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님 쓰신 글을 받아서 제임스 본드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듀나님께서 모처럼 제 글을 읽으시고 올리셨는데 학교에서 일하고 오니까 그새 페이지가 한참 뒤로 밀려나버렸습니다. ㅜㅜ

 

그래서 새로 글 올릴께요. 

 

듀나님 쓰신 글을 읽으니 본드를 처음 접하게 된 배경이 저하고 미묘하게 다른 부분도 있고 겹치는 부분도 있는데 아마 숀 코너리 시절 영화를 보고 그 다음에 소설로 넘어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겠죠. 

 

그런데 숀 코너리가 소설의 본드와 너무 안맞아서 좀 이상했던 것과 개인적으로도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듀나님과 제가 비슷하네요.   전 워낙 운동 싫어하고... 60년대 한국판 오타쿠 너드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지라 이다음에 자라면 숀 코너리처럼 되고 싶어! 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일이 없거든요.  숀 코너리가 하는 것처럼 "남자 얘기니까 빠져라" 어쩌구 그러면서 여자의 엉덩이를 철썩 때리고 방에서 쪼까내는 따위의 행동을 내 주위의 (아버지를 포함한)  남자들이 내 주위의 (어머니를 포함한) 여자들에 대해서 한 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 ^  숀 코너리는 그래서 지금도 무슨... 시드니 루멧 작품이나 그런데서 정말 인간적으로 결함이 많은 그런 역할로 나올 때가 더 신용이 됩니다.  [언터처블] 의 아일랜드 경관 역 같은 건 저한테는 최악이었죠.  그 영화속 세계에 국한해서 보면 알 카폰 밑에 취직하고 싶어진다는 ;;;

 

오히려 로저 무어의 느끼한 듯 하면서 맨탕한 (바닐라적인?) '마초성'  이 훨씬 친근했죠. 

 

본드 걸에 대한 말씀도 저도 거의 다 동의합니다.  "본드 걸" 이라는 표현 자체가 영화에서 만들어낸 거죠.   "코 비뚤이 비너스" 표현 기억납니다. 

 

플레밍 소설에 대해서 이왕 얘기가 나온김에 한마디 하자면,  한국 번역/번안판에서는 아마도 "순화" 되었겠지만  영어로 읽으니까 이사람의 지독한 인종주의적 요소가 눈에 띄는데, 이게 읽으면서 불편한 게 아니라 좀 웃깁니다. ^ ^  시대를 너무 타서 그런지, 아니면 플레밍 자신이  그렇게 써놓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데서는 멀쩡하게 정밀한 캐릭터 묘사와 박력있는 전개 뭐 그런 걸 잘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 자마이카에서는 장래 우리 영국인들의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는 종족이 존재하지... 바로 흑인 (니그로) 와 중국인 (차이나맨: "차이니즈" 가 아니고) 의 혼혈 '치그로' 들이"  (닥터 노) 라는 둥,  "짐승과 별 다를 바 없는 한국인이라는 종족" 이라는 둥 (골드핑거) , 편집증적인 인종주의 언설을 전개하는 걸 읽으면 "뭥미?!" 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 수 없죠.   [너는 두번밖에 못산다] ([007은 두번 산다] 의 원작) 까지 가면 완전히 빵 터지는 오리엔탈리즘의 향연입니다만, 일본사람들이 읽으면 쪽팔려서 숨이 꼴깍 넘어갈것 같은 인종주의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엄청 몰입도가 강한 소설이죠.  막판까지 가면 거의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에요 그리고 그 엔딩은 물론 듀나님 말씀하시듯이 영화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더이상 얘기하면 스포일러. 

 

게이-레스비언에 대한 태도까지 가면 더 복잡해지니까 그 얘기는 또 다음 기회에.

 

--" 전 아직도 끝에 가서 본드와 섹스하지 않는 푸시 갈로아를 보고 싶습니다. 지금 만들면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까? 전 그게 본드 영화 규칙을 그렇게 깨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아여 그럼요. 이제는 다 가능하게 되었죠 리부팅이 예술적인 측면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이라는 결론이 나왔으니.  이제 로저 디킨스나 주디 덴치나 하비에 바디엠이 오스카후보에 오르고 그러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다시 살리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 거위의 DNA 복제에도 성공한게 되는거죠.

