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후기] 4th.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

 

(2012 세계국립극장전에 초청된 터키국립극장의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와 크레온 )

 

지지난 토요일 네번째 희곡모임이 열렸습니다. 러시아발 한파에도, 미끄러운 빙판길에도, 대선 후 멘붕에도 쉬지 않는 모임입니다. 그리스비극보다는 우리의 뼈와 관절이 더 소중하므로 궂은 날엔 쉴까 싶다가도 만나면 즐거운지라 미루질 못하네요. 이렇게 같이 책 읽고 웃고 떠들다보면 몇년 또 금방이겠죠.

 

이날 읽은 것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입니다. 1944년 독일점령하의 파리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당시로는 경이로운 500회 상연기록을 세웠다고 해요. 원작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좌절하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인데, 당대 현실에 비추어 점령군 대 시민군 또는 비시정부 대 레지스탕스의 알레고리로도 읽혀 관객 반응이 뜨거웠던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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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자어른 VS 여자아이 

 

-작가가 영리하네요. 안티고네를 레지스탕스처럼 그려서 흥행한 것도 있겠지만, 그녀의 대척점에 있는 크레온을 통해 독일에 저항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자기합리화도 제대로 시켜주는데요. 

-코러스가 등장해서 비극에서는 죽이는 자와 죽는 자의 유무죄를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건 배역의 문제일 뿐이라고 대놓고 면죄부도 발부하고요. 음.. 이게 작가의 세계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부분만 보면 보수반동인데요. 5.16이나 인혁당 사건 등은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던 얘기 떠오르네요.

-안티고네를 전면에 내세우긴 했으나 읽어보면 크레온이 더 설득력 있죠. 안티고네는 원작에서보다는 적극적이긴 한테 치기어린 소녀의 모습이고요.

-반면 크레온은 원숙한 중년남성이죠.     

-크레온을 합리적이고 책임감 있는 왕으로 설정했죠. '나는 작업을 거부하지 않는 노동자일 뿐'이라든가, '명분 따위 허황한 거고 세상이 좀 덜 모순적이 되도록 노력하는 게 전부'란 얘기 그럴듯했어요. 안티고네는 그냥 한 마리 반항적인 십대 짐승. '이해하고 싶지 않아, 싫어, 이건 아니야' 라는 얘기가 전부에요.

-크레온 입장이 충실히 설명된 것에 비해 안티고네 얘기가 부실하긴 한데, 생각해보면 안티고네는 합리화가 필요없는 입장이더라구요. 크레온이 너는 왜 오빠를 매장하려 했냐고 물을 때 안티고네가 별 말 없이 그냥 그래야 했다고만 하잖아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이미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는데 그냥 행동하면 되는 거죠.

 

 

2. 독재정권의 공주 또는 민주투사

 

-지난번에 안티고네라는 인물을 제대로 읽어주지 못한 거 같아 미안했어요. 어쩄거나 독재자한테 목숨걸고 저항한 사람인데 그런 면은 제껴놓고, 비극적인 가족사에 빠져죽은 여자로만 봐가지고. 

-장 아누이 버전에서도 그런 인상은 여전한데요.

-오히려 더한 거 같아요. 소포클레스 원작에서는 인간의 법에 맞서 신의 법을 지키기라도 했지, 여기서는 아예 그런 면도 제거되고 반항아 모습만 남았어요.

-어린애 같은 면이 두드러지긴 하죠. 그래도 크레온과의 대립은 원작보다 선명하잖아요. 

-안티고네가 독재에 맞서 싸웠다고 볼 수 있나요? 이 사람이 뭘 했나요. 

-독재자한테 고문당하다 죽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걸 한 거죠. 누군가한테는 개죽음이었겠으나 어떤 이들한테는 숭고한 죽음이었을 거에요. 3.1 운동은 별 볼일 없이 진압당한 실패한 시위였지만, 그 사건을 목격한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죠. 후에 경찰서에 붙잡혀 온 독립군들 취조해보면 열에 아홉은 3.1운동에 감화받아서 그 길로 들어섰다고 진술했대요. 유관순도 5.18 광주시민군도 철탑에 올랐던 김진숙도 현대의 안티고네들 아닌가요. 현실에서는 패배하지만 상징체계에서 승리하는.

