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기 위하여 시를 읽어보는 밤 (약간의 스압)

 

 

밑에 에아렌딜님 글에 댓글을 달려다가, 머리를 쥐어뜯어보아도 뭐라 말해야 좋을지 도통 모르겠어서

이럴 땐, 기가 막힌 말들을 이미 적어두었을 시인들의 외로움에 대한 시들을 건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외로움, 하면 또 시인들이죠- -b

제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 중에서 추려보았는데, 혹시 같이 나누고픈 시 있으신 분은 공유해주셔요.

이 참에 파일 하나를 만들고 있어요. 외로움을 노래한 시들 모아서 :)

 

우선, 외로움의 잔혹함을 노래한 시들입니다.

 

 

외로움의 폭력 - 최승자

 

내 뒤에서 누군가 슬픔의

다이나마이트를 장치하고 있다

요즈음의 꿈은 예감으로 젖어 있다

무서운 원색의 화면,

그 배경에 내리는 비

그 배후에 내리는 피.

죽음으로도 끌 수 없는

고독의 핏물은 흘러내려

언제나 내 골수 사이에서 출렁인다

물러서라!

나의 외로움은 장전되어 있다

하하, 그러나 필경은 아무도

오지 않을 길목에서

녹슨 내 외로움의 총구는

끝끝내 나의 뇌리를 겨누고 있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5 - 이성복

 

물 고인 땅에 빗방울은 종기처럼 떨어진다 혼자 있음이 이리 쓰리도록 아파서 몇 번 머리를 흔들고 나서야 제정신이 든다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자꾸만 피부병이 번지고 한겨울인데 뜰 앞 고목나무에선 붉은 싹이 폐병환자의 침처럼 돋아난다 어떤 아가씨는 그것이 꽃이라고 하지만 나는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견디려면 어떻든 믿어야 한다, 믿어야 한다

 

 

 

앞의 두 편이 외로움의 절절함을 알아주었다면, 다음에 소개할 두 편은 개인적으로는 외로움을 조금은 누그러뜨려주는 시였어요.

 

 

외롭지 않기 위하여 -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소리만이

빈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새 -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마지막으로, 외롭다는 말을 한다는 것, 그것을 듣는다는 것, 그렇게 대화를 한다는 것 의미를 말해주는 것 같은 시를 덧붙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린 것도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 고정희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도 따뜻한 세상으로 가는 길은 잘 모르지만, 뭐 그냥 이렇게 같이 찾아가는 것 아니겠나 싶습니다.

같이 찾다보면 벌써 조금씩 따뜻하더라고요. ㅎ

 

 

    • 우와.. 따스해요.
      시보다도 렌딜님을 위한 아해님의 게시물이

      태풍만 갈게 아니고 온기도 함께 일본으로 갔으면 싶고
    • 이 글이 이미 따뜻합니다.
    • 렌딜님도 아해님도 이 글을 보시는 많은 분들도 더 따뜻해졌을거예요. :)
    • 최승자 시인은 투병하는 분이라 그마음이 더욱 전달이 돼요.
    • 이인, 보리, 쿠키님/ 따뜻함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시를 고를 때는, 이 시가 과연 위로가 될까 하는 걱정이 좀 있었는데 (막 밝고 아주 따뜻한 시라기보다는 여전히 슬픈 채로 건네는 엷은 온기 같은 시들이라서) 글 자체를 따뜻하게 읽어주시니 그것도 감사한 일이네요.

      가영님/ 그러게요.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을 때는 그런 고통 속에서 토해내는 시들을 읽고 내가 위안을 받는 것이 괜찮은 것일까 싶어지기도 해요. 배신처럼 시가 밝아지더라도 그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셨으면 하는 생각도.
    • 아, 참 좋네요. 두고두고 읽으려고 한편한편 다 베껴 놓았습니다.
    • 공장장님/ 나름 고심해서 골랐는데, 한편한편 다 아껴주시니 저도 참 좋습니다 :)
    • 시 있는 게시물이 좋아요. 지친 마음 잠시 내려놓고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 시 감사해요 최승자 시인의 시가 특히 와닿네요. 저 분의 기사를 읽은 적 있는데 오버랩되서 그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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