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하게 라캉 읽기 1. - 삐딱하게 보기, How to read 라캉.

전 철학자의 글을 읽기 꺼려하는데, 그 이유는 섬뜩하게 잘 버려진 명제들이 제 멋대로의 머릿속을 깔끔하게 절단하고 정리해서 한 자루의 고깃푸대를 만들어버릴까 두려워서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논리체계가 옳지도 명확하지도 못하지만 일생동안 정이 든지라 '저 괴물 내 앞에서 치워!'라고 고래고래 비명지르는데 무시하고 읽기는 어렵더군요. 그래도 어찌어찌 최근에는 말이 통해서 그런 글을 읽는다 하더라도 조각조각 살해당하거나 하지도 않고, 인식을 논리체계가 하니까 알아서 왜곡되어 받아들여 그것들도 특유하게 변질되버린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리 된김에 친구가 빌려준 라캉 입문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전 라캉도 모르고, 지젝도 모릅니다. 제가 읽기 시작한 책은 삐딱하게 보기Looking awry와 HOW TO READ 라캉 (이후 HTR) 두 권입니다. 이상하게도 라캉이 직접 쓴 책은 없고 신기하게도 두 권 다 슬라보예 지젝이 라캉에 대해 썼더군요. 라캉이 쓴 책을 직접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지젝 이 사람이 라캉을 좀 더 쉽게 설명해주기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적용하며 해석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분이라 썩 즐겁지는 않습니다. (HTR 뒤의 라캉의 저서를 보면 '에크리'와 '세미나' 두 권이 대표적인 책인데 전자는 맘 편하게 아무렇게나 말해서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하고픈 말은 다 한 책으로 보이고, 후자는 그럭저럭 듣는 사람을 고려해서 말했으나 알맹이가 살짝 빠져버린 책으로 보이더군요. 과연 그 책들을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웠습니다.)

 

삐딱하게 보기는 1-1까지만 읽고 책을 덮게 되었습니다. 도무지 S◇D가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고 시작하더라고요. 혹시 HTR에 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을까 책을 넘어가서 읽고 있습니다. 삐딱하게 보기의 머릿말 뒷부분을 보게 되면, 책 전체에 대해 볼드체를 사용하며 요약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요약 내용만 읽고 이해가 가면 삐딱하게 보기를 정독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읽은 부분까지의 요약 문장을 보자면 '먼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실재의 '블랙홀'을 메우는 환상공간이라는 잉여를 내포하는가에 관해 기술할 것이다.'이죠. 제가 이해하기로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세계에서 환상이 어떻게 끼어들 수 있는가, 를 설명해주겠다' 정도 였습니다.

 

그리고 설명없이 나오는 용어 하나가 '소문자 a'. 저는 바보이기에 이게 뭔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여기서 세익스피어의 리차드 2세의 인용인 '그러나 폐하께서도 왕의 출정을 왜곡해서 보시기 looking awry 때문에 실제 이상으로 상심되는 그런 슬픔을 보고 계신 겁니다.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단지 존재하지도 않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로 어떻게 환상이 현실에 끼어드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또렷하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흐릿하게 보거나 옆으로 눕혀보면 그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식의 착각에서 실체를 얻고 현실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었죠.

 

사람이 인식하는 순간, 실체가 없는 것이 힘을 얻고 실체를 가지게 되어 삶 자체를 바꾸어버린다는 것은 제가 오래전에 그렇다고 호들갑을 한 번 떤 적이 있어서 기쁘기도 하지만 창피하기도 하더군요. 이미 세익스피어 때부터 그런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는게 되니까요. 제가 사는 세상은 이미 돈이 교환과 목적이 합일되어 나누기 힘든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데 이미 너무 늦은 이야기였으니까요. 무에서 유가 나왔다면, 이라는 이야기의 흐름하에 몇 가지 무에 대해 묘사하는 소설들을 언급합니다. 저는 끝없는 이야기에서 나오던 무가 떠오르더군요.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끝없는 이야기에서의 무는 언어로 '저기 무가 있다! 저기 무가 넓어지고 커지고 있다!'라고 말은 들을 수 있지만 제 머리로는 도저히 무가 가득찬 그 공간을 떠올릴 수 없어서 상상에 에러가 뜰 지경이었지요. 그렇기에 '미완의 생명을 지닌 듯 천천히 흐르는 회색빛 무정형의 안개' 정도는 그럭저럭 괜찮지 않나,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색이라거나 안개라거나 천천히 흐르는 정도는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럭저럭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미 볼드체로 강조가 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우리의 욕망의 실재에 있어 우리는 모두 살인자들이다'였습니다. 거의 '상상으로 범하는 자는 이미 음욕의 죄를 지은 자들'이라는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아득하게 만든다면 이 말이 그렇게 과격하지 않다는 겁니다. 꿈을 비일상으로 생각하며 꿈에서 매우 끔찍한 여러가지 짓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하등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 현실이었다면, 우리는 또는 저는 꽤나 만만찮은 범죄자가 되는 거겠죠. 현실감이라는 마지막 보루가 살짝 빠져나간다면 인간이 열 수 있는 무저갱이 쉽게 열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꿈이나 현실이나 그렇게 생각하자고 한다면 수 많은 꿈으로 끝나는 이야기나 꿈과 현실 두 중 어떤 것인지 열린 결말로 내는 이야기들이 사실은 그 결론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바꿔버리는 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데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어려운 토탈 리콜의 결말은 꿈이든 현실이든 상관 없이 '그가 저지른 살인들은 그저 살인이다'로서 영화가 주는 면죄부를 받을 수 없게 되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 리뷰글에 누가 언급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비정한 주인공이라면 수 십명을 죽이고 시체를 '말캉' 밟던가 말던가 상관 없는 이야기겠지만 말이죠)

