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옥, 타인의 지옥, 엑스트라 26

1. 지나보면 제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준 말은 "인간은 자신의 지옥에 살며 타인의 지옥을 부러워한다" 였습니다.

 내 지옥이 끔찍했던 만큼 타인의 지옥이 부러웠습니다. 탐욕스럽게. 그악스럽게 바랬습니다. 그 잉여의 지옥에서 살고 싶었어요. 유능한 인간의 소외,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허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천재의 외로움, 상대의 애정이 부담스러운 회피, 시기와 질투로 인한 고통, 기타등등기타등등. 누구나 자기가 주인공인 삶을 산다지만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잘해봐야 웃기는 감초거나, 스쳐가는 엑스트라 26번이었죠. 그런 엑스트라 26번의 삶이 부러웠던 이도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엑스트라 26번이 언제나 싫었어요. 지금도 싫어요. 현실을 머리로 정리하고 이해하고 납득하고 마음을 움직여도 저 밑바닥의 끈적한 검댕은 그렇습니다. 타인이 부러워하는 삶에 대한 욕망은 들러붙어서 사라지지 않고 부끄러운 기억을 만들어줍니다. 질리지도 않고.

2. 사실 저도 진지하고 음울하고 매력적인 글을 쓰고 싶은데, 한 십분쯤 지나면 헛소리를 하고 싶어집니다. 무거운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 보았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차라리 웃기라도 하고 싶어서요. 웃을 힘조차 없다면, 유머가 떠오르지 않다면 그것이야 말로 끝이죠. 온힘을 다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지금의 우울함에서 도피합니다. 타조가 머리만 숨기고 도망치듯 회피합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요.

3. 나이먹어서 배운 것은 적당한 이기심과 뻔뻔함이 자신의 구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 맞추면 그런 어색한 제 모습을 보고 상대가 불편해 하고, 맞추고 있는 나도 불편합니다. 내가 세상에 맞추지 않으면 상대는 불편하지만 나는 편합니다. 한쪽이라도 편해야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뻔뻔함이 힘이 됩니다. 아마 세상의 많은 뻔뻔한 이들이 잘 사는 이유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죠.

4. 그래도 일상의 즐거움은 엑스트라 26의 구원이자 전부입니다. 중고서적에서 하닥거리며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마음맞는 소수의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새로나온 랑콤의 한정판 블러셔의 색은 사랑스럽고 차가운 겨울 밤의 하늘은 아름답습니다.

 5. 언제나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쓸모없는 엑스트라 26은 편집될테니까요. 쓸모없는 것에 마음을 쏟고 애정을 보내며 쓸모없는 인생이라도 괜찮기를 바랍니다. 별과 별처럼 떨어져 있는 적막의 아름다움으로 홀로 있는 서글픔을 잊었듯 언젠가 세상이 쓸모없는 것에 대한 애정이 가득 차 온기가 스며들지도 모르니까요.

6. 별처럼 멀어도 좋은 꿈 꾸세요.
    • 이 글도 충분히 매력적이에요. 좋은 꿈 꾸시길.
      • 감사합니다. 좋은 꿈 꾸세요.
    • 글 참 많이 공감되네요. 특히 4번 부분. 결국 이 외로움과 허무함 덧없음 같은 것들은 그 지겨운 일상에서의 소소한 부분에서 결국 채워지더라구요. 맛있는걸 먹고 재밌는 영화를 보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에 드는걸 사고(이번 랑콤 봄 컬렉션 너무 이뻐요*_*). 그럼 또 인생 뭐있나 하며 또 그 지겨운 일들을 계속 할 수 있는 마음의 원동력 같은게 되고. 하루하루 그렇게 지나가네요. 벌써 두시! 좋은 꿈 꾸세요 :)
      • 그렇죠. 별 것 아닌 인생이 일상의 기쁨이 구원이 되죠. 그리고 랑콤 봄 한정은 정말 예뻤어요.

        이르지만 좋은 꿈꾸세요.
    • 충분히 좋은 글 쓰고 계세요. 몇 번은 닉네임을 눌러 다시 찾아 읽은 기억도 있는걸요.

      주인공 옆에서 감초 역할을 하는 엑스트라 26도 실은 엑스트라 21즈음 되는 자가 간절히 흠모하는 주인공으로서의 삶이 있을 테고,

      엑스트라든 천재이든 교황님이든 필부필부이든 사람인 이상 목타면 물 찾고 똥 안나오면 배에 힘주며 사는 건 똑같은거 아닌가요.

      안녕히 주무세요! ^_^
      • 언제나 따뜻하고 상냥하신 글루건님. 재미있게 읽으신다니 제가 다 기뻐요.

        그래요, 누구나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 들으면 힘이 나죠.

        좋은 꿈 꾸세요.
    • 인간은 자신의 지옥에 살고 있고 타인의 지옥을 부러워한다
      멋지네요. 공감해요. 그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나만 지옥인 줄 안 탓에 응석도 많고 이기적이었죵
      • 자기 지옥에 깄으면 타인의 지옥을 볼 여유가 없으니까요.

        머리로는 알아도 이해하기 참 어려워요. 그게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저도 라곱순 님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 plbe님 달아주신 댓글 좋아해요. 어른의 뻔뻔함은 젊음의 치기를 상대하는 좋은 방법이죠.

      아무것도 아닌양 해주신 말 감사합니다.

      확인만하고 답변아 늦어 이렇게 말씀드리지만요.



      좋은 꿈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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