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대로 정리하는 2013년 절반의 절반 동안 읽은 책들.

감기에 걸려 골골대니 아무것도 되는게 없네요. 머리 속이 누른 반죽처럼 되어서 국수 면빨처럼 쭉쭉 생각을 뽑아내다가, 열 때문에 진탕 꼬여서 무한정 풀리질 않아요. 약사러 옷 걸쳐입고 한참 걸었는데도 일요일 휴진 약국 밖에 없어서 되돌아왔어요. 책 읽는 것도 무리고, 되는대로 글이나 써봅니다.


한참 라캉에 대한 책을 읽었죠. 정확히 말하면 라캉에 대한 지젝의 책 두 권을 읽었고, 한 권 더 읽고 있는데 문서를 읽어야 해결 가능한 다른 일들이 생겨나서 진도가 나가질 않네요. <에크리 읽기>는 빌렸다가 욕망 도식 보고 오오, 드디어 이것에 대한 설명이 있어! 하고는 반납 기간이 되어 반납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일이 좀 끝나야 차분히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래도 <HOW TO READ 라캉>을 다 읽으며 그럭저럭 괜찮은 문구들과 격려들을 많이 발견했답니다. 가령, '근본주의자들은 신을 믿는게 아니다, 신을 안다.'란 표현이라던가 '정신분석학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세계가 무언가 욕망을 즐기지 말라고 할 때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세계가 무엇이든 욕망을 즐기라고 할 때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표현도 좋았습니다. 제자리에 있으려 노력하는 것들은 제자리라는 기준점으로 닻처럼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생각을 했어요. 모든 것은 변해가니까 그것을 계속 새로 이해하려면 지치기 마련이잖아요.


그리고 조동일 교수를 책으로 만나게 되었어요. 이름은 생각이 안 나는데 아마 '일생을 공부에 바친 나날들'인가 비슷한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수필 항목에 분류되어 있는데 이 사람의 이름이 익숙한지라 뽑아들게 되었는데, 읽고 난 후의 느낌은 노력하는 천재는 정말 토나오고 짜증나고 질투를 나게 만드는구나 싶었어요. 문학 관련해서 통사 부분을 거의 재편했다고 봐도 무방한데 지금까지 써온 책들 하나 하나가 깨알같이 좋더군요. 특히 매료된 것은 청아한 문체인데, 건조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문장 하나 하나가 매우 쉽고 필요없는 부사나 형용사가 일절 없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의 느낌이 쉽게 전달된다는 것이 놀랍더군요.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미각의 제국>을 쓰신 이름이 기억 안나는 맛칼럼리스트인가 하시는 분이 관리하고 계시는 블로그 문체가 매우 비슷하거든요. 근데 그 분보다 더 건조하고 자기 주장이 덜 들어가 있어요. 거의 모든 책이 이러한 문투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글자로 읽기는 쉬운데 내용은 한도 없이 들어 있어서 영양제 먹는 기분이 듭니다. <세계문학사의 전개>가 제가 아는 가장 최근의 책인데, 제게는 세계문학 통사에 있어 거의 제레드 다이아몬드 급의 저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학문 계열에서도 독자 이론을 가지고 책을 써내는건 매우 어려운 일인데 불구하고 그 전에 자신이 썼던 책들 8권을 바탕으로 비교문학통사를 썼더군요. 게다가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쉬운 단어들을 골라 쓰여져 있는데도 불구하고들어있는 뜻이 진해서 읽다가 배터져 죽겠어요. 그리고 그와 함께 동저자가 쓴 <문학연구방법>이란 책을 읽고 있는데 꽤 흥미롭습니다. 간단히 책의 앞에서 차례 두 개만 뽑아보면, 1. 이 책은 왜 필요한가? 2. 문학은 연구할 수 있는가? 라는 개론서에서 본 적 없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꾸역꾸역 설명을 해 나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일한 이론의 빠돌이가 되는건 싫어하는 편이라 세계문학통사를 저술한 다른 사람을 찾아보려 합니다만, 그렇게 쉽진 않아보이네요.


