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걍 바낭] 막걸리와 죽은 자들의 세상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9층 지옥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곳이라는 얼음지옥 코퀴토스, 그곳에 얼어붙어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목 아래까지 얼어붙어있는데 이상하게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뒤에 달라붙어 귀를 물어뜯고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매 한 가지인데, 뒤의 사람은 앞의 사람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피 묻은 입을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물어뜯는 자는 피사의 귀족이었던 우골리노, 물어뜯기는 자는 대주교 루지에리. 루지에리는 우골리노를 배신하고 그와 그 자식, 손자들을 탑 안에 가두어 굶겨죽입니다. 우골리노는 함께 굶어죽어가는 자식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을 들었고, 그 자신도 더욱 비참한 상태에서 죽었지요. 그 원한으로 이 추운 지옥에서조차 얼음의 눈물을 흘리며 루지에리를 물어뜯고 있었습...
니다.

어린 시절 읽었을 때 우골리노의 처절한 외침이 너무 절절해서 지금까지도 기억이 나고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우골리노나 루지에리나 다 나쁜 놈이긴 합니다만. 그런데도 훨씬 더 극악한 짓을 저지르는 놈은 있구나, 라고 생각했네요.

엊그제 중앙일보에서 어떤 분이 한동안 잊히지 않을 명언을 남기셨네요.

"박정희는 천상에서 인혁당 8인에게 사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조국을 얘기하고 있을 것이다."

우선 인혁당 사건을 잘못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상황은 물론이요, 천상(天上)이란 표현에서 쓰는 사람의 고충이 여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천국이라고 하자니 그럼 인혁당 사람들도 천국에 갔냐는 말이 나올 것 같고, 극락도 마찬가지고. 하늘나라라고 하자니 너무 유아틱해서 품격에 좀 안 맞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을지.
뭐, 천국이든 지옥이든 사후세계가 정말로 있다면 죽은 사람들끼리 만나서 막걸리를 먹을 수야 있겠지요. 하지만 밥 먹다가 고기 한 점 먼저 스삭한 원한도 수십년을 가는 법인데, 니가 날 죽였지? 하는 원한으로 엄청 화기애애해지겠습니다. 그러니 막걸리를 마시되, 제대로 먹기 보단 한 쪽이 한 쪽에게 코로 먹이겠지요. 반쯤 얼린 육회를 수백년 간 먹고 있는 우골리노를 생각하면 그 정돈 양반이겠지요.

이런 인혁당 사건을 최대한 축소하고 싶은 그쪽 관계자분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인혁당 사건으로 돌아간 것은 8명뿐이 아닙니다. 인혁당으로 징역형 살며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돌아가신 분들도 여럿 있고, 82년 형집행 정지로 감옥 나온 뒤로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시들시들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고문 휴우증이라는 건 몸의 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도 망가뜨립니다. 김근태 씨만 해도 죽는 날까지 치과치료도 못 받았잖아요. 그 가족들이 겪은 고통은요? 가장이 없어지니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빠듯한데다가,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괴로움을 못 이겨 자살시도한 분도 있고 고통을 받는 가족을 지켜보며 괴로워해야 했던 또다른 가족도 있습니다.

이해는 해요.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는 여당 쪽에서는 최대한 사건의 규모를 줄이고 싶겠지요. 인혁당 사건은 정말 40년 전의 케케묵은 일이고,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아무 상관없이 프랑스 유학을 할 즈음이고, 죽은 사람의 일은 죽은 사람들의 일 뿐이고, 그러니 지금 현안이 아니라 역사에 떠맡기고 싶겠지요.
솔직히요, 역사를 공부한 저 자신도 인혁당 사건이 이제 와서 조명을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주 오래된, 죽어가는 일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마각을 드러내게 될 줄 몰랐어요. 판결이 두 개라니, 사과로 받아들이라니. 저보다 나이 많은 분께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참 어린애 같습니다. 근데 아시잖아요. 아무리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움직이지 않는 현실이란 게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 부정할 수록 현실은 냉엄해진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인혁당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란 걸. 납치되어서 바다에 던져질 뻔 한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있었고, 한 때 박정희의 오른팔로 활동하다가 사이 틀어지자 전 세계에 비리를 알렸다가 행방불명되어 닭모이가 되었다는 김형욱도 있고, 장준하 씨는 두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 보다도 얼마나 더 많은 힘없는 사람들이 박정희 정권 아래 죽고 다치고 행방불명 되어왔는데요. 막걸리 먹여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맍은지 다 세기도 어렵습니다.

세상 일을 왜 다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 지 아세요. 바로 이런 일이 생기기 때문이랍니다. 막무가내로, 과정이야 어떻든, 밀고 나가면 일단 결과가 나오고 목표를 달성한 거 같지만... 억지로 밟아나가면 나중에 어떻게든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이제 와 인혁당 사건이 시끄러운 건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잘못이 아닙니다. 40년 전, 민주주의를 어지럽히고 권력을 쥐고 흔들었으며 사람들을 죽인 박정희의 잘못이 이제야 이런 식으로 불거지는 거지요.

박근혜 대통령 대표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1977년 신년맞이 인터뷰를 하던 박근혜씨의 말이 기억에 선명해요. 우리 아버지는 나라의 곳곳을 아신다고, 어느 마을에 나무 몇 그루가 있고 그 마을에서 잘 하는 게 뭔지 훤히 아신다고. 마치 슈퍼맨 아빠를 자랑하는 옆집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아버지의 잘못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심정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분명 독재자였고 권력을 남용했던 나쁜 대통령이었지요. 이제 이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되려면 그 전철을 밟아선 안 되는 게 당연한 거고요.

대법원 판결이 두 개라던가, 사과로 받아들여 달라, 라는 말이 어이없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아마 제대로 한다면 죽은 아버지가 딸에게 사과해야 할 거여요. 아버지의 죄가 자식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 후보님도 나이 예순이 다 되셨군요. 살아있는 사람들은 늙어가고 신념을 꺾고 말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죽은 사람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아요. 우골리노와 루지에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 공감 공감 또 공감합니다.
    • 막걸리 이야기 영 거슬리네요 저런식으로 말을 하는게 아니죠.
      정말 그러고보니 박근혜 예순살이군요 단순한데다 노인의 단순함이 더해질 나이이기도 하고.
      난 지옥에 갈게 99%인데 누가 뒤에서 귀 물어뜯으면 어쩌지, 세상에서 운이 좋았으니 로또 당첨같이 천국 갈수도 있긴 하지만.
      .
    • 기왕이면 시바스리갈로 주지.... 지는 양주마시면서 줄때는 막걸리라니..
    • 그녀가 나를 사랑해... 막걸리냐..?! 좀 걸리네요;
    • 글이 좋네요. 공감 합니다.

      중앙일보 사설은 구구절절 병맛이라 말꺼내기도 피곤한데 이렇게 조곤조곤 차분히 풀어낸 글을 보면...좋아요. 존경스러워요.
    • 아 LH님 존경합니다.
    • 감사히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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