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반미의식에 대해

전 진보진영의 미국에 대한 시각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미국이 전지구적인 패권국가이며 많은 영역에서 상당한 정도로 자국중심주의,이기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와중에서도 이나라가 법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진일보한(진보란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쓰지 않겠습니다) 국가라는 사실, 그것이 또다시 세계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진보세력이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판례가 나왔죠. '오바마케어'라고도 불리는 국민건강보험이 연방대법원에서 합헌 결정을 받은 것입니다. 개인에 대해 특정 건강보험 가입을 강제하는 것이 연방정부의 권한 중 하나라고 인정된 것입니다. 미국 대법원의 판례는 실질적으로 다른 사법체계를 가진(극단적으로 신정일치 사회인 아랍이나 사법부가 제대로 독립되지 않은 중국같은 나라를 제외하고) 나라들에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미국이란 나라의 정치적 영향력때문이 아니라 비슷한 판례가 없거나 법적 판단근거가 애매모호한 경우 법관들이 미국의 판례를 참고하는 게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한국에서도 국민건강보험의 위헌여부가 헌법재판소에 올라간 상태죠. 전 이번 미국의 판결이 꽤나 많은 영향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한국처럼 지배계층이 미국을 사모(?)하는 나라의 경우에는요.

굳이 카터, 레이건이 김대중을 살리기위해 박정희 정권을 압박한 일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진보세력은 전세계적인 패권국가가 하필 미국이라서 생긴 이점들에 대해 인정할 필요가 있어요.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홍콩의 사례를 보더라도 패권국가가 어디냐는 정말 중요하죠) 미국사회가 WTC 주변에 이슬람사원 건립을 허용한 일련의 과정은 개인의 권리와 시민권 보장에 대한 미국인들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사례죠.위선적인 톨레랑스가 아니라요. 프랑스에서 극우정당이 득세하는 걸보면 알 수 있듯이 감성에 호소하는 진보성은 쉽게 전복되기 마련입니다.

얼마 전 국내 최대 진보매체에서 오바마의 Cultural War 선거전략에 대해 비판적 늬앙스를 내비치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오바마 정권의 보수적 속성을 감추고 진보성을 가장하기위해 동성애이슈를 건들이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물론 오바마가 동성결혼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히기 전에 전략적으로 판단하고 이해득실을 따졌을 겁니다. 정치인이 그정도 노련함도 없다면 오히려 문제겠지요. 근데 국내의 진보언론은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제대로된 논평을 해주기는 커녕 반미 반제국주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게 고작입니다. 이정도면 진보진영에게 있어 반미란 거의 관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찌되었든 미국에선 오바마선언 이후로 인종그룹중에서 가장 낮았던 흑인들의 동성결혼 지지율이 급상승했고 극마초적인 힙합계에서도 커밍아웃을 하는 아티스트가 등장하는 등 실질적으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죠. Jay-Z도 찬성입장을 밝혔구요. 앤더슨 쿠퍼도 영향을 받은 걸까요? 이들의 대중적 영향력은 상당할 겁니다.