 

autechre 님께서 소설중에 뭐가 볼만하냐고 하셨는데,  플레밍 소설은 마치 일본 미스테리 작가 소설들처럼 지겨울 정도로 정보가 넘쳐나는 데다가, 이상한 이름 짓기 같은 말장난에 강박적으로 빠져들어가는 취향도 있고, 그래서 이게 다 뭔짓이여 하고 읽다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파워풀하게 감각적인 (소위 말하는 마치 내가 그 한가운데 있어서 고문을 당하거나 총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묘사 이런 것들이 나오고 하여간 오만가지 요소들이 문학적인 매끈함이 없이 마구 섞여 있어요.  그래서 이게 좋습니다 라고 선뜻 추천하기가 그래요.    제가 영어로 읽은 소설만 놓고 얘기해도 딱히 이게 제일 좋습니다 라고 추천하긴 좀 그렇군요.  [너는 두번밖에 못산다] 처럼 이게 다 뭔 소리냐 라고 쓴웃음을 웃으면서도 어느새 밤을 새우면서 독파하게 되는, 그런 게 플레밍 소설의 힘이라면 힘이죠. 

 

 [여왕폐하의 비밀첩보국에], [러시아에서 사랑과 함께], [닥터 노오], [리브 앤 렛 다이 (이건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나요?  영어로도 사실상 의미불명인 제목인데)], [카지노 로얄] 등이 개중 제일 낫지 않을까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와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원제는 아마 [다이아몬드 도둑들]?)] 는 솔직히 얘기하면 후졌습니다.  [문레이커] 와 [선더볼] 은 흠... 뭔가 거창한 얘기를 하는 깐에는 재미가 없는 데 물론 세부 묘사에는 좋은 점이 있고요.


플레밍 원작이 아닌 본드 소설중에서는 듀나님께서 언급하셔서 한국번역판이 있는 줄 처음 알았는데 [손대령 (Colonel Sun)] 이 제일 낫지 않을까요. 재미있는것은 이건 완전히 정통적인 냉전 소설인데, 그 악당이 마치 [스카이폴] 의 실봐처럼 군다는 거... 괴이한 악당입니다 그래서 아주 강하게 인상에 남죠.  이 손대령에 비하면 닥터 노오는 친절한 대머리 아저씨.  ^ ^ 

 

 닥터노에서 무슨 벌러지냐 갑각류냐 하는 이슈는,


김전일님 말씀대로 게가 나오는 것은 닥터 노오가 허니 라이더를 발가벗겨 묶어놓고 게때한테 산채로 먹이겠다고 해서 제임스 본드가 윽 이 죽일놈 ;;; 하고 그러는데 알고 보니까 라이더는 몸에 상처가 없으면 게들은 건드리지 않는데 저 박사님이 뭘 아는척하고 나는 덕택에 탈출했사와요 깔깔깔 이렇게 끝나는 시퀜스인 게 맞다고 생각하구요.  전갈은 허니 라이더가 본드에게 자기를 어렸을 때 성폭행했던 선원인가를 죽이는 데 써먹었다고 고백하는데서 나올걸요?  그 얘기를 듣고 제임스 본드가 오싹 ;;; 하는 장면.


독거미는 영화판에서 나오고 제가 기억하기로 소설에서 제임스 본드에게 풀리는 곤충은 지네 (centipede) 인걸로 기억해요.  지네가 본드의 사타구니로 기어들어가자 본드가 으아악~ 하는 상태에서 "거기가 좋아서 거기서 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라는 문장이 들어가는데 그게 너무나 웃겨서 데굴데굴 굴렀던 기억이 나는데 이것도 제 상상일까요?  


그래서 앞으로 대니얼 크레이그판 본드 시리즈가 어떻게 갈것인가.


제가 꿈꾸는 판타지를 말하자면...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 라는 제목이 달린 크레이그판 본드영화를 보는 게 소원이죠.  트레이시/테레사와 블로펠드가 나오는.   물론 그냥 리메이크는 안됩니다.  업데이트를 해야죠.  