-잠깐만요. 지금 얘기를 따라갈 수가 없어요. 저는 안티고네가 박근혜로밖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유관순이나 김진숙으로 볼 수가 있죠?

-지난번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읽을 때 제가 딱 그랬는데.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도 그렇게 보시는 거에요?

-네. 너무나 박근혠데요.

-아버지의 유훈을 받드는 공주라든가, 제왕적 최고권력자의 공주였다가 수년간 아내 역할을 대신했다든가, 부모의 비극적 죽음과 자신을 분리해 사고하지 못한다든가...

-하지만 국가권력이 간첩으로 낙인찍고 배제한 이를 묻어주러 나섰다는 점이 박근혜와 다르죠. 

-크레온이 오빠들의 파렴치한 행위들을 폭로하는데도 그걸 보려하지 않는 안티고네는 유신의 실체를 인정 않는 박근혜같지 않아요? 소름끼쳐요.

 

 

3. "나는 모든 것을 당장 원해요. 그리고 그것이 전체이기를 원해요. 그렇지 않다면 거절할래요! 나는 겸손하고 싶지 않고, 온순했다면 얻을 수 있는 작은 조각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오늘 모든 것에 대해 확신하고 싶고, 그것이 내가 어렸을 때만큼 아름답기를 원해요. 아니면 죽기를 바랍니다." 

 

-안티고네가 독재에 맞섰다기보다는 현실을 못 받아들여 자살했다는 느낌도 강해요.

-완벽한 것, 순수한 것, 이상적인 것을 되게 갈구하잖아요. 그런 건 어디서도, 누구한테서도 구할 수 없을텐데.

-좀더 살았더라면, 이런저런 경험하면서 나이들어갔더라면 그렇게 절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어려서 그런가 싶기도 해요.

-크레온이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어른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겠죠.

-자기 이상과 다르다고 다 거부해버리는 거, 크레온 말마따다 너무 쉬운 거 아닌가, 비겁한 거 아닌가 싶죠.   

-크레온이 땅에 발딛고 서서 땀흘려 일하라고, 좋은 책, 발치에서 노는 어린애, 하루 일과 후 휴식 등의 소소한 행복 찾으며 살라고 하잖아요. 말 잘 하네 싶었는데 안티고네가 어찌나 경멸하던지! 뼈다귀 핥아먹는 개냐고! 그건 몸에 주름살과 지방덩어리만 추가하는 거지 사는 게 아니라고! 어휴, 말 못되게 하는 거 좀 봐요. 

-어려, 어려서 그래.

-'어리다'는 말을 미숙함이나 무지함과 동급으로 써도 되나요?

-물리적인 나이보다는 안티고네의 오만함, 성급함, 치기, 이상주의, 용기, 정의감 등을 뭉뚱그려 한마디로 어리다 한 거죠.  

-예전에 누가 저한테 '어리다'든가 '나이 보인다'하면 지랄했거든요. 이러이러하다고 하면 되지 왜 어리다 하냐고 열라 따지고.

-논쟁 중에 나이 얘기하면 불쾌하지. 근데 나이 더 들면 어리단 얘기가 기분 별로 안 나쁘다? 

-네, 벌써 그래요. 안티고네한테 동의하기 어렵더라구요. 십대청소년 같이 군단 말 많이 들었는데 저도 어느새. 

-잘 나이든 거지, 뭐.

 

 

4. 허무

 

-죽으러 가기 전에 안티고네가 내가 왜 죽는지 모르겠다고, 두렵다고 하잖아요. 이제까지 크레온과 맹렬하게 대립하다가 갑자기 긴장을 탁 풀어버리는데요.

-소포클레스 원작에서는 결혼도 못해보고 이제 하데스의 신부가 되러 가는구나 신세한탄하던 장면인데, 여기서는 허무함을 잘 살린 것 같아요.

-인생의 허무와 부조리. 갓 스무살 된 아이의 입에서 나온 얘기라기엔 좀.. 작가 장 아누이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가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이 장면 때문에 작품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해요. 안티고네가 계속 자기확신을 강하게 가진 채 죽었다면 저는 별 감흥을 못 느꼈을 거에요. 회의하고 흔들렸기 때문에 안티고네가 훨씬 입체적인 인간으로 다가와요. 마더 테레사 사후에 발견된 그녀의 편지에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현실에 절망하는 얘기가 담겼더라는 기사를 봤을 때 느껴진 안도감과 비슷해요. 그런 편지가 있다고 하니까 테레사 수녀가 성녀 같지 않고 진짜 사람 같더라구요. 

