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영화제] VHS를 보고 잡담 (글 뒷쪽에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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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제목은 그냥 "VHS"가 아닌 "V슬래쉬H슬래쉬S"입니다만,
이 기호를 넣으면 글이 자꾸 에러가 나는 거 같아 편의상 "VHS"로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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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페이크다큐멘터리라는 말을 더 자주 썼던 거 같은데,
언제인가부터 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남겨진 영상들을 편집했다"고 뻥치는 장르를 파운드 푸티지라 부르더군요.
근데 이렇게 말하면 헷갈리는 게, 현대미술의 비디오아트 쪽에서는 "파운드 푸티지"란 용어를
좀 다른... 아니, 많이 다른 뉘앙스로 사용하는 거 같아서요.
"있는 척"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기존 영상을 사용"이라는 차이?
요 몇년간 본 파운드 푸티지 장르물 중에 잘만든 영화를 꼽으라면
저는 '트롤헌터'와 이 영화를 꼽게 될 것 같습니다.
(저한테 '크로니클'은 별로였거든요.)
근데 트롤헌터만큼 즐겁게 보았느냐...하면 그건 아닌 듯.
호러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쪽의 호러는 아니었습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하나. 호러 중에서도 불쾌한 호러가 있죠.
꼭 고어가 많고 고문포르노 장르라고 해서 불쾌한 건 아니죠. 전 호스텔1,2도 좋아하니까.
근데 영화를 보는 내내 캐릭터도 연출도 은근히 신경을 긁는 부류의 호러가 있습니다.
묘하게 짜증나고 거부감드는 인물들, 영화 내내 여자애들을 어떻게든 해보려는 양아치같은 상황들,
쾌감이나 깜짝놀람이 아닌 순수한 불쾌감을 유발하기 위한 고어 효과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슬래셔나 고문포르노나 이런 영화들이나 뭐가 다르냐고 하겠지만,
저한텐 타르코프스키와 강우석만큼이나 거리가 먼 영화들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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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만들긴 잘만들었습니다.
가끔씩 지루해지기는 하지만, 옴니버스 영화이다보니 전체적으로는 다양한 재미가 있고,
각각의 에피소드들도 대단히 혁신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짜증날정도로 지루한 에피소드도 없습니다.
저는 에피소드가 뒤로갈수록 좋았는데,
극장에서 나가면서 보니 다른 관객들 중엔 첫번째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한 분들도 많은 듯.
"여자 가슴을 보고 싶어서 환장하는 양아치같은 남자애" 캐릭터가 조금만 덜 나왔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호감가는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농담이 아니라 에피소드당 그런 놈이 한 명씩은 나왔던 거 같습니다. -_-;)
감정이입할만한 극중 인물이 하나라도 있어야 좀 몰입을 해서 볼텐데 말이죠.
감정이입할 놈이 단 하나도 없는 영화를 보면서
이정도로 안지루하게 본 걸 보면 그만큼 괜찮게 만든 거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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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정말 vhs느낌 화질에 지직거리는 화면 효과,
사실 이런 류의 장르물에서는 흔하고도 지긋지긋한 효과인데,
요새 기술이 좋아져서 그런지 연출을 잘해서 그런지
그런 지글거리는 화면이 "진짜 복사 여러번 뜬 vhs를 보는 것"처럼 효과적입니다.
2000년대 영화에 뜬금없이 왜 vhs인가 했는데,
보다보면 좀 후진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설정도 있고,
화질이 나쁠 수 밖에 없는 소형 몰카도 등장하고,
중반엔 HD급으로 보이는 화면 좋은 카메라도 나옵니다.
(이건 좀 이상하긴 합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 찍어도 vhs로 뜨면 이런 화질이 나올 수 없을텐데.
하지만 설정을 칼같이 따지는 것 보다는, 극장에서 영화보는 관객들의 눈이 덜 피로한게 백배는 낫겠죠?)
제목도 vhs고 극중 설정도 지글지글 옛날 비디오를 틀어주는 영상이지만,
그렇다고 정말 안좋은 화면으로 봤다가는 눈이 더 아플 것 같습니다.
이런 설정의 영화일수록 쨍하고 선명한 화면으로 볼 필요가...
카탈로그에서는 디지베타 상영이라고 봤던 거 같은데,
관람하면서는 HD영상인 것 처럼 보였습니다.
디지베타는 디지베타인데 마스터링이 깔끔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HDCAM상영인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네요.
여기서부터는 자비없는 스포일러
스포일러
* 첫번째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은
구름 위로 올라간다는 것 때문인지 크로니클이 생각났습니다.
여주인공 이마의 그 상처(?)를 보면서 그 부분이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특수분장 디자인이 맘에 들더군요.
화질이 안좋은 에피소드였기 때문에 분장이 더 실감나게 느껴졌을지도요.
근데 사건을 좀 더 보여주지 않고 자꾸 도망다니고 화장실에 숨는 설정은 짜증스럽더군요.
안그래도 화면이 흔들려서 뭐가 뭔지 안보이는 판국에.
* 위에 기술적으로 맘에 드는 영화라고 했지만,
중간에 호수 방문 에피소드에서 화면이 지직거리는 효과는 별로였습니다.
엔드크레딧을 보니 이 에피소드 제목은 "17일의 화요일"이던가 그 비슷한 제목이더군요.
제목이 가장 맘에 드는 에피소드.
* 뒤에서 두번째 에피소드이던가요?
전 그 애들이 유령인가 싶어 반전이 잘 이해가지 않았는데,
엔드크레딧을 보니 "외계인"이라고 표시되더군요.
그러니까 외계인 납치 스토리의 변형인 셈이네요.
여전히 앞뒤가 잘 안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 마지막 에피소드는 특수효과가 가장 화려하던데,
뻔하긴 하지만 벽에서 손이 나오는 거 맘에 들었습니다.
근데 엔딩은 그저그랬음. 꼭 여운없이 그렇게 끝내야 하나?
그러고보니 이 영화의 에피소드들은 각기 다른 감독이 연출했는데도
하나같이 여운이 없이 "확실하게" 끝내버린다는 단점(?)이 있더군요.
* 액자가 되는 에피소드는 좀 엉성했는데,
전 아직도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가 이상한 존재였다는 건가?
그렇게 치면 첫번째 에피소드의 고양이 아가씨랑 뭐가 달라요.
보여줄라면 좀 더 제대로 보여주든가...
한명씩 사라진다는 설정도 반복만 되니까 좀 웃기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