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에서 보내는 머나먼 추석

명절을 원래 싫어해서 결혼 전에도 차례를 지낸 후엔 엄마를 졸라 명절을 잊기에 제일 좋은 커피 가게에 가서
차 한 잔 마시고 오는 게 버릇이었어요. 추석 전날 전 부치고 기름냄새 폴폴 풍기며 뛰쳐 나가서 친구랑 영화 보고 오기도 했구요
엄마한테 욕은 좀 먹었지만 참 좋은 명절 디톡스였어요


결혼을 하고 나선 다들 그렇듯이 어른들한테 인사도 많이 드려야 되고 간만에 착한 척도 제대로 해야 하는

명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구요 


그런 게 아니더라도 명절은 평소에 잊고 지내려고 애쓰던 것들이 택도 없다는 듯

주변을 압박하며 그 경계를 밀고 들어오는 게 진심으로 무겁고 답답했어요

안 만나던 사람도 만나야 하고 마음에 없는 말도 해야 하고 또 들어야 하고요.

그래서 처음 미국에 와서 남의 명절을 축하하고 놀 땐 생활감이 하나도 안 드는 명절이라

그냥 좋은 놀이 핑계 같고 좋았지요

쇼핑도 할 수 있고 기름진 음식도 많이 먹구요 


그런데 이짓을 3년째 올해 타지에서 축하하는 추석은 아주 조금 쓸쓸하네요

그렇게 탈출하고 싶었던 것들의 중앙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건 아닌데요

그냥 그렇게 나를 옥죄던 것들이 이렇게 멀어졌는데 그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니고

아주 조금 버려진 느낌 -_- (듀게도 텅 빈 것 같고 흑)


시댁에 갔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느끼던 해방감이랑 창밖 풍경 같은 게

그리운 것도 같고 그래욧 시댁에 갔다 친정에 놀러 가서 엄마랑 오빠랑 동생이랑 티비도 보고 과일도 먹고

친구들을 만나 명절 후일담도 하고 그랬던 별거 아닌 기억도 막 소중하게 느껴지구요

착한 척 예쁜 척하던 일박이일에서 해방되어 내 멋대로 드러눕고 말도 못되게 하고

동생이랑 겔겔대며 만끽하던 자유란 늘 주어지던 자유보다 훨씬 훨씬 달콤했어요


명절은 그냥 없었음 좋겠어요 아 마음 복잡해;

명절 연휴가 끝나고 회사에 가서 동료들을 만나면 아 드디어 일상으로 복귀했구나 싶어

덥썩 반갑기도 하고 그랬더랬죠. 


나이가 들고 또 고향을 떠나 있어서 그런지 그리움이란 감상이 점점 더 버거워요


이상 재외국민이 느끼는 추석 감상이었습니다.

다들 맛있는 거 많은, 좋은 명절 보내세요 :-D






    • 듀게도 텅 빈 것 같고 흑 222
      감사합니다. settler님께서도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D
      • 그래요 우리도 즐거운 명절 보내십시닷 ! 추석 끝나면 돌아올 듀게민들을 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ㅅ-
    • 저도 외국에 있는데 괜히 마음 복잡하니 명절은 없었다는 말에 매우 공감이 가네요... 한국 명절뿐만 아니라 외국 명절 때도 하나같이 가족들 찾아 고향으로 떠나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왜 가만히 있는 날 더 외롭게 만드나, 명절이란 것 존재 자체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 settler님도 좋은 추석 되세요 :)
      • 그쵸 명절은 여기서나 저기서나 마음에 걸려요
        시간이 가는 것도 실감이 나구요 가을 겨울은 너무 빨라요 흑
        라시도님도 따뜻한 명절 보내세요!!
    • 저도 좀 쓸쓸하네요. 라시도님 말씀처럼 우리나라 명절뿐만 아니라 제가 나와 있는 나라 명절에도 외롭고 소외감 들어요. 저는 크리스마스를 벌써 걱정하고 있..ㅜㅜ
      • 전 남의 명절은 그냥 재외동포들이랑 에헤라디야 쇼핑하고 포식하고 놀긴 했는데요 점점 더 쓸쓸해질까 걱정되요
        명절을 보내시는 분들은 또 그 고충이 있겠죠 저희는 그냥 텅 빈 자유를 만끽하기로 해요
    • 명절이란 걸 만들어 가족의 유대를 고취하는 것은 인류생존을 위한 고도의 책략;;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옆집에서 만든 맛없는 송편을 우적우적 먹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거 아녔음 한국의 가족들에게 전화 한 통 하는 것까지 까먹을 뻔 했어요. 'ㅛ' 날이 맑아 저녁에 휘영청 뜰 보름달을 기대하고 있어요. 달구경 잘 하시길~
      • 그니까 때 되면 열리는 운동회 같은 건가봐요 송편은 참 떡치고 맛이 없고 투박한데 왜 이게 명절의 떡이 되었을까요 두텁떡이나 바람떡으로 하지
        저도 이따 달구경이나 할까 봐요 좋은 추석 되세요!!
    • 비운만큼 채워지는 것도 있겠죠. 먼곳에서나마 명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그렇겠죠 다 가질 순 없는 걸 알면서도 투정이네요 좋은 말씀 감사 드려요!!!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6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0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0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7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2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4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8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9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5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4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8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7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3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6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