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하지 않고 감동받았던 영화


MSN 메신저가 사라진다는 말을 전해듣고, 얼마 전 허겁지겁 계정에 로그인해봤다가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어요.

몇 년 전, 모 작가 사인회 사진이었는데, 그 사진을 첨부해서 지인에게 보냈던 메일에는 이 날 얼마나 떨렸는지의 감회가 구구절절...

작가분 눈동자에 비치는 내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고 쓰여져있더군요. 허허

지금도 기억하는 건, 이 분의 사인을 받을 수 있다고 소식이 전해졌을 때, 엄청난 경쟁률이 몰릴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공포에 떨며

참가 신청을 했었는데, 정작 행사장에 가보니 제가 첫번째 참가신청자였으며 전체 희망자 수도 손에 꼽을만큼 적었다는 웃지 못할 사실이었죠.


저는 정말 온몸으로 떨리고 긴장하고 감동받을 때, 남들이 봤을 때도 상반신부터 얼굴 전체가 덜덜 떨리게 되는 특이한 증상이 있는데,

이 증상을 겪을만큼 떨린 적은 매우 오래전이고, 최근이라 해봤자 몇년 전의 저 작가 사인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

마음에 동요가 일었던 순간, 감동받았던 순간을 도무지 떠올려보려 해도, 

국민학교 때 음악시간의 단소 시험 때 느꼈던 감정같은 무지 옛날 일들만 생각나더군요.-단소시험 때는, 늘 여지없이 삑사리를 내곤 했거든요.-


최근에 생각한 건, 

무언가에 열을 올린다던가, 예민해진다던가, 어떤 발언에 분노하게 된다던가... 

즉 너무 논리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났던 때는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지만,

아무런 계산이나 분석 없이 무언가에 의해 감동받고 눈물을 흘리고 떨려하고 했던 기억은 점점 드물어지는 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덕분에, 

단소 불기 시험이나, 작가 사인회와 같은 제 직접적 신변의 일은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현상을 겪은 경험이 의외로 많았다는 걸 인식했어요.

정확한 맥락은 기억이 안나지만, 정성일이 영화를 처음 좋아할 때는, 그냥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갔었는데,

그 이후 단계로 가니 영화의 줄거리, 화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위치를 찾으며 분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말을 했었죠.

때로는 영상에 대한 순수한 몰입에, 쌓여가는 잡지식이 방해요소가 되는 느낌이 들어서, 영화를 멀리 한지도 몇 년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가 영화 일을 할 것도 아닌 이상, 그냥 순수하게 영화를 즐기고 감동받았던 때가 그립기도 해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이 아무런 계산이나 분석 없이 사랑에 빠졌던 영화나 특정 씬은 무엇이었나요?

그 영화가 비록 영화사적으로나 비평을 통해서는 그리 대단치 않은 영화라고 해도요.


저같은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프리티 우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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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보러 갔을 때 씬을 특히 좋아하거든요.

물론 비비안은 한번도 그때까지 오페라같은 걸 보러 가 본 적도 없었죠.

영화에서 오페라 장면을 좀 길게 비춰주는데, 비비안이 보다가 감동받아서 눈에 눈물이 맺혀가는 장면에 감동받았어요.


그런데 큰 친분은 없지만, 실제 저를 아는 분과 어쩌다 영화 이야기를 나누다가 <프리티우먼>에 감동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더니, 

다짜고짜 '돈 많은 남자를 잘 만난 여자의 이야기에 환상이 있으신가보죠.'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전 그렇진 않다, 그 반대라고 해도 그 씬이 좋았을 것 같다

(설령 비비안이 더치페이로 라 트라비아타를 보러 갔다 할지라도요.-_-)고 응답했을 때

'뭐, 아니면 말고요.'란 식으로 대답해서 더 언짢아졌죠. 네, 저도 페미니즘 비평을 통해 얼마든지 <프리티우먼>을 깔 수 있다고요.

그래서 이후에는 왠만한 친분 아니고서야 <프리티 우먼>이 좋았다는 이야기는 함부로 안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오해 받을 여지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리틀 로망스>도 비평이나 계산없이, 무척 설렜던 영화고 처음 봤을 때 눈물을 질질 흘린 영화였어요!

아마도 조지 로이 힐 감독과 제 유머코드는 멋지게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간간이 나오는 유머가 빵 빵 터지게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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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게분들이 순수하게 감동받은 영화를 알려 주시면,

제가 안 본 것들 중에 기회가 될 때 꼭 보고싶네요.

