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읽고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아가씨가 엄마 잃고 외할머니 집에 들어가 사는 내용의 중국 소설을 읽었어요. 표지도 없고, '도판도 흉하고 삽화도 야한', 흉칙한 판형의 책이었는데
저는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홍루몽이라고 오래 믿었던 것 같습니다.어떻게 알았는지 저는 모르지만, 결론적으로 홍루몽이 맞긴 했어요.
그 뒤엔 어떤 아가씨가 길에서 기린 팔찌를 보고 줍고 싶었으나 창피해 줍지 못하자 손수건을 위에 떨어트려 주웠는데 물건의 원주인인 공자가 나타나
당황하는 내용, 그에 더해 그걸 가지고 다른 아가씨들이 '너 시집가고 싶나 보구나? 얼레리 꼴레리, 시집 잘 가라 나무아비타불!'하고 놀리는 장면도 있었는데
이건 홍루몽이 아닌 것도 같고...하여간 아직은 못 읽었는데 짐작가는 바 있으시면 이야기 해 주세요.
그리고 듀게에서 뽐뿌를 받아 홍루몽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루하겠지...'하고 시작한 게 벌써 절반을 훌쩍 넘겨 전 12권 중에 8권째 읽었습니다.
원래 6권짜리 읽고 있었는데 누가 저랑 동시에 읽는지, 앞권을 빌려가 버린 탓에 8권째 읽고 있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밌습니다. 다른 분들은 문화의 아름다움에 취해 계신 듯 한데, 저는 좀 속된 사람이라 그런지
뭐 그렇게 아름다운지는 모르겠고...옷이나 연회, 시 이야기가 나오면 슬렁 슬렁 넘기며 읽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시앗다툼이에요.
와, 사람들이 어디 여자가 사납네, 저기 여자가 사납네 해도 홍루몽에 나오는 여자들 사나운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네요.
제가 8권에서 제일 절품이라고 꼽고 있는 악다구니를 들어 보면
'그러자 희봉은 이번에는 가용에게 욕을 퍼부었다.
"너 이 벼락 맞아 죽을 녀석아! 네놈은 저승에 가서도 능지처참을 당할 줄 알아라. 양심도 없는 씨알머리 같으니!
네놈은 천지를 모르고 매일같이 이년하고 붙었다가 저년하고 어울렸다 하면서 한다는 짓이 모두 천리에 어그러지고 법에 어그러지는
집안 망칠 짓뿐이란 말이다. 네놈이 이런 망종인줄 안다면 네 어미가 죽어 귀신이 된다 하더라도 풀 밑에서 네놈을 용서치 않을 거란 말이다,
그래 가지고도 무슨 낮짝으로 나를 말리려 드는 거냐!"
희봉은 손을 들어 가용을 후려갈겼다....(중략)
희봉은 우씨의 가슴팍에 푹 고꾸라지며 동네방네가 다 들으라고 큰소리로 울면서 악을 썼다.
이런 게 막 오십장에 한번씩 나오는 거 같은데, 한 두권 읽고 나면 눈이 멍하고 골이 띵해지고 뒷골이 꿉꿉한게 일일 권장 패악질 정량을 넘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여자들이 욕을 어찌나 본때 있게 하는지 이년 저년 해 가면서 대거리하는 재주가 아주 절품이네요. 저거 좀 있다 한 두장 넘어가니까 또 이번에는
막내 첩이 나와서 둘째 첩을 보고 욕을 욕을 해 가면서 군기를 잡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건 아주 위엣것보다 더함.
원작이 그런 건지 번역이 좋은 건지는 몰라도 '희봉이 뺨을 치다' 이 부분이 '희봉은 손을 들어 가용을 때렸다' '가용의 뺨을 때렸다'
'가용을 갈겼다'도 아니고 '가용을 후려갈겼다'인것부터가 범상치 않음.
하여간 금릉십이차의 미모와 패악을 감상하며 재미지게 읽고 있습니다.
(한가지 모르겠는 것은 진가경은 그렇게 빨리 죽는데 왜 금릉십이차인지 모르겠어요. 보옥이랑 엮인 일도 없더만. 제가 읽은 판본에는
시아버지와 어쩌구 저쩐 부분도 안 나왔구요.)
보채-그냥 재미가 없습니다. 남들이 차다 했는데 찬 줄도 모르겠고 똑똑하다 했는데 그런줄도 모르겠고 그냥 있으나 마나 없으나 마나.
