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송에서 변호사 선임의 일원칙은 외모다. 잘 생긴 변호사는 일단 패스할 것. 그들은 연애하느라 당신의 사건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특이하게 생겼거나 친구가 많은 사람도 패스. 얼짱 변호사 동료의 연애사에 신경쓰느라 역시나 시간이 없을 테니까. 결국 평범하다 못해 심심해 보이는 얼굴이 확률적으로 가장 안전하다. 내 앞에 앉은 남자처럼.
"그러니까 부당해고랑 급여청구 건이시네요. 해고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박진철이라는, 얼굴만큼이나 심심한 이름의 변호사는 사무적인 어조로 나에게 물었다.
"발단은 조퇴였어요."
갑작스런 친구의 연락을 받고 조퇴를 하겠다는 나에게 노처녀 강 주임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짜증을 부렸었다.
"조민희씨 어떻게 자긴 일주일에 절반은 자기 일 챙기느라 바뻐? 지난번에도 친구가 입원해서 병간호 해야 한다며 월차 썼잖아. 그게 한 달도 채 안됐어. 그런데 이번에도 친구 일이라고. 회사가 놀이터야 학교야. 친구한테 일 생기면 만사 제쳐놓고 뛰어 나가도 되는 그런 곳이냐고?"
"하지만 주임님 아시겠지만, 제 친구가 진짜 큰 일이 생겨서요......"
어떻게든 해명을 하고 설득을 해보려는 나의 시도를 그녀는 덜컥 자르고 들어왔다.
"알아 안다고. 그 놈의 큰일. 교통사고 나서 기억상실이라며 그 친구. 그래서 애인 얼굴도 기억 못하고 자기는 또 그 애인이 기억 찾아주겠다고 일 벌이는 거 도와준다고 또 휴가 쓰고. 나도 다 들어서 알아. 그런데 그걸 왜 자기가 챙기냐고? 그리고 왜 우리 일이 그 친구 때문에 차질이 생겨야 하느냐 이거야."
"일은 야근을 하던, 주말에 나오던 해서 차질 없게......"
"됐고, 이번엔 또 뭔데. 무슨 큰 일이 생겼기에 또 뛰쳐나가? 친구 애인이 재벌2세라며 그렇게 든든한 백 있는데 왜 자기가 오지랍이야."
"그게. 그 애인 때문에 일이 생겨서."
"뭔데, 애인이 알고보니 배다른 남매라도 된데?"
"예"
"뭐라고?"
"그러니까... 알고 보니 이복남매라고."
강 주임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바락 고함을 질렀다.
"민희씨 지금 장난해?"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변호사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쉰다.
"그러니까 친구분이 예쁘신가 봐요. 캔디 스타일?"
"그렇죠."
"본인하고는 어릴적부터 쭈욱 절친이셨고?"
"예"
"저기요,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조심스럽긴 한데요. 그 친구분하고는 그만 거리를 두시는 쪽이 좋아요. 그런 케이스 많이 봤어요. 무슨 큰 일이 터져도 결국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사니까 조민희씨도 그만 정리하고 좀더 자신을 돌아보시는 게..."
"그거에요"
"뭐가요?"
"그거라고요. 그거 때문에 강 주임하고 대판 싸우고 해고까지 당했어요. 회사에선 근무태만이라고 하는데 변호사님도 아시잖아요. 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자기시간이 없다는 거. 항상 쫓아다니며 친구 뒤치락거리하고 여기저기서 정보 얻어다가 입방정 떨면서 옮겨야하고. 가끔씩은 바보같은 짓 해서 친구 곤란하게 만들기도 해야하고. 말씀처럼 친구한테 묶여있는 인생이죠. 하지만 전 그게 행복하다고요. 회사가 절 해고하는 것도, 지금 변호사님이 충고하시는 것도 저의 행복권이나 존재이유를 침해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조민희씨 스스로도 자신이 '조역 신드롬'에 걸렸다고 인정하시는 거네요?"
변호사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안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쓴다. 순간 남자의 인상이 확 바뀐다. 평범하기만 했던 얼굴이 지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훈남으로 변한다. 그러고보니 은근하니 의상에도 신경을 쓴 표가난다. 나도 모르게 사무실을 둘러본다. 여기저기 서류들과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로 어수선하지만 그 외엔 지나치게 깔끔하다. 마치 꾸며놓은 것처럼.
쳇, 잘못 골랐다. 이 남자도 주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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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클리셰와 공식들로 가득찬 한류드라마/일일드라마의 세계에서 주인공 친구, 동료라는 조역으로 살아가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써본 스케치입니다.
일반적인 악역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는 몇 개 본거 같은데 이런 설정의 작품은 있을까요? 그러니까 조역에나 어울릴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기존의 주인공 캐릭터들도 함께 공존하는데 분량은 조역수준인 세계관 같은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