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 않았는데, 미안해지는 일들.

말 그대롭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어떤 일을 계기로 미안해지는 것.

그런 일들이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 같아요.


직장은 아니고, 어찌저찌 같이 어떤 '일'을 하게 된 후배, 또는 동생이 있어요. 

같이 일을 할 때 그 후배가 정말 너무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근태도 안 좋고, 무능력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배의 일을 제가 다 해야 했으니까요, 참 밉기도 했어요. 아니 인간적으로 싫어했죠.

자세하게 모든 걸 말 할 수는 없지만 그런 답답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때마다 좋게 달래보기도 하고, 저 스스로 끙끙 앓으며 참으려고 노력도 했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터져버렸죠. 

심하게 화를 냈습니다, 제가. 

어차피 곧 저는 그 일을 그만 둘 거였고, 무엇보다 다시 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더 이상 '저런 인간과는 만나고 싶지 않다, 아니 만나지 않을 거다'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몰아 세웠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저는 그 일을 그만 두었죠.

그 친구와 같이 일을 한 기간은 4개월정도? 

짧지 않다고도 볼 수 있지만, 알고 지내고 싶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최대한 교류를 안하려고 벽을 뒀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가까워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친구도 그렇게 저의 기억에서 지워졌죠. 

일년도 더 지났죠.


그런데 

2013년, 새해가 되고 며칠 안 돼서 저녁 무렵 한 통 전화가 오는 겁니다.

낯 선 이름이 핸드폰 창에 뜨더라구요.

이름이 뜨니 분명히 저장되어 있는 이름인데, 이게 누구지 하고 갸우뚱 했습니다.

그리고 일단 전화를 받았죠.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서야 생각이 나더군요.

어색하게 '아, 오랜만이다'라고 하며 동시에 속으로 '도대체 왜 전화를 한 거지?'라며 머리를 막 굴렸습니다. 

그 때 내가 화내고 욕한 일에 앙심을 품고 복수의 전화를 한 건가, 돈이 필요한 건가, 뭐지? 하며 다양한 이유와 또 다양한 대응책을 그 짧은 순간에 떠올렸죠.


"어떻게 지내시는가 하구요."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과 함께.



....새해 인사를 할 정도의 관계가 아니었으니까요, 이게 뭘까 싶었어요.

그렇게 애상치 못한 공격(?)에 어색하게 통화를 끝내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너무 미안하더라구요.

그 친구는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관계를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어요.


같이 일할 때 그 친구가 저에게 시시콜콜 했던 생활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자기 친구가 어쨌네, 신발이 어쨌네, 데이트가 어땠네 하는 이야기들이요 갑자기 막 떠오르는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때의 제 반응들이 떠올랐어요.

시큰둥하게 '그래?', 또는 '.....', 또는 '근데 그 일은 다 했어?' 등등등 도무지 그 친구가 대화를 더 이어갈 틈을 주지 않았던 저의 모습들이 떠올랐어요.



미안했습니다.

미안하지 않았는데, 애상치 못한 그 통화로 너무 미안해졌습니다.

세상 혼자 사는 거 아닌데 너무 오만방자했던 제가 부끄러웠고, 또 그 친구에게 미안했어요.

살다 보면 내 딴에는 전혀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알고보면, 저지르고 있는 '잘못'이 많을 지도 모르겠어요.


길게 쓸 깜이 되는 이야기도 아닌데요, 잠이 안와 오랜만에 주절주절 거렸네요.

    • 가끔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저를 좋게 기억해주시는 분들에 몸둘바를 모를때가 있더라구요.
      진심으로 대해주지 못했었던게 엄청 부끄럽고 미안하게 만들어주시는 분들.
    • 아! 이 이야기는 여러 버전의 단편으로 활용할 수 있는 소재인 것 같아요. 눈치없고 무능한 선의가 어떻게 딱딱한 관계의 벽을 뚫 -거나 말랑하게 녹여버리- 는 힘(혹은 공)을 발휘하게 되는지에 관한. / 언뜻 드는 생각으론 하루키 버전과 은희경 버전이 뚜렷한 대조를 이룰 듯. ㅎ
    • 저도 글쓴님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경험이 몇 번 있었어요. 예전에 일할 때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보조를 시킨 적이 있거든요. 개 중에 보면 일하는 태도가 영 아닌 애들이 있죠. 달래도 보고 답답한데 참으려니 끙끙 앓기도 하고 결국엔 엄청 혼내기도 했죠. 전 기본적으로 (강한 표현을 하자면)일하는 도구 정도로 그 학생을 생각했기 때문에 제대로 일하지 않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그 친구는 저를 만나는 일을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중에 연락도 오고, 이 때의 일을 저와 다른 식으로 기억하더라구요. 저는 그 친구들이 제게 자기 생활 얘기할 때 잡담 끝내고 일이나 하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br />직장후배나 동료들 중에도 정도는 다르지만 그런 타입의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도 성격상 일할 때는 속터지고 혼도 내고 하지만, 가끔씩은 마음을 좀 넓게 가져보자 싶을 때도 있더라구요. 극도로 무능하고 나태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처리가 조금 답답하다고 해서 인간을 무시하지말자 하는 반성이랄까요.
    • 아- 저도 인간을 무시하지말자는 반성 많이 합니다.
      제 자신을 보고한 반성도 있지마는, 회사생활하면서, 본인은 티끌도 안틀릴것같이 깐깐하게 구는 선배들을 보고있노라면,
      저절로 반성이 됩니다. 덧붙여 직장에 취직하기전부터 이미 그선배들하고 같은 생각을가지고 살았었기에, 첫직장에서는 그런선배언니를 아주 좋아하고 따랐어요.
      근데 저한테 좀 심한말로 언어공격을 한뒤로 제 마음이 완전 엇나갔거든요. 그때 그런상처를 입지 않았더라면 하고 요즘도 가끔 생각합니다.
      잘못의 계기는 제가 제공했지만, 그사람이 저한테 했던 언행은 본인 성향도 있지만 저사람이 과연 나를 '사람'으로 보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했었고 그 뒤로는 인간으로서의 '정'이 다 떨어졌었거든요.
      그뒤로는 깐깐함이나 내일에 흠이나 티끌없이- 라는 것에 대해서 좀 많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지금은 한없이 느슨해서 누군가에게 민폐일지도..
      전화하신 그분은 참 마음이 착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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