(덧붙여)
'오바마케어'에 대해 좀 더 얘기하자면 원래는 연방대법관 구성이 보수5, 진보4라서 오바마의 패배가 예상되었죠. 근데 부시정권이 임명한 보수 대법관 로버츠가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기적적으로 합헌판결이 났습니다. 로버츠 대법관은 임명과정에서 오바마로부터 강한 공격을 받았고 지금까지 오바마와 사사건건 충돌해오던 사람입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찬성을 한 건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압도적 표결로 통과된 법안을 뒤집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던 것같습니다. 한마디로 의회존중태도) 국내 진보정당의 일부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호러수준의 반민주적 위법적 행태들에 비하면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얼마나 견고한지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뭐 공화당이 뒤집어 엎자고 난리인데 하원이 날뛰어봤자 상원은 민주당이 장악한 상황이라 소용없을 겁니다. 티파티에선 주정부를 통해 건강보험 추진을 방해하자고 공작중이지만 글쎄 애초에 연방정부랑은 활동영역이 달라서 그것도 확실하지 않구요. 권력의 분할과 상호견제가 민주주의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845186
      밑의 주체사상 글에서 소개된 내용 중 NL 관련 챕터를 소개합니다.
      이쪽의 관점은 미국이 글러먹은 나라라기보다는 그 삶을 위해서 물질적, 정신적 식민지로 만들기 대문에 우리는 이러한 것을 누릴 수 없다...에 가까워 보이는군요. '미국'을 지우고 '다국적 기업'을 그 자리에 넣으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게 되긴 하는데, 이는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바꾸라고 하는 수준의 이야기죠 -ㅁ-
    • 전 다국적 기업보다는 금융요. 2008년 이후에는 또 양상이 바뀌는 것 같지만, 펀더멘털 자체는 장난이 아니니...
      (참고로 가끔 떡밥으로 튀어나오는 군산복합체... 천문학적인 돈이 오고가긴 하지만 정작 그 규모는 전부 다 긁어모아도 미국 경제 전체 규모의 10%도 안 됩니다.)
    • 참 의심도 많아요. 한때 미국영화만 나오면 반미제국주의 운운하는 영화평론이 허구헌날 나올때가 있었죠. 잘만들면 그래봤자 미국놈들이 미국감싸는거ㅋㅋ , 못만들면 거봐라 미국놈들이 미제국주의 퍼뜨리느라 노력중 등등. 그런데 반미영화 나오면 이유불문하고 칭찬하기 바쁘고.
      911사건때 다양한 나라의 민족들이 죽었는데도, 미국 잘죽었다고 속시원하다고 하는 사람들 많았죠. 미국 WASP만 죽었다고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하는데 다양다종의 사람들이 죽어도 그게 미국이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도 된다는 사람들 보면서, 저래도 어디 나가서 미국은 인권국가가 아니라고 하겠지. 본인들 조차 인권개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 이상한 반미도 많지만 이상한 친미도 확실히 많은게 한국사회지요.(심지어 대통령까지 해먹는..)
      오히려 그나라의 외교야말로 국내 정치 사정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것도 없다고 생각되요.
    • 간단하게 나누면 나눌수록 적용하기도 쉽고 믿기도 쉽나봐요. 복합적인 요소를 다 따지며 나아갈 이론이 딱히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랬다가는 응집력도 별로, 실행력도 별로겠죠. 정치적 적자생존의 결과 아닐까요.
    • 그런 면도 있다는 건 동감하는데요, 반대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본인을 진보라고 하는 분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관성으로 과도하게 미국 탓을 한다는 걸 저도 종종 느끼는데요. (특히 NL 같이 심한;;)
      우리 사회 전체로 보면 오히려 제대로 고민해보지도 않고 미국화 하는 것을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요,
      보수의 상당수는 무비판적으로 미국을 추종하거나 미국 제도를 편의적으로 해석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시스템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봅니다.
      솔직히 문제가 될 정도의 반미주의가 우리나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있기는 한가 싶고요.

      또 하나, 미국이 내부적으로 꽤 괜찮은 선진국라는 걸 가정한다 하더라도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타국에 관철시키려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 최고의 민주국가였고 선진국가였지만, 그렇다고 주변 도시국가들이 아테네 제국주의가 전부 좋았던 건 아니죠.

      오바마케어가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예가 타당하다면야, 부시의 극우 드라이브가 다른 나라에 끼친 예도 함께 봐야겠고요.
    • '진보의 반미의식'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NL은 과거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로 파악했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적인 정권 쟁취, 통일국가 수립을 가장 큰 과제로 삼았었죠.

      다른 좌파진영의 판단은 다릅니다. 비슷한 단어 '제국주의'를 사용하기에 헷갈리기 쉽지만 좌파 일반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로서 제국주의를 다룹니다. 즉 미국이 '악의 제국'이라서 다른 선한 국가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체제로서 자본주의에서 패권국가 미국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죠.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좌파에게 있어서 제국주의에 대한 판단은 양면적입니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인도 점령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한 고전적 이론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 혹은 아직 자본주의적 발전을 시작하지 못한 국가에 자본주의를 이식시키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당연히 '진보'라고 판단할 수 있죠. 단, 그 과정에서 식민지 국가, 후발 자본주의 국가 인민의 비참한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을 영국과 비교해 그러한 '진보'적 역할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전제는 정부를 장악한 정당이 어떠한 정당이냐는 것은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체로서 자본주의에서 결정되는 국가의 역할을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언급한 '오바마 케어'를 보죠. 전 이번 미국 대법원 판결을 환영합니다. 당연히 이뤄져야 할 것이 이뤄진 것입니다. 오바마가 동성 결혼 허용을 선언한 것도 지지를 보냅니다. 그렇지만 미국 대법원의 오바마 케어 결정이 타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FTA 때 많이 나온 얘기지만 미국의 농업 보조금을 봤을 때 그들의 자국 내 정책과 외국에 대한 정책이 자동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국가에나 '자유무역'의 전도사로서 무역장벽 해체에 가장 앞장서는 나라가 미국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무역장벽을 지닌 나라기도 합니다.