 

  

5. 고독

 

-사형선고 받은 안티고네 옆에 무심한 경비병들을 배치시켜 포커치고 수다떨게 했죠. 그녀는 몹시 고독하다는 백마디 말 없이도 그녀가 얼마나 고독한지 잘 드러내주네요.

-그런데 경비병을 대하는 안티고네 보면 정말 재수없는 인간이에요. 경비병들도 안티고네가 죽든말든 일말의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기들의 안위만 신경쓰긴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대개 그렇죠, 뭐. 그렇다고 그렇게 벌레 대하듯, 더럽다고, 자기한테 손도 못대게 하나요. 거기다 반말까지. 완전 공주님 덩어리! 그 사람들과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치를 떨면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안티고네가 고독한 건 당연하고, 솔직히 그래도 싸요. 유모나 이스메네, 하이몬과 나누는 대화도 살펴보면, 안티고네는 자기 얘기만 늘어놓지 남들 얘기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아요. '이스메네 언니는 예쁜 머리카락 덕에 안락하게 살 수 있어 좋겠다'니, 얼마나 상대를 얕잡아 보는 거에요. 심지어 하이몬이 무슨 대꾸라도 할라치면 아무 말도 말라고, 한마디만 더 하면 난 창문에서 뛰어내려버리겠다고 하면서 자기 말만 하고 내쫓죠. 정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근데 본인은 그걸 몰라. 그냥 자기 감정에만 빠져 있죠.

-진짜 고독한 사람은 크레온 아닌가 싶어요. 주변에 다 비장미 넘치는 사람들 뿐이고 현실적인 사람은 자기 하나야!

-하이몬은 그 고독이 무섭다고 어린애처럼 소리지르다 자살하고, 안티고네도 어른되기 싫다고 자살한 거나 마찬가지고. 

 

 

6. 자살 VS 타살

 

-안티고네, 자살인가요, 타살인가요? 

-스스로 목을 매긴 했으나 국가에 의해 사형된 거라 볼 수 있죠.

-크레온은 안티고네 살리려고 엄청 애썼는데요. 네가 왜 죽냐고, 그깟 정치적 슬로건에 희생되지 말고 삶을 소중히 여기라고 얼마나 설득해요.

-"나는 네가 정치적인 이야기 속에서 죽게끔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 너는 그보다 더 가치가 있다." 건전하지만 매우 보수적인 얘기죠.

-이스메네가 '이념을 갖고 죽는 것은 남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하잖아요. 여자는 집에서 애나 키우고 설거지나 하라는 게 아니라, 여자들한텐 시민권조차 주지 않던 시절이었잖아요, 존재를 인정조차 안 해주는 공동체에 존재증명하려 애쓰지 말고 차라리 보이콧해버리라는 뜻으로 읽었어요. 남자들의 전쟁에, 그들만의 권력투쟁장에 자신을 소모하지 말고 더 가치있는 일을 생각해보라는 얘기로요.

-오빠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안티고네에게 있어 죽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사실 오빠랑 별 관계랄 것도 없었고, 오빠 묻어주는 일이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을 것 같아요. 존재증명을 위한 소재 정도?

-나라 팔아 한몫 챙기려는 매국노들, 혼란한 정국 속에 권력을 잡아보려는 평민지도자들, 부패한 기득권에 매달리는 사제들이 안티고네를 이용하는 거라는 크레온의 냉소도 일리가 있어요. 순진한 어린애의 죽음보다 더 효과적인 선동이 어딨겠어요

-자발적 순교인지 사회적 타살인지 잘 모르겠어요.

-자기의 이상이나 가치가 알고보니 그렇게 완벽하지도 가치있지도 않더라는 걸 못 받아들이고 자살한 거 같아요.

