤의 스나크 사냥으로 갈무리하고 싶군요

교훈은, 아무튼 결론은 환절기, 감기 조심합시다


'그 날을 조심하려무나, 스나크가 부줌이 되는 때를!

그 순간, 너는 소리도 없이 돌연히 사라져 버리고 우린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것이야말로

내가 삼촌의 마지막 말씀을 생각할 때 내 영혼을 짓누르는 것이죠

내 마음은 떨리는 두부로 흘러넘치는 밥그릇에 불과하게 됩니다

행여라도 부줌과 맞닥뜨린다면, 그 날, 바로 그 순간, 저는 소리없이 돌연히 사라져버릴 거니까요

바로 그 생각에 저는 견딜 수 없는 겁니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일요일에 갇혀있어

눈에 고인 세상도 정지된 채 변함이 없어

심지어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도 똑같아

대체 'wonderwall'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게 엉망이 돼버렸어

거울 속에 갇힌 듯 뒤집혀 버렸어

그대에게 닿으려 이 노랠 쓰지만

그대가 알아채리란 보장이 없어

지금 듣고 있는 그대의 얘기야

그대가 모르면 소용이 없어


크리스마스에 다른 약속이 없다니 정말 잘된 일이야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모두들 내가 정상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니 기뻐

정말 형편없는 기분이란 걸 알아준 것만도 감사해


모든 게 뒤집혀버렸어

화면 속에 갇힌 것처럼 말야

그대에게 닿으려 이 노래를 쓰지만

그댄 끝내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르지

바로 그대 얘기란 걸 알려주고 싶은 건데

다른 사람은 필요 없는데

그댄 그냥 맞는 말이라고 생각할 뿐

정작 그게 '그대'인 줄은 모르지


...어쩌면 내일은 이 모든 게 끝나고 월요일이 와줄지도 몰라

눈에 고인 세상도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라디오는 착각하지 말라는 듯

이번에도 어김없이 'wonderwall'을 트는데...


나는 지금 내 진심을 꺼내보이고 있어

화면엔 내 좌우가 뒤집혀 보일 거야

이 노랜 그대에게 닿으려는 나의 몸부림이야

하지만 영영 닿지 못할까 두려워

이건 모두 그대의 이야기야

다른 사람은 소용이 없어

그댄 여전히 듣고 있지만

정말 그대 얘기인 줄은 모르지

바로 그대란 말이야

내가 지금 누굴 보고 말하는 건지

그대는 알잖아




sunday with a flu / yedelice

writing to reach you / travis

translated by lonegunman




    • ...강을 건너다 빈배에 부딪혀서 다치면 누가 이딴거를 버리고 갔어라고 화를 낼거같은데요...성격 인증이네요;

      감기 어서 나으세요.
      • 저라면 경찰에 일단 전화를 해요. 여기 떠다니는 빈 배가 있는데 무슨 연유인지 조사좀 해주세요...



        일단 따순물 듬뿍 드시면서 목에 손수건 두르고 골골골 아픈 티를 팍팍 내세요! 쾌차하시길 바라요ㅠ
    • 그런 수가 있었군요!
    • 트래비스의 노래는 정말 절절하군요.

      전 자주 아프지는 않는데, 2년에 한번 정도 된통 앓을 때가 있습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선생님께서 심하게 걱정해주실정도로요.
      평상시에는 내 머리가 그저 위에 달려있겠거니 하다가
      욱신거리고 무거워져서야, 바로 거기에 달려있었구나 싶어서 새삼 반갑기도 하더군요.
      이거야 정말 가끔 아플 때, 심지어 그 아픈걸 즐길 수 있을 때에나 할 수 있는 얘기고.
      론건맨님 어서 나으세요.
    • 이 곡을 쓸 때 도입부 코드가 너무 아름다워서 스스로 감탄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오아시스 원더월의 표절이었대요. 버리려다 어차피 오아시스도 온통 비틀즈 표절인데 뭐! 하고 그냥 가져다 썼다는 얘기가 있죠, 심지어 가사에 원더월을 직접 언급하는 패기까지. / 바로 너에게 하는 얘기란 말야,라고 외치지만 우린 그 '너'가 내가 아닌 걸 너무 잘 알죠, 그러니 이 노래의 결말은 결국 노래 속 화자가 너에게 닿지 못하는 거겠죠 // 아무튼 아픈 건 성가신 일이에요 정말
    • 원더월 들어보니 정말 그렇네요 하하하 오아시스도 어쩌진 못할 개구쟁이들 같네요.
      그래도 전 '혹시 나야?' 할 것 같아요. 내가 그 너가 아니라는걸 너무 잘 알고있지만, 당첨될까봐 사지 못하는 로또처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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