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게임과 관련된 영화들
어제 감기몸살로 하루 병가를 냈습니다. 오전 내내 이불 뒤집어쓴 채 끙끙대다가 정오 무렵 간신히 오들오들 떨며 병원 다녀오고 밥먹고 다시 퍼져 잤더니 오후엔 회복.
...그리고 갑자기 크로넨버그 감독영화가 보고 싶어져서 몰아봤어요.
1. 네이키드 런치(Naked Lunch, 1991)
'벌레(타자기)-마약-살인'의 연속입니다. 보고 나서도 도저히 내용이 이해가 안 되어 구글링했더니 원작 자체가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이라 난해하다더군요...=_= 시놉시스라고 부를 수 없을만큼 흐름은 분절되어있고, 도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 환각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시종일관 몽롱한 분위기입니다. 여기에 크로넨버그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취향마저 버무려지면 이런 괴작이 나오는거죠.
전형적인 펄프픽션 느와르 소설의 탐정처럼 생긴 주인공과 추리소설적인 구성(다만 일반적인 추리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주인공은 그저 마약에 취한 채 여기저기 배회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적당히 지껄여댈 뿐인데 단서들이 알아서 모인다는 점;;), 그리고 크로넨버그의 벌레에 대한 악취미의 조합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2. 플라이(Fly, 1986)
50년대 공포영화의 리메이크작이라는데 당시까지만해도 그냥 B급 컬트영화 감독으로만 알려져있던 크로넨버그가 흥행감독으로까지 명성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죠. 속편도 나왔었고... 점점 파리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제프 골드브럼의 모습도 그로테스크하지만, 지나 데이비스가 거대한 유충을 낳는 악몽과 전송 실패로 '겉과 속이 뒤집힌' 원숭이의 모습이 더 끔찍했습니다. 특히 원숭이 장면은 당시 기술로 어떻게 만들었나 싶어요. 스파게티 먹으면서 이 영화 보니까 참 입맛이 살아나더군요...=_=;;
3. 비디오드롬(Videodrome, 1983) & 엑시스텐즈(ExistenZ, 1999)
번뜩이는 소재, 에로틱함, 기계와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결합 등 '이런 게 바로 크로넨버그 스타일이다!'라고 선언하는 듯한 작품이죠. 엑시스텐즈는 아무리봐도 비디오드럼의 게임버전 & 확장판이에요. 거의 적출된 장기처럼 보이는, 생체화된 기계장치를 몸안에 집어넣는다는 설정도 그렇고 이게 과연 현실인지, 지금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과연 내 자신인지 의문을 던지는 구성도 그렇고요. 특히 후반부에서 "엑시스텐즈에 죽음을!!"을 외치는 장면은 비디오드롬에서 "비디오드롬에게 죽음을! 새 육체에 영원한 생명을!"을 외치던 장면의 판박이고요.
두 작품 모두 날선 비판이 담겨있는 작품들이지만(비디오드롬은 매스미디어에, 엑시스텐즈는 가상현실에 휘둘리는 개인) 개인적으론 엑시스텐즈 쪽이 더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비디오는 일방적인 소재인데 비해 가상현실 게임은 양방향 상호작용이기때문에 좀 더 이야깃거리가 많으니까요. 주인공 역시 비디오드롬에서는 비디오드롬 신호에 따라 거의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한데 비해 엑시스텐즈에서는 훨씬 능동적이죠.(그 '능동적인' 인물이 과연 현실의 나인지, 아니 애초에 그게 '나'이긴 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지만요;;) 아무래도 그나마 최근에 만들어진 작품이다보니 때깔도 더 좋고요...~_~ 특히 엑시스텐즈에서 주드 로가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해산물 요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뒤 뼈들을 조립해 총을 만드는 부분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서도 가장 크로넨버그스러운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은 그로테스크함이나 외부의 폭력보다는 인간 내부에 잠재된 폭력성 쪽으로 관심을 선회한 크로넨버그지만(폭력의 역사에서 정말 분위기 후덜덜하더군요... 절제된 폭력을 통해 더 묵직한 느낌) 언제 한번 발전된 영상기술과 특수효과를 총동원한 미친 B급 영화 한편만 더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4. 게임을 영화화한 작품 중 괜찮은 작품은 뭐가 있을까요?
...일단 대부분이 산업폐기물급 쓰레기라 괜찮은 작품은 커녕 영화같은 영화 찾기도 쉽지 않다는데 짙은 비애를 느끼지만...T-T "그나마" 괜찮았던 작품은 뭐가 있을까요?
뭐 흥행 면에서는 '툼레이더'가 가장 나았지만 이건 순전히 안젤리나 졸리라는 캐릭터에 기댄 성향이 컸고... 저는 게임원작 영화 중에선 '사일런트 힐'이 가장 좋았다고 생각해요. 크게 흥행하진 못했지만 제작진 스스로 게임을 좋아하고 사일런트 힐이란 게임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 작품입니다. 사일런트 힐의 세계관과 특유의 호러와 슬픔이 섞인 분위기를 잘 재현해 원작 게임 팬들의 평가도 꽤 우호적이었고요. 특히 샤론을 구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는 로즈가 안내판 앞에 서서 길을 외우는 장면은 게이머들에게 감동마저 준 깨알같은 장면이었죠...^^;;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최악은 '맥스 페인'이었습니다. '스트리트 파이터'나 '모탈 컴뱃'같은 격투게임 원작영화는 애초에 게임스토리가 부실했으니 영화도 망작이었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만 '맥스 페인'은 변명의 여지가 없거든요. 게임 '맥스 페인'의 장점은 느와르적인 분위기와 단 하룻밤 사이에 추격전이 벌어지는 긴박함이었는데 영화는 거의 원작팬들을 조롱하려고 작심한 듯 반대방향으로 가죠. 영화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멕스 페인의 독자적인 시스템이었던 '불릿 타임'을 시각적으로 멋지게 구현했다는건데, 문제는 애초에 이 '불릿 타임'이란 게 홍콩 느와르에 자주 사용된 슬로우모션 총격씬을 게임에 적용했던 거라 게임 장르에선 신선한 시도였지만 이게 다시 영화로 넘어왔을 때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다는 거...=_=;; '멕스 페인'은 씬 시티나 300처럼 최대한 액션에서 가오잡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그냥 게임 스토리만 그대로 따라갔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작품이 되었을거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