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바낭> 손 끝에 걸리는 책

어렸을 때는 내 방 책장에 있는 책들을 정리해 보면서

오늘은 무슨 책을 읽으면 딱 좋을지 눈으로, 그리고 손으로 같이 책을 골랐어요.

제목이 마음에 들지만 손끝에서 느낌이 나지 않으면

그건 그날의 책이 아닌거죠.

 

내 방에는 에이브 전집이 메인이었는데

엄마 친구 아들이 5권을 빌려가고서는 돌려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책을 번호대로 정리하면 비어있는 번호가 마음에 걸려서

분위기가 비슷한 책끼리 모아보기도 하고,

책 두께가 비슷한 것 끼리 모아보기도 하면서

자주 책장순서를 바꾸어 주었죠.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는 시험이 끝날때마다

해문판 아가사 크리스티 한 권과 만화책을 사는 게 낙이었어요.

집이 교보에서 가까워서

방학에는 거의 매일 교보와 종로도서관에서 죽치고 있는 게 제일 큰 기쁨이었고요.

 

지금은 듀게를 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책들은 항상 메모를 해 두었다가

한번에 몰아서 인터넷 주문을 하는 데 하나씩 사 모으던 맛은 아니에요.

그래도 사고 싶은 책의 리스트가 늘어가면 저축하는 기분이 들어요.

 

어릴 때는 책을 모으는 걸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 부터는 모으지는 않아요.

읽고나서 좋았던 책들은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거나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은 기부하기도 하구요.

 

그랬더니, 재미있었던 책도 제목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오늘은 이리저리 몇 번 입에서 굴려보다가

열 번 정도 인터넷 검색을 해서 알아냈어요.

 

올케가 산후조리 할 동안 읽을 수 있는 가볍고 즐거운 책을 추천해달라기에

떠올랐던 책인데

'나와 우리의 여름' 이란 책이에요.

읽고 이 책을 빌려주었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떠올랐죠.

이젠 이런 풋풋한 이야기를 읽어도 이런 아들내미가 있었음 좋겠다 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며..

ㅋ 주인공이 좀 풋풋해요.

 

오늘따라 앤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저도 추억에 좀 잠겨봅니다.

전 어렸을 때 제가 앤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공상을 좋아했거든요.

다이애나 같은 친구도 있었으면 했고..

중학교 때는 환경미화 하는 날

빨강머리 앤 본다고 집으로 도망갔더니

다음 날 칠판에 제 이름이랑 길버트 이름이 나란히 적혀서 하트 뿅뿅 하고 있었어요.

 

앤이라면 격분했겠지만,

저는 앤에게 좀 미안한 기분이 들었어요.ㅋ 길버트는 앤의 하트라며..

 

오늘같은 추운 겨울방학에는 또 제 2층 침대에 누워서

아마도 우리 읍내, 큰 숲 작은 집... 등등의 로라 잉글스의 글이 제격이었을 거에요.

오.... 돼지꼬리가 지글지글, 히코리 나무에 훈제되는 고기가 떠올라요.

버터틀에 찍혀나오는 황금빛 수제 버터도..

전 식도락을 책을 통해 배웠어요.

아.. 포와로의 핫 초콜릿은 항상 초콜렛을 진하게 중탕해서 녹인 거라고 상상해서

생각만해도 달겠지만 꼭 먹어봐야지 했었구요.

 

아... 길어졌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앤을 좋아하는 분들끼리 모여서 낭독회 같은 거 하고 싶어요.