 

그리고 타자의 타자/편집증 이야기로 넘어가기 시작하는데 충격적인 역주를 보게 됩니다. 역주 7. 이 책에는 '타자'에 대한 지칭으로 the Other, the big Other, the great Other가 나오는데, 의미상 모두 '타자'로 통일하여 번역했다. 그.. 그게 제가 라캉은 몰라도 '대타자'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는데 이렇게 번역해도 되는걸까요? 으아니 타자 큰타자 대단한타자 전부 타자라니 이게 무슨 말이요. 그래서 저는 여기서 타자의 숲에 빠져 멘붕. 1-2에서는 충동의 공식으로 S◇D가 나오구요. 어쨌든 이 타자의 타자가 나오는 마지막 부분은 편집증으로 교묘히 현실에 대한 인식의 충격에서 빠져나가던가 광기에 빠져 죽던가 양자택일의 상황이라고 대충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겠지만 말이죠.

 

더 이상 대중문화를 통해서 라캉을 읽을 수 없게된 저는 HTR를 집어들었고 '오늘날 우리가 라캉에 대해 해야 할 일 역시 이와 같다'라고 끝나는 패기 넘치는 머릿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부분은 라캉이 IPA에서 쫓겨나고 주류 체제에 대한 반발과 자기 고집대로 자기 생각을 이어나가는 부분, 즉 라캉을 매우 치고 마구 깝시다라는 거라고 이해했습니다) 전 이런 문과 개그가 좋아요. 이 지젝이라는 사람은 대중문화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무언가 설명할 때 대중문화를 한 순간이라도 놓을 수 없는 것인지 끊임없이 영화와 SF, 판타지와 소설 등이 끼어들지만 적어도 삐딱하게 보기보다는 쉬울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HTR의 1장을 읽기 시작한 것이 바로 지금 이 때입니다. 초반에 경고했지만 전 라캉도 지젝도 모르기 때문에 대충 있는대로 읽고 나중에 후회할거라 생각하지만 정리(라고 하기에는 바낭이지만)하지 않고는 머리에 쥐가 날 것만 같아 이런 뻘글을 써 봤습니다. 아무래도 전혀 이해의 진전이 없을터이기에 미리 죄송.

    • 일단 나지오나 브루스 핑크 책으로 기본 개념을 정리한 뒤 맹정현의 리비돌로지를 보시면 어떨까요.
      • 역시 정석 루트가 있는 거군요. 지젝은 대중화 또는 뒷담화 전문 영역인가요.
        • 나지오는 요즘은 그렇게 많이 안 볼 겁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의가 쓴 책이고 어쨌든 입문용으로 이만한 책도 없죠.
          • 기억해두겠습니다. (기억력이 안 좋아서 기억은 못하고 이 글을 검색해서 확인하고 빌리겠지만..)
    • 프로이드 전집 시작하고 힘들어죽겠는데 일로 갈아탈까봐요
      • 프로이트는 까나 빠가 많아서 짚고 넘어가야하긴 할텐데 꿈의 해석이 이천년도에 백주년이었으니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인건지요.. 근데 지젝 말로는 라캉도 프로이트빠라서.. 전 융이 끌리긴 하는데 그 사람도 프로이트의 그림자에서 못 벗어난 마냥 보여 무섭습니다.
        • 라캉은 거의 프로이트 계승자라고 생각해야 할 거 같습니다만.