-전태일이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붙이긴 했지만 그건 타살이나 마찬가지죠. 실제 그 사람이 죽기 직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는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 누구보다 더 살고 싶었을 거라 생각해요. 박종철도, 이한열도, 그 분들은 자살한 게 아니지만, 하여간 우리가 열사라고 부르는 분들도 남영동에 끌려가거나 시위에 나가면서 자, 이제 순교해야지 하는 자의식 갖고 간 게 아니라 살려고 갔겠죠. 그런 죽음들은 명백히 타살이죠. 그런데 안티고네는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추구했던 가치가 저한테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서 그럴까요. 그렇다고 '그게 죽을 일이야?'라고 할 수도 없고... 어려워요.

-순교나 타살이라기보다는, 절망으로 죽어간 거 아닐까요. 암 같은 병에 걸려 죽듯이요. 

 

 

7. 이스메네 VS 안티고네

 

-인형처럼 예쁜 언니와 그렇지 않은 동생이라는 설정.

-힘들었겠다, 안티고네.

-프랑스 영화 [팻걸] 떠오르네요.

-자기가 예쁘지 않다는 걸 되게 의식하잖아요. 왜 그러는 걸까요.

-그런 열등감이 안티고네가 행동하는 에너지기도 한 거 같아요.

-그 모든 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언니에 맞서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행동들인가요.

-갑자기 안티고네의 인정투쟁 얘기가 되버리는데요.

-박근혜에 이어...지못미, 안티고네. 

 

 

8.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VS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버전에서 중요한 비중으로 나오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삭제되면서,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인간의 몫으로 가져왔죠. 신의 뜻과 인간 의지의 대립 대신 현실의 독재적인 권력과 그에 저항하는 소수자라는 대립구도가 강조됐어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대사도 적고 존재감도 희미하고 그 캐릭터가 잠재되어 있는데 반해, 아누이의 안티고네는 극의 전면에 등장해서 크레온과 팽팽하게 대립했죠. 캐릭터구축이 훨씬 잘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수동적이고 자학형인데 반해 아누이의 안티고네는 훨씬 자기주장이 강하고 욕망도 강해요. 물론 좀더 영리하고 노련한 캐릭터면 더 좋았겠지만.

-원작에는 없던 유모가 추가되고, 원작에서는 이스메네의 언니로 나왔던 안티고네가 여기서는 동생으로 나오면서 안티고네의 어린애 같은 면이 강조되었구요.

-하이몬과 크레온. 원작에서는 크레온이 자신이 곧 국가라는 제왕적 입장이었고 하이몬이 그건 사막에서나 통하는 거라고, 국정운영을 통치자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반해 여기서는 하이몬이 아버지의 최고권력자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안티고네를 살리라고 요구하죠. 외려 크레온이 자기 위에 있는 법을 무시하고 그럴 수는 없노라 대답하구요.

-고대그리그극은 주석 찾아보지 않으면 절반도 이해를 못 하겠는데 이건 직독직해돼서 편했어요.

-현대극이라 감수성도 낯설지 않고. 이번 작품은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근데 대사가 입에 잘 붙진 않더라구요. 장광설도 많고.

-장 아누이 것은 희곡이 아니라 소설 같죠.

 

 

9. 안티고네를 직접 읽어 보니

 

-생각과는 많이 다르네요.

-이름만 알고 있을 때는 막연히 저항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읽어보니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요.

-안티고네가 기호가 아닌 인물로 다가오니까.  

-신비감은 더 이상 없지만 그 인물을 좀 덜 오해하게 된 점은 좋아요.

-피상적인 이미지 소비에서 실체에 다가간 기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서 좋았어요.

  

 

10.  뒷풀이

 

-장기간 지속적으로 하는 모임 있으세요들?

-없어요.

-티비가 내 친구.

-예전엔 활발하게 사람들 만났는데 안 그런지 꽤 됐어요.

-아무래도 결혼, 취업 등으로 사는 모습들이 달라지니까요. 나눌 수 있는 얘기들이 점점 적어져요. 

-오래된 친구하고 술 마시며 옛날 얘기 하는 것도 한 두번이지 지루하더라구요.

-친목모임은 한계가 느껴지고, 뭔가 같이 할 게 있어야 그나마 오래 만날 수 있는 것 같아요.