저의 오랜 바람.^^

 

    • 손끝에 걸리는 책이라니 제목 좋아요. 저도 어릴 때 책 고르는 일에 있어서 가장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서점에 가서 직접 고르고 산 책들.. 그 때는 자기 주관에만 의존해서, 아니 주관도 제대로 생기기 전이니까 표지와 책 첫 페이지를 읽어보다가 재미있을 것 같으면 골랐죠. 요즘처럼 소장가치 있는 책, 사서 읽으면 아까운 책, 권장도서 이런 식의 기준도 없었고 취향도 확고해지기 전이라서 가리는 것 없이 막 읽던 시절이어서 그 때가 제일 책에 말랑하던 시기였구나 싶어요. 요새는 너무...책 선정에 때가 묻은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소장 가치있는 책이란 말 조금 웃겨요. 애거서 크리스티 책을 반에서 친구들이랑 돌려보던 여중생 시절이 기억나네요.
      • 저도 중학교 때 책을 돌려보곤 했는데(특히 윙크..^^ 계도 들었던 건 같아요)
        그 땐 수집도 목적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책이 돌아오지 않으면 가슴이 쓰려서 나중에는 잘 못 빌려주겠더라구요. 이젠 뭐 아예 그냥 준다생각하고 빌려주지만요.^^
        그럭요. 소장가치... 저도 그런 거 따지곤 했는데 도서관에서고 서점에서고 아무런 편견없이 막 읽던 그 시절이 좋았어요. 뭐 지금의 취향도 그 시절이 있었기에 생긴거겠지요?^^
    • 풋풋한 추억이 담긴 재미있는 글이에요. 본문에서 언급하신 책들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저는 빨간머리 앤을 애니메이션하고 드라마로만 봐서 책은 아직 못읽어봤어요. 도서관에 전집이 주루룩 꽂혀 있는걸 보긴 했는데 이번 기회에 도전해볼까요^^.

      참, 포와로의 핫초콜릿이라니...ㅜㅜ 일단 아쉬운대로 어제 사두었던 다크초콜릿이라도 먹으면서 독서에 잠겨 보렵니다.
      • 알고보니, 그냥 지금의 핫 초코(=코코아?) 였더라구요. 그래도 제 맘속의 핫초콜릿은 여전히 진한 중탕 초콜릿..^^
    • 마지막 문단은 제가 최근에 읽은 '내 식탁위의 책들'이 생각나네요. 이런저런 책들에서 음식과 관련된 부분을 뽑아서 그 책과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한 책이었는데 흥미롭게 읽었어요. 저는 어렸을땐 만화책만 좋아해서 ^^ 고전들이 많이 언급되는데 그런 책을 어렸을때 못읽어본게 아쉽더라구요. 지금에서라도 다시 찾아읽어보려고 책 리스트를 갈무리 해뒀어요.
      p.s 이안님 글 따끈따끈한 느낌이라 좋아해요. 따뜻한글 감사해요~
      • 아. 제가 감사해요^^
        내 식탁위의 책들 읽으셨군요. 전 예전부터 저자의 블로그 팬이어서 책 나오길 기다렸다가 사서 봤어요. 전 좋았는데, 요리하던 제 올케는 지식의 나열같았다며 별로라고..취향은 다들 다르니까요.
    • 보통 책을 고를때 손끝으로 표지와 안쪽을 더듬고 손으로 읽은 다음 코를 바짝 갖다대고 코로도 읽어보지요
      • 전 도서관 특유의 책먼지? 냄새를 좋아해요. 근데 이상하게그 냄새를 맡으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더라구요.ㅋ
    • 큰 숲 작은 집 저도 침을 삼키며 봤어요!! 돼지꼬리 지글지글, 단풍나무 수액으로 눈 위에 만든 캔디, 돼지 방광으로 만든 풍선... 에이브 시리즈 참 좋았죠? 전 웅진세계명작도 좋아했는데, 창가의 토토가 히트치기 전에 이 시리즈에 이미 들어 있었답니다.
      먹을거리 나오는 책들을 좋아하는데, 성석제 작가의 '소풍'(묵 껍데기 관련 얘기 정말 재밌어요)이나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할바란 것이 어떤 맛일까 꿈꾸게 만든)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 오~ 이건 메모해야겠네요^^ 미식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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