아,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도 빼 놓을 수 없는 책일 겁니다. 세계 문학사에 대한 제 인식을 재편하게 되는 계기가 된 책인데,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이 1980년대에 나온 책에다가 그 이후의 저서들이 번역이 안 되어서 불안한 점은 있습니다. 촘스키로 시작된 언어변형문법인가 뭔가가 언어의 구성 형식이 인간의 뇌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아무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계열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한데, 말로 이루어진 문화권과 글로 이루워진 문화권의 정신체계(Mentality였던가 그런거 같았는데..)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제가 알아들은 바로는, 글쓰기와 말하기라는 도구가 (형식이) 인간의 정신체계를 (내용을) 바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말로만 이야기를 전달하던 시대에 살던 사람과, 글과 말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대의 사람은 완전히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거죠. 인간의 정신체계가 형식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면, 인간이 쓰는 문학과 철학도 변화했다는 말이 됩니다. 글쓰기와 말하기 > 인간의 정신체계 > 문학과 철학 > 다시 글쓰기와 말하기(영향의 방향),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러한 사례들과 (아직 문자가 전달되지 않은 원시 부족등을 바탕으로) 실례, 그리고 문학의 형식의 변형을 이 기반 아래 설명하는데 꽤 탁월한 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간단히 구어문화의 특징 하나만 들자면, "나무"라는 개념을 구어문화의 사람에게 물어봤을 때 나타나는 예입니다.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러한 엉터리 같은 질문을 하는가, 도대체 저 친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란 어떤한 것인가?'라니, 이 친구도, 다른 사람도 수많은 나무를 지금까지 보아 왔을 텐데, 과연 이 친구는 이러 것에 대한 응답을 듣고 싶은 것이기는 할까? 수수께끼라면야 응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수수께끼는 아니잖아. 게임인가?]


우리는 기억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기억할 필요 없었던 시대에 대해 새로히 생각을 해봐야 된다는 것이죠. 아직 문자로 쓰인 가상의 개념, 인간과 분리되어 있는 이상적 실체, 이러한 것들은 문자로 인해서 그 가정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 책은 주장합니다. 저는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며, 문어와 구어가 유리되거나 분리된 시대의 여러 생각의 저변들을 문어와 구어의 상호작용 및 정신체계의 변화에 입각해서 재정렬시켜볼만한 가치가 있을꺼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인쇄와 제본이 정신체계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면, 현재 들어온 문어의 구어적 활용(게시판이나 SNS, 그리고 휴대전화를 통한 구어에서 문어로의 영향력)이 새로운 정신체계를 이뤄내는게 아닌가 생각해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읽어가며 재미있었던 점 하나만 들자면, 한참 글쓰기가 그리스에 도구로 퍼져나가던 시점에 꽤 여러 철학자들이 글쓰기에 대해서 투덜거립니다. '아니, 그런거 그렇게 다 적어놓으면 기억은 어떻게 할꺼야 기억은, 암기는 어떻게 할꺼야 암기는?' 현재의 디지털 치매라는 것에 대한 우려가 오래 전에도 있었다는게 신기하지 않나요. 우리에게 글쓰기는 이미 내면화되서 도구가 아니란 생각이 들지만요.