-텃밭이나 염색일처럼 몸쓰는 일 같이 해도 참 좋은데 서울은 땅값이 비싸서 어디 할 데도 마땅찮고. 그거 하자고 기름 태워가며 교외로 나가기도 그렇고, 다들 멀리 살기도 하고. 그저 만만한 게 책이죠. 전공자나 훌륭한 분이 계셔서 이끌어주는 모임이면 더 좋겠지만, 뭐 이 정도도 나쁘진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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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장소였던 까페 소소의 회의실에서 그림전이 열리는 바람에 이번에는 실내에서 했습니다. 따뜻했고 10인용 나무테이블도 준비되어 있어 괜찮았는데, 음악소리와 전시회관람객들로 어수선하긴 했어요.그 와중에도 감정살려 읽었습니다. 첫회 때보다 오고가는 감정들이 더 다양해졌고 쑥스러움도 덜 탔습니다. 이날 어떤 분은 굉장히 실감나게 연기하셔서 다른 참가자들의 환호와 박수도 받았어요. 모임이 점점 떠들썩해져 갑니다.

  

다섯번째 모임은 1월 5일 까페 소소에서 12시입니다.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다음에는 정신이 좀 없더라도 뒤쪽에 있는 주석을 찾아가며 읽는 게 어떨까요. 이름 하나도 간단히 '아가멤논아~' '오딧세우스야~'라고 부르질 않고 '아트레우스의 아들아~' '라에스테르의 아들아~'하는 식이라, 그냥 본문만 봐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더라구요. 신들은 별명도 왜 그렇게 많은지. '포이보스'는 이제 좀 익숙해졌죠? 네, 아폴론 맞아요. '에뉘알리오스'가 전쟁의 신 아레스고, '타우로폴로스'는 아르테미스래요. 그리스인도 '아르고스인' '다나오스인' '아카이오이족' 등 다양하게 불리네요. 내용은 선거에서 오딧세우스한테 패배한 아이아스란 인물의 심리묘사가 대부분으로 별로 어렵지 않은데, 그리스 신들과 영웅들의 계보 파악과 지명, 인명, 숨은 고사 등이 좀 진상입니다. 미리 읽어오셔도 좋구요. 저는 처음 읽을 땐 너무 지루했는데, 두번째는 좀 재밌게 봤어요. 대선 다음날 마음 가라앉히려고 펼쳤는데 마침 내용이 맞아떨어져서 그랬는지.

그럼 다음에 봬요. 벌써 새해네요. 내년에도 우리 주욱 봅시다! 

 