더 슬프고 더 절실하게...  머니페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했잖아요.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요?" 라고 만류하고... 그러나 본드는 퀭하니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있잖아. 나는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잠을 제대로 자본 일이 없었어.  모든 날이 깨있는 날이었고 모든 순간이 깨있는 순간이었지.  트레이시를 만난 다음부터 나는 처음으로... 잠을 잤어. 그리고는 꿈도 꾸게 되었어.  같이... 아이를 낳아 기르고...  트레이시를 꼭 닮은 아이를 데리고, 해변가에 앉아서... 물속에 들어가고... 햇빛에 트레이시의 머리칼이 빛나고... 그런 꿈...그런데... 그 꿈을 빼앗아 갔어."  머니페니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내 목숨이 그렇게 귀한가?  영국이 귀한가?  옳고 그름이 귀한가?  아무것도 귀하지 않아. 그 잃어버린 꿈이 귀하지.  그것을 빼앗아 간... 존재를 이 세상에서 말살시키지 않으면... 안돼."  


으으으  신파다. ^ ^ 아무튼 내 포인트는 제대로된 복수극을 보자는 거죠.   제임스 본드판 복수 3부작. 


정말 피터지는 복수.  정말 슬픈 사랑.  


구도는 이미 이언 플레밍 소설에 다 정해져 있어요.  어느 정도 원작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남한테 더빙을 당할 정도로 연기를 못했던 조지 레젠비가 나오는 [여왕폐하의 007] 이 저 융숭한 대접을 받는데 그 원작이 지닌 에너지를 다 빼먹는 영화판을 만들어보세요.  얼마나 대단할지. 


어차피 이렇게 50년을 버티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한 일이니, 저도 야무지게 꿈꾸면 실현되리라고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 안 그래도 지네인가 했는데 그랬군요. 거기가 좋아서 거기서 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거의 정확한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임스의 1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인가...뭔 놈의 어린이 책이 삽화도 좀 야하고.../ 여자가 전갈(?)로 남자를 죽인건 성폭행보다 코를 그렇게 만들어서가 아닌가요 아마 맞을겁니다.
      -> 문제의 그 아동용 닥터 노 말고, 요즘 웅진에서 나오는 거 말고 7-890년대 007원작 책들이 한국에 번역된게 있으면 어디 이미지 사진이라도 보고 싶군요. 난 왜 한번도 광고조차 본 일이 없는 걸까요. 기억이 나는 건 플레밍이 아니라 다른 작가가 대신 집필한 007소설 -80년대 신문 광고 나왔던- 그거 하나 뿐이군요.
    • 근데 전 스카이폴 도입부를 두 번 살다에서 그냥 가져왔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많이 다르지만 본드의 꼬라지부터가...
    • 영화 속 본드들은 여자관계에서 맺고 끊는 게 분명한데, 소설 속 본드는 가면서 여자들을 질질 흘리고 다니죠.
    • 김전일/ 예 그렇군요 성폭행이라는 것은 아마 제가 덮어씌운 기억이겠죠. 어린이용 소설이었을 테니...

      DJUNA/ 본드의 꼬라지는 그렇죠. ^ ^ 아무튼 블로펠드 3부작은 리메이크 해야돼요. 본드를 그 고생을 시켜놓고 아까와서 어디... 그런데 그러고보니 [스카이폴] 에서도 전갈이...?
    • 전갈은 다이 어너더 데이에서도(?)
    • 푸하하 북한산 전갈 ^ ^*
    • 대니얼 크레이그는 두 편만 찍고 싶다고 했고, 퀀텀에서 뿌린 떡밥이 있으니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다음 본드부터는 그게 가능할 수도.
    • 몇편 찍는다 그런 연기자들이 하는 말들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제 판타지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 어려울 거라는 거는 동의합니다만, 오리지널 스토리로 가자면 또 [퀀텀] 같은 방정식에 맞는 본드영화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그건 좀 바라는 바가 아니구요. 리메이크라는 컨셉 자체를 무척 싫어했는데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그쪽이 더 기대되네요.

      [손대령] 의 영화판 같은 굉장히 구식이고 정통적인 스파이영화로 가는 옵션도 있겠죠. 한때는 아예 60년대로 돌아가는 '사극' 으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수많은 의견들이 이미 제시되었겠죠. 순전히 팬덤의 정서적 공감도를 측정해서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테고.

      하여간에 만들어만 주면 볼겁니다. ^ ^
    • 추천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br />전에 카지노로얄을 조금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 애초 기대치가 낮긴 했지만 ) 놀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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