에 또, 마지막으로, 희곡을 조금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장편선은 먹고 체할거 같으니까 단편선 부류로 읽고 있는데, 재미있더군요. 읽은 작가의 연표를 정리해나가는데 그게 촘촘해질 수록 재미가 나요. 특히 사실주의 희곡작가들은 정말이지 사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제가 이상한건진 몰라도 18세기의 부둣가를 눈 앞에 보듯이 (연.극.적.이.긴. 하겠지만) 가져다 놓는다거나 아일랜드의 바닷가에서 아들을 모두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라던가 절절하기 그지 없더라구요. 단막극이라는게 극작가의 리즈시절 극이라기보단 데뷔할 때나, 초기의 극일 경우가 많아서 나중에 보면 '뭐야, 그 사람이 나중에 그런걸 썼어?' 싶기도 하더랍니다. 단막극 선집이 한국에 별로 없어서 4권 정도 읽으면 이제 각기 다른 나라의 단막극집을 읽어야 할 거 같은데, 그 전에 의기창창한 그리스 시대의 3대 비곡 극작가나 2대 희곡 극작가의 극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찝찝하겠더군요. 어휴, 우리나라나 그리스나 고대의 경전같은 부분에서 변주만 무지하게 해서 그 틀 가운데서 자기 해석을 조금 덧붙이는 중세 시대의 글들은 (즉 동인지 내지는 팬픽/패러디) 그 원전을 안 보고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근데, 그리스 희비극도 신화의 동인지 내지 팬픽/패러디인지라,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신화까지 가게 생겼네요. 어쨌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으윽, 라캉과 프로이트를 가볍게 비교한 <무의식에로의 초대>는 언제 읽을 수 있을런지..

    • 다음에는 근처 대형 마트로 가보세요. 마트에 딸려 있는 약국은 일요일에도 근무해요.
      (다만 마트가 쉬는 주일이라면 fail...)
    • 빠삐용_ 유용한 정보 감사합니다ㅠ 어제 감기기운이 조금 있긴 했는데 약 안 산 것이 이렇게 될 줄이야ㅠ
      우리나라 약제계는 거의 법적 공휴일을 준수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 세계문학사의 전개를 사놓고 아직까지 안 읽었네요. 'ㅁ';;;
    • 날개_ 저도 다 읽을 수 있을진 의문입니다. 글이 어렵지도 않고 양도 그렇게 많은건 아닌데 진도가 안 나가요..
    •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정말 좋은 책이죠.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시면 소설이지만 이스마엘 카다레의 'H서류'를 꼭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플라톤 서설'도 굉장합니다. 한국어판 부제가 '구송에서 기록으로, 고대 그리스의 미디어 혁명'인데 플라톤 철학을 구송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넘어가는 시대적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 하악, 옹의 저서가 새로 번역되는게 없다는건 왜 이렇게 슬픈지요. 이건 다 촘스키때문이라고 찍어봐요. 프로이트 이후의 라캉이나 데리다 계열의 문자중심 해석도 이 큰 틀로 엎을 수 있을거라는 예감이..



        H서류라. 살려주세요ㅠ 저는 통사 분야에서 이분법으로 재정렬에 대한 희망을 가져보는터라.. 플라톤 서설도 참고 해볼께요. 무려 부제가 그런 이름이라니. 플라톤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인지 모르겠지만 문자문화에도 불만이 많았지만 구술문화의 상징인 시인들도 싫어해서 쫓아내자고 했다던데..



        저는 그를 통해 2천5백년 이후의 인류가 넷 등 (문어형식/구어내용)의 내면화가 이루어지면 정신체계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더군요. 문자의 위상이 좀 떨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 무슨 책 볼까 고르던 중이었는데 얻어갑니다.
      감기 얼른 떼 버리시고요.
    • 듀나_ 황송하게도 듀나님께서 제가 읽는 책을 읽으시겠다니 눈물이 나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네요.
      혹여 재미없을까 걱정이 됩니다. 감기는 얼릉 나아야죠ㅎ
    •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 욕망해도 괜찮아,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9년간 친부에게 성관계를 강요당한 이야기라서 잘 읽히는 것과 별도로 굉장히 마음이 무거워질 수 있어요)
      요즘에 재밌게, 굉장히 몰입하면서 본 책들인데 조심스럽게 추천하고가요. 소개하신 책은 어려워보여서 패스...
    • 키드_ 추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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