    • 세미나 진행하면서 기록까지 하시려면 꽤 중노동이겠는데요. 덕분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장 아누이가 소포클레스를 어떻게 각색했는지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 장 아누이 참 재밌게 읽었어요. 브레히트, 장 콕토, 버지니아 울프 등의 안티고네 해석도 괜찮다는데 번역본을 구할 수가 없네요. 저희 모임은 세미나는 아니고요, 그냥 가벼운 브레인스토밍에 가까운데 워낙 많은 얘기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져나와서 정리하기 어렵긴 해요.(기록은 안 해요. 암기과목으로 대학 갔음)
        • 우아 암기... 굉장하군요 @o@ 무슨 기억술이라도 익히셨나요 마테오 리치 급이네요!
    • 후기만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
    • 1.김진숙, 유관순, 5.18의 광주시민들을 이야기할때는 다시 1984가 생각났습니다. 순교라는 행위의 파괴력(?)
      2.어떻게 이 모든걸 정리하신거에요? 녹음을 해두신건가요?
      3.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하려는 말은 무엇이라고 보면 될까요? 언듯 본문에서 말씀하신데로 비시정부하의 매국노(?)를 두둔하기 위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을듯 한데 말이지요.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크레온의 주장에 제가 반박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네요.
      4.그리스 비극에서 그 비극의 원인은 주인공의 성격이라던 글이 떠오릅니다. 오이디푸스는 급한 성격이었지요. 급한 성격에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나중에 사실을 알고는 눈알을 파버리기도 하구요. 읽어보니 안티고네 역시 자신의 그 성격이 문제였지 않나 싶습니다.
      • 1.1984에서 사상범들 세뇌시켜 꼭 전향진술 하게 만드는 거 말이죠. 그런 죽음들은 정권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수구세력들도 막으려 하겠죠. 용산 그렇게 강경진압한 거 아직도 이해 못 함.
        2. 녹음, 기록 다 안 하구요, 그냥 집에 와서 (제 멋대로) 재구성해요. 기억을 되살린다기보다는 이야기 맥락과 논리를 되짚어가는 방식으로.
        3. 크레온 말 되게 잘해요. 반박하기 쉽지 않아요. 악한도 아니고요, 매국노라고 싸잡아 매도하기에는 매력있고 합리적이고 성실한 인간이에요. 새누리당 찍은 우리 이웃들 상당수가 그러하듯이. 문학은 슬로건이 아니니까요, 결론이 단순하게 안 나는데 그래서 훌륭하다고 봐요.
        4. 크레온이 안티고네를 "작은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의 오만함" "어린 오이디푸스" 등으로 부르며, 그 급하고 격정적인 성격에 학을 떼요.
        • 1.우리나라 수구세력들이 조지 오웰급의 지성으로 챙길것 같지는 않고, 우리나라의 현실도 용산의 아픔을 함께할 정도로 성숙한가 싶기도 해요.
          2.마치 바둑의 복기와 같은 방식으로 후기를 쓰시는 거군요. 모임의 다른 분의 다른 버전이 함께 오면 그것 역시 나름의 재미가 있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자전거타고 모임에 나갔다가 후기쓸때는 그렇게 복기를 하기는 하네요.
          3.비시정부의 입장을 어느정도 인정하게 된다고 보면 될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전후 프랑스의 숙청은 필요했다는게 제 생각이긴 합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다음 모임의 후기도 기대해봅니다. ^^
    • 후기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글 쓰시느라 고생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글을 잘 쓰세요...
      실제 모임도 재미있지만 후기로 보는 모임도 참 재미있어요ㅋㅋ
      저는 그날의 멘붕에서 약간 회복기의 상태로 접어들어 마냥 부끄러운 중입니다
      혼자 멋대로 감정이입해서 또 안티고네를 오해한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날은 안티그네의 상태라 제대로 읽기가 힘들었어요;ㅁ;
      • 땡스! 넘 좋네요. 그리고 부끄럽긴요. 원래도 잘 읽으시지만 그날은 보여주신 감정들 참 좋았는 걸요. 안티고네에서 박근혜를 연상하는 분들 여럿 계시더라구요..
        <박근헤, 안티고네, 안티그네> -레디앙 기사 http://www.redian.org/archive/45219
        <박근혜 혹은 안티고네> -경향 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272111335&code=990100
    • 아 재밌었겠어요. 저는 혼자 보내주신 안티고네를 읽으면서 간단한 생각만 몇 개 했는데 역시 모이면 제가 못 한 생각이 나오는 게 재미있어요.
      저는 안티고네를 어린 투사로 봤어요. 뭐든 싸울 거리가 주어지면 덤벼들 준비가 되어있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고, 언제나 갈증을 느끼는 사춘기의 불안정한 영혼이요. 사춘기 때 확 불타면서 영원을 말하던 랭보의 싯구처럼요. 사춘기에는 뇌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세계와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뇌활동 자체가 극단적인 걸 추구하는 미친 상태가 되어 있다더군요. 자신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우주가 모두의 우주가 아니라는 것이 배신이고, 타인과의 공감보다는 자기 내부로 파고들어가는 시기죠. 예쁘지 않은 여자아이로 설정한 것도 신의 한 수라고 봤어요. 결핍되어 자아가 비대한 소녀가 만족한 소녀보다 자기파괴의 싸움에 뛰어들기 좋겠죠.
      사실 안티고네의 명분은 공감을 사기엔 약하고 감정적이지만, 목숨을 거는 투사의 명분이란 건 대개 그런 것 아닌가요. 합리적인 사람들은 크레온처럼 행동하며 살아가고 늙어가지 안티고네처럼 목숨을 걸지 않죠. 저는 투사란 기본적으로 드라마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봤어요. 자기 감정에 취하지 않은 채 어떻게 목숨을 걸겠어요. 주변에서 보면 민폐인데 이런 사람들이 소수 나와줘야 사회에 가끔 변혁도 일어날 수 있기에 유전자풀에서 잊을 만 하면 재생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다수의 크레온이 사회를 끌어가는 데 필요하듯, 소수의 안티고네들도 사회의 자정작용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고요. 그렇기에 생존자나 좋아진 세상의 덕을 보는 사람들은 안티고네 같은 유형에게 채무가 있고 감사해야 하지만, 그들이 경계해야 하는 대상인 것 또한 맞다고요. 그들이 이끌리고 이끄는 그 죽음을 불사한 에너지가 꼭 선이란 보장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안티고네가 죽음 앞에서 허무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고 좋았습니다. 자신은 절대적인 것을 해야만 하기에 스스로 다른 선택지들을 다 끊고 위악을 부리며 몰아세웠지만, 안티고네가 정말 자신이 목숨을 걸고 추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겠어요.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것이 비겁하게 느껴지고 자신이 정한 절대적인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치기 어린 자아실현의 추구욕구가 강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몰아세웠겠죠. 그리고 그런 것을 추구하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 깨어있고 고귀한 정신이라는 자뻑도 있었을 테고요. 참으로 실감나는 사춘기 투사의 캐리커쳐입니다.
      하지만 역시 소포클레스와 장 아누이 버전을 비교하면 저는 소포클레스 편을 들어줄래요. 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원형이라 가진 힘이 있어요. 장 아누이 버전은 역시 그 원형을 시대와 개인 입맛에 맞춰 잘 변형했다는 느낌이고, 좀 더 분명하고 가까워진 대신 해석의 여지가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있네요.