          여튼 융에 대해서 쉴드를 치자면요,

          신경증이 심리적인 원인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증세라는 점이라든가, 꿈을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보는 점, 그리고 환자를 다루는 경험주의적인 태도 등은 프로이트의 업적입니다. 이후로 나오는 많은 연구자들이 이 업적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융도 (특히나 한때 그의 후계자로 지목됐을 정도니) 거기에서부터 자유롭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라고는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꿈에 대해 접근하는 태도(프로이트는 꿈의 '인과'를, 융은 꿈의 '목적'을 묻는다는 점)에서부터 무의식을 바라보는 관점(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억눌린 것이지만 융에게는 인간의 의식만큼 중요하고 풍부한 삶의 원천이 되죠)까지 아주 많은 부분이 다릅니다. 게다가 융은 프로이트에 비해서 훨씬 종교적입니다. 자서전과 여러 책들을 읽고 저는 융이 큰 샤먼에 가까웠다고 생각하고도 있어요. 그 자신이 종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기도 했고(아빠가 목사, 엄마는 영적인 촉이 발달한 인간.) 인간에게서 종교가 (심리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현대의 병폐는 종교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과 유물론적 계몽주의자들이 종교를 배척했기 때문이라고까지 주장하고도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종교와 신화 같은 것이 융 학파에서 퍽 중요한 연구 과제가 돼요.

          융이 프로이트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고 보기에 (제 눈에는) 융이 (프로이트보다) 너무 큰 것 같습니다. 떠들어댄 부분에 부정확한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쉴드를 쳐주고 싶었습니다. ㅠㅠ
          • 철학과 정신병리학의 경계가 애매해진건지 제가 읽고 있는게 철학서인지 의학서인지 분간이 안될때도 있고 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건 제가 정신의학의 과도기의 엄청 오래된 책들을 읽고 있다는 반증이 되겠지만요. 저도 한편으론 융이 초기 요소를 정한 MBTi에 매료된 사람으로 융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융은 직관적이고 종교적인 거대한 무언가를 보았고 그걸 적어내려 애쓰다 마무리도 못 짓고 가버렸다고 생각하거든요. 프로이트 이야기가 나와서 그렇지 융에게 프로이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을까 해서 한 말입니다. 읽지도 않은 융을 좋아해서인지 융 좋아하시는 분이 댓글 달아주시니 즐겁(?)군요.
    • 삐딱하게 보기는 좋은 책이긴 하지만 번역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하우 투 리드 라캉은 라캉의 저작과 지젝의 여러 저작들을 어느정도 읽었을 때 더욱 의미가 크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사실 라캉 입문서 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결국 그나마 입문서로는 숀 호머의 <라캉 읽기>가 그나마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이 브루스 핑크이구요.
      에크리와 세미나 이 두 책을 끼고 아주 조금씩 틈틈이 읽고 있는 지 7~8년째가 되어가고 있는데
      처음에는 자크 라캉이 정말 중요한 사상가라고 생각했다가 중반에는 이걸 읽을 시간에 다른 걸 하는게 생산적인 것이 아닐까 하다가
      최근에는 다시 어쩌면 정말 중요한 사상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런 책들을 (삐딱하게 보기는 입문서라기보단 적용서나 사용설명서 같은 면이 있으니 뺀다 해도) 입문서란 이름을 붙여 함정에 빠지게 만든단 말인가요ㅠ HTR은 개론서가 더 적당한 표현이 아닐지 싶고.. 추천해주신 책은 고맙게 머리 속에 갈무리해놓구요.



        에크리와 세미나 읽고 계신거군요. 웬지 욕망을 해결하기보다 그에 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란 말이 떠올라 살짝 웃겼어요. 라캉 자신이 한 말은 허깨비 같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 해석자들이 의미있는 뜻을 뽑아내는 글로쓴 명화같은 것일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저도 원작자의 서적을 읽어보고 싶네요.
    • 생각보다 라캉 정신분석학에 대한 입문서가 많지만 정말정말 간단하고 도식적인(...) 책을 원하신다면 김석 선생님이 직접 쓰신 책들을 추천합니다. 프로이트&라캉...이라는 제목이었나, 그 책은 라캉, 그리고 라캉이 본 프로이트를 이해하기에 좋은 것 같아요. 다리안 리더의 <라캉>은 만화책인데, 정신분석학은 역시 이미지와 함께 보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 이해하기는 하는 방법이로군요. 만화책도 있고.. 라캉은 참 배가 부르겠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 본문의 굵은 글씨로 표시하신 부분은 기독교의 어떤 말들과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래부터 죄인이며, 모두 마음 속으로 간음하였으니 타인을 단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 본문 굵은 글씨 바로 뒤의 제 인용글이 브레이드님이 언급하신 바로 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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