    • 전 프리티 우먼을 얼마전에 처음 봤는데 확실히!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 딱 알만큼 매력적인 영화더군요. 가끔 이야기 얼개를 뛰어넘는 매력을 보이는 작품들이 있죠. 매력만으로도 충분해요~ ^^ 아, 맞다 질문에 답하자면 [트랜스포머]요. 평소 내가 거슬려하는 요소 만빵임에도 됐어! 이 정도 가오라면 가오만으로 됐어! 다 이뤘어! 하는 느낌이였달까요. 그런 느낌을 받았던 영화는 딱히 분석 안하죠. ㅋㅋ
    • 최근에 다시 본 영화 중에서는 타인의 삶하고 (제니퍼 제이슨 리가 나오는) 조지아요.
    • 플립에서 아빠가 아이에게 그림 선물하는 장면은 볼때마다 가슴뭉클해요... 보고 또 보게되는 사랑스런 영화구요^.^ 노팅힐의 마지막 안나의 대답장면도 너무 좋아요...
    • 가장 최근에 본 건 롤라 런이요. 프란카 포텐테의 민폐 남친을 위한 넘치는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 리플 덕분에 저도 그 때의 감흥이 떠올랐어요! ^^ 조만간 또 빌려보렵니다
    • 헤드윅에서 midnight radio 부를때요.
      • '스모크' 제가 본 영화 중 가장 멋진 엔딩을 가지고 있어요. 정말 아름다와요.
    • 두 영화 모두 간만에 떠올리게 되네요. 리틀 로맨스와 작은 사랑의 멜로디가 늘 헷갈리네요. '캄파닐레에 종이 울릴 때' 라는 영화제목까지 떠올라 찾아보니 리틀 로맨스의 TV방영제목이었군요.

      개같은 내 인생. 허공에의 질주. 아름다운 청춘.
    • <레이첼 결혼하다>가 생각나네요. 후반부 결혼식 피로연 장면 볼 때 정말 제가 그 장소에 있는 기분이 들더라구요.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저렇게 다함께 즐거운 식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 윗분 헤드윅 미드나잇 라디오.. 고딩때 저도 부르르 떨면서 감동받았죠. 최근에 그렇게 감동받은건.. 봉준호의 마더가 생각나네요. 마지막에 김혜자씨가 넌 엄마 없어? 할때.. 부들부들 눈물이 터져나왔어요.
    • 코파카바나의 이자벨위페르 후반부 결혼식 씬이요. 사람들은 웃는데 전 감동.
    • 문안한애긔/ 으악! 전 트랜스포머를 본 적이 없어요. 긴 긴 시리즈군요. 왠지 영화관 3D화면으로 봐야만 그 '가오'를 느낄 것 같지만, 꼭 보고싶어지네요.
      침흘리는글루건/ 타인의 삶은 지인도 추천해준 적이 있는데, 늘 착각하고 미루게 되고 그렇네요. 두 편 모두 보고싶어요!!!
      Regina Filange/ 주노 사랑스러워요. 페트 통째로 들고 가면서 마시던 첫장면이 인상깊었는데 말이죠.
      twinkle/ 몇년동안 영화 손 놓은 티가 팍팍 나네요. 플립이라는 영화는 심지어 매우 생소하게까지 들립니다. 놓쳤던 영화가 많았다 싶네요.
      l'atalante/ 저도 롤라런의 그 눈빠지는 에너지가 좋아요!!! 포스터 봤을 때는 '이건 뭥미' 싶었었죠. 그 후에 한동안 프란카 포텐테 영화들을 찾아봤던 기억이 나네요.
      비네트/ 헤드윅은 정말 좋아하는 영화 베스트에 들어요. 10번은 넘게 본 것 같네요. 언제 봐도 찔끔 눈물이 나면서 마음 한켠이 뜨거워지는 영화에요.
      아니...난 그냥.../ 전 스모크를 통해 폴 오스터라는 작가를 인식하게 되었어요.
      MSG/ 본의아니게 추억속의 영화를 꺼낸 셈이 되네요. 저는 '개같은 내 인생'...봤던 때가, 비디오 대여점 시절이었는데 그걸 거실장에 보고 올려놓으니까, 어느날 아버지가 보시고 '이건 제목이 뭐 이러냐..' 했던 기억이 있네요. 하하 아버지, 그게 아닙니다!
      Waterloo/ 결혼식 피로연 장면인가요. 즐거운 영화같네요. 꼭 볼게요. 추천 감사해요.
      프레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를 보고 생각보다 슬프거나 큰 감흥은 없었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지금 다시 보면 그때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느낄 지도 모르겠네요.
      pompom/ 헤드윅!!! 마더는 영화관에서 봤었는데,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모르겠어요.
      불가사랑/ 이자벨위페르의 페르소나가 정말정말 좋아요. 코파카바나, 잊고 있었는데 꼭 볼게요.
    • 가위손

      첨밀밀

      댄싱히어로

      사랑은 은반 위에

      유콜잇러브



      중고생이었을 때 이 영화들을 보고 며칠 씩 꿈 속을 거닐었었죠. 삽입음악이 좋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그냥 좋은 게 정말 좋은 것, 점점 그냥 좋은 게 적어져서 슬퍼요.
    • 이프/ 가위손, 저도 이 영화를 어릴 때 봐서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었어요. 보는 동시에 현실인지 아닌지를 구별하지 못했던 기억이 나요. 몰입도가 장난 아니었죠. 첨밀밀은 최근에 다시 한번 봤는데, 개봉 당시 봤을 때보다 훨씬 훨씬 감동했었던 것 같아요. 연륜의 힘인지... 유콜잇러브는 우연인지 어제 문득 OST를 들었어요! 반갑네요. 그냥 좋은 게 정말 좋은 것, 동감합니다. 좋은 영화들 추억을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 전 제일 최근에 본 그런 영화가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사랑이라는 것>이었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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