      그런데 장 아누이 버전 잘 읽히고 좋은 글이긴 한데 뭔가... '이런 프랑스 놈들!' 스러운 구석이 있지 않나요? 보봐리 부인에서 끊임없이 묘사와 장광설이 나올 때처럼요! 쓸데없이 이빨까는 짓 좀 그만해 장광설 좀 그만 좋아해 세련된 척 하는 과장은 왜 이리 많아 이 묘사덕후 놈들아!!! 싶은 게 딱 프랑스 소설 읽을 때 생기는 울컥증이랄까......

      흥분해서 너무 길게 썼네요. 하하. 이렇게 후기로라도 참여해서 좋아요. 저 이제 반깁스 풀었어요! 내년에 만나요~
      • 댓글 고맙습니다. 제가 정리 못하고 있던 부분들을 딱 짚어주셨어요. 예전에 한홍구 선생이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세 발 모두 정확히 명중시켰다는 사실을 봐야한다고 했던 얘기가 떠오르네요. 권총 쥔 손과 두 다리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는 게 뭘 의미하냐고. 안중근 위인전 보면 나무하러 가서 책보고 불쌍한 사람 보면 도와주는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은 침 좀 뱉고 힘깨나 쓰고 다니던 과격한 청년(동네깡패,란 단어가 강연에선 나왔습니다) 아니었겠냐고요. 도시락폭탄 테러한 윤봉길도 그렇고 그외 이름조차 못 남기고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투사들도요. 그런데 그렇게 삐딱하고 반항적이고 수틀리면 주먹질하던 사람들한테 우리가 빚지고 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고. 그들을 미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잘 보고 애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하셨어요.
        장 아누이가 안티고네를 성마른 십대 소녀로 그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폄하가 아니라 그녀에게 덧칠해진 숭고한 이미지를 걷어내려는 의도일 수 있겠네요. 작가가 보수적이라서 그렇게 묘사했나 싶었는데 안티고네를 순교자로 미화하거나 착한 소녀로 탈색하는 게 더 보수적일 수도 있겠어요. 누가 유관순 얘기도 좀 이렇게 써주면 좋으련만. 맨날 궂은 일 도맡아 하고 청소도 남들 몇 배로 열심히 하고 감옥에서 젖은 애기기저귀 몸에 감아 말려 줬다는 식으로 점철된 착한 동화 말구, 엄마 아빠 말 되게 안 듣고 선생하고 맞장뜨고 호르몬 러쉬로 힘들어하는, 차마 애들한테 전기 읽히면서 너도 이렇게 살아라 말하기 어려운 캐릭터로요.

        모임분들과 같이 읽으려고 소포클레스의 현대적 각색물을 찾다가 이것하고 장 콕토의 [지옥의 기계]를 읽어봤는데요, 둘 다 재밌었지만 저도 소포클레스 원작이 참 좋구나 싶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저 도서관 화재에서 운좋게 살아남았다거나 사람들의 지적허영심을 채워준다는 이유로 고전으로 남은 건 아닌 것 같아요.
        (너무 늦게 대댓글을 달아 보실지 모르겠네요. 제가 글을 빨리빨리 못 써서 답글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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