대옥-제가 원래 병약히로인 싫어합니다. 톡 쏘는 맛이 있는 새침떼기는 좋아하는데, 이건 뭐 쇠도 씹어먹을 나이의 중학생들이
찬 바람만 좀 쏘이면 쪽 가서 앓아눕는 바람에, 이제 등장하기만 하면 '아니, 저건 왜 방에 조용히 있지 않고 나와서 돌아다녀 감기 걸리게'싶어
무서울 지경입니다. 그리고 너무 많이 울어요.. 너무 피곤해... 진짜 힘들어...
보옥이랑 '흥! 너랑 다시는 안 봐!'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자꾸 내 속 썩이면 난 콱 죽어버릴거야!' '죽으면 나는 출가해버릴거야!'
'출가만 해 봐라 다시는 안 볼 거야!''다시는 안 보다니 넌 그런 소리를 그렇게 함부로 하냐!' '니가 말을 먼저 함부로 했잖아!'
'아오! 넌 왜 그렇게 사람 속을 썩이냐!' 이러면서 싸우고 있는 게 현대의 커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웃음도 나긴 하는데요,
나올 때마다 이러고 있으니 머리도 아프고 신통치도 않아서 원. 그 외에 성격은 그냥 뭐.
습인-제일 인간이 됐음. 습인 날 가져요...
왕희봉-사실 제일 마음에 듭니다. 사람이 너무 독해서 정떨어지는 부분은 있습니다만, 왕희봉이 있어야 뭔가 일이 굴러가서요.
사실 뭐 제가 당시송사 읽고 싶으면 도서관 가서 고문진보 골라 읽지요, 굳이 홍루몽같은 소설 읽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뭔가 쫌 스펙타큘라 한 뭐시기 읽고 싶어서 읽는 거 아니겠습니까. 가련도 참 안 될 종자에요. 이렇게 무서운 마누라를 모셨으면
나 죽었소 하고 쭉 드러누워서 그저 처분대로 해 줍소사 사는 게 나은 길일텐데, 이미 망한 인생에 뭘 고칠 부분이 있다고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굳이 굴려서 자꾸 자기 인생을 자기 손으로 꼬고 있는지 모르겠음.
평아-별 특기할 만한 건 모르겠어요. 왕희봉보다 좀 더 착하긴 한 것 같은데 그만큼 임팩트도 적어서.
원,영,탐,석춘.
처음에 인물소개가 나올때 '그 집은 여자아이의 이름이라도 홍이니 옥이니 춘 같은 글자를 쓰지 않았는데, 어찌 그리 속되어졌나요?
하는 부분을 보고 끄덕끄덕. 여자 이름이라고 해서 곱게만 짓는 이름은 재미 없죠. 여튼간에 이 자매들은 잘 구분도 안 가고,
탐춘이 좀 튀게 나오는데 영리해서 호감입니다. 석춘이 잡힌 자기 시녀를 보고 '때리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는데 나가서 때려요,
난 울고 매맞는 소리는 못 견뎌'하는 거 보고 참 잔인하다 싶었어요. 마냥 애기같기도 하고.
말고도 등장인물들이 사춘기를 아슬하슬하게 들어갈락 말락 하고 있는 13,14,15세 가량이라는 것을 섬세하게 잘 잡아낸 것 같아요.
처음에는 스스럼없이 같이 뛰돌고, 씻고, 잠들고, 울고 불고 싸우다가 점점 커가며 내외를 하게 되는 것,
사람들이 '이제 2,3년만 있으면 여자 애들은 곧 시집갈거야'하고 염불처럼 외고 있는 것...
첩이나 시녀가 주인에게 대들기도 하고 말대꾸도 하고 충고를 하는 것을 보고 꽤 놀랐고,(인간적으로 상하관계가 있다기보다 같이 노는 친구인 것 처럼)
시녀들의 계급차가 아주 큰 것처럼 묘사되는 것도 놀랍구요. 또 여기서는 첩이 낳은 아들딸들은 주인집 아이들인데 첩들은 자신의
아이들보다 낮은 신분인 양 묘사되는 것도 신선해요. 중국은 그랬나 보지요.
여튼 지금은 설반이 금계를 맞아들여 본때를 보고 있는 장면을 끝으로 8권이 끝났습니다. 곧 다음 권이 넘어가는데
아주 임자를 만났다는 느낌이네요. 금계가 방탕한 설반을 어떻게 쥐잡듯이 잡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