      시민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9ㆍ11 이후 미국의 시민권은 상당히 많이 후퇴했습니다. 패트리어트법이 그렇고, 최근 오바마가 서명한 국방수권법도 그렇죠.) 그들 정부가 자국민의 시민권 확대에는 노력했을 지 모르지만(이것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현 상황을 봤을 때 의심스럽죠) 해외에서의 역할을 보면 과연 민주주의의 확장에 얼마만한 기여를 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되레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례는 바로 자국이 보유한 공식문서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죠(칠레 쿠데타 후원 등).

      좌파의 '반미'가 미국의 보통 시민,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이뤄낸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확대까지 폄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세계에서 하는 역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우선하는 것일 뿐입니다.

      NL과 같은 퇴행적 반미주의는 오히려 좌파가 아니라 인터넷 우파 사이에서 더 퍼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사과식초'님의 지적은 뜬금 없습니다. 9ㆍ11 사건 때 좌파의 다수는 '속시원'한 게 아니라, 미국의 이후 대응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휩싸일정도였습니다. 미국이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도 된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죠.

      중요한 것은 9ㆍ11이라는 사건이 '왜'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이 해외에서 벌여온 비민주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의 민주주의적 성과와 번영을 '위선'의 결과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던 근본주의자들의 기반이 확장됐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마땅히'라고 해석하진 않겠죠? 이러한 분석은 한국의 좌파 뿐 아니라 노엄 촘스키, 나오미 울프, 고 하워드 진 등 미국 내 좌파에 의해서도 일반적으로 지적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바마 정부에서도 일부 수용돼 불철저하긴 하지만 당선 후 아프리카 순방에 나선 오바마가 과거 미국의 대외노선에 대한 반성 비슷한 표현을 하기도 했었죠. 9ㆍ11 테러 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이 가시화되던 때 희생자들의 가족들도 자신의 가족의 이름으로 침략전쟁을 벌이지 말라며 부시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었습니다.

      지난해보다 조용하긴 하지만 오큐파이 운동은 미국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몇십 년 만에 새로운 좌파가 성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죠. 이들은 미국 내 민주주의와 경제적 평등의 확대 뿐 아니라 세계적인 불평등의 수정과 호혜에 기반한 국제관계에도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남한의 '반미' 좌파들은 이들의 운동에 응원을 보내고 있고, 공동의 행동을 도모하기도 합니다(지난해 세계 공동행동의 날 행사를 진행했었죠).

      그저 나이키 안 입고, 코카콜라 안 마시는 정도로만 '반미'를 받아들이던 시절은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한 부류가 없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더이상 주류는 될 수 없죠.) '반미의식'을 비판하시려면 좀 더 면밀하게 그 주장들을 살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 저는 이 댓글 추천 누르고 싶네요.
      • 저도 이 댓글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일목요연하게 잘 말씀하셨습니다.
    • 결국 답은 '뭐든지 극단적이면 좋을 것 없다' 네요.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친미를 이야기하면 반미를 끄집어내고, 반미를 이야기하면 친미를 끄집어내서 이야기 하는 것도 알게 모르게 극단을 피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 원글님의 논지는 일리있다고 생각합니다, 몇몇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이미 다른 분들이 잘 설명해주셨네요.



      가장 큰 진보언론이라로 하시면 민중의 소리를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잘 아시겠지만 진보 언론들은 저마다 지향하는 정치적 입장들이 차이가 있고 당연히 미국에 대한 입장, 그에 대한 비판의 맥이 상당히 다릅니다. 민중의 소리는 대표적인 NL계열 언론이구요. 저런 논지의 기사가 나왔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아요. 아직은 이런 부문에 대해 오래되고 경직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죠.
    • 철 지난 맹목적인 반미 의식 같은 거 지적하시는 거야 십분 이해하겠는데 부연 설명 내지는 예시는 전혀 와 닿지 않네요. 이를테면, 미국의 수정헌법 1조가 한국에 뭔 영향을 줬을까요? 한국의 친미들이 미국의 그 법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겠지요.
    • 민노당 기관지인 민중의소리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 그걸 진보진영의 관점이라 볼순 없지 않을까요? 그쪽을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있을텐데 말이에요.
      • 민중의소리였으면 언급도 안했죠. 유명 일간지 중 하나입니다.
    • 여기 글과 댓글들을 보니 어제부터 제가 듣기 시작한 노래가 자연스레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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