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에서 별로였던 것들

지슬의 수상경력과 작금의 평가에 비해 당혹스러울 만큼 저는 영화를 재미없게 봤어요. 특히 몇가지 요소들을 꼽자면...

학살의 비극적 순간에 어김없이 등장하던 슬로우모션과 태극기 휘날리며 풍의 장중한 오케스트라 선율은 개인적으로 .. 감독의 독자적인 시각보다는 흥행영화 풍의 연출을 흉내낸, 그것도 훨씬 못미치는 방식으로 모사한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목격한 유일한 증언자이자, 뚫어질 듯한 시선을 쏘는 통통한 소년(?)군인..  처음엔 감독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의미 있는 역할로 보였으나 고개만 계속 들며 보이지도 않는 오묘한 시선을 쏘을 뿐 영화 끝까지 그 캐릭터의 의미가 확장되거나 부연되지 않고, 결국 존재 이유 없는 역할에 머문것 같습니다. 왠지 신비한 증언자 캐릭터가 있어야 할것 같아서 영화에 들어간 느낌..

허무하게 죽은 착한 서울말 쓰는 군인과 순박한 경상도 출신 군인의 우정, 이를 불용하는 학살의 화신일뿐인 상관, 무능하고 미친 상관.. 군인들 캐릭터도 너무 익숙한 설정으로 다가왔습니다. 더 문제는 이런 익숙함이라도 각 캐릭터의 입체성과 갈등을 더 섬세하게 드러내주면 좋을텐데.. 그런것 없이 그냥 일관되게 평면적이고, 표층적이었어요. 이건 제주도민들의 캐릭터도 매한가지.

 

마치 선과 악은 서로 넘나들 수 없게 이분되어 있고, 그 어떤 설명과 부연과 나름의 정당화 없이 그냥 감독의 권한으로(역사의 권위로?) 그런 이분법은 정해져있으며 이는 영화 내내 변하지 않는구나 싶더군요. 물론 역사적 사건에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부여할 수 없는 건 아니겠죠. 그런데 선과 악의 속성을 파헤치지 않고, 그냥 그런게 있고 이 둘은 서로 대비된다는 데서 논의가 그치는 것은 단순하고 피상적이라 생각합니다.

 

또 가장 최고로 악의 화신인 미국이 영화 앞과 뒤에서 자막으로만 그 존재감이 희미하게 언급될뿐 정작 영화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안해서.. 당황스러웠어요.

개인적으로.. 저에게 지슬은 익숙한 설정의 번복과 역사적 사건에 대한 피상적 접근으로 이 사건이 이토록 비극적이었고, 이토록 선악이 분명했다는 것임을 가르침 받는데 그친 영화였어요. 인간성이나 당대의 사회상에 대한 고찰을 전하기보다는요.

    • 대담하시네요.. 전 오늘 봤는데 하필 오늘(4.3)이라서 리뷰를 미루고(내지는 영원히 안쓰고) 있었어요..
    • 공감합니다. 정길의 정체가 뭐였건 나중에 설명을 들어야만 알 수 있는 설정이라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슬로모션 음악뿐 아니라 포커스와 줌을 사용한 방식도 별로였습니다.

      클리셰라고 무조건 싫어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조악한 클리셰는 싫었어요.
    • 지슬의 이런저런 영화적 한계는 관객들이 영화를 고르기 전에 보통 어느 정도 감안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접어주는 것'을 뛰어넘는 영화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감독이 추구하는 바가 단선적인 것 같아요.
      그래도 음악은 정말 어떻게 해보았으면 했습니다.
      제주도 토속의 음악을 가져다 썼어도 좋았을 텐데.
      무속 악기 같은 게 되게 특이하거든요.
      • 그 한계가 독립영화라서 완성도에 문제가 있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거였음 차라리 나았을 거 같아요. 돈이 문제면 돈이 넉넉하면 해결될 테니까요. 그게 아니라서 더 찜찜했어요.

        분명히 다른 선택이 가능한데도 지금의 그런 서사와 결과물을 취하신듯 보였거든요.
      • 단선적이라는 데 공감해요. 캐릭터도, 서사도 단선적이라 아쉬웠어요. 애초 그것이 감독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리저리 곱씹어볼만한 장면이나 대사나 캐릭터나 이야기구조는 없었던 것 같아요. 배경 이해를 요구하는 것은 있을지언정, 영화 안에서 관객이 자유롭게 움직여 볼 여지가 없었어요.
    • 저도 음악하고 스타일이 다소 과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좀 더 냉정하게 접근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어요. 상황 그 자체가 참혹하기 그지없는데 음악은 지나친 수식에 가까웠습니다.
    • 영상은 좋았는데 장면의 내러티브는 죽고 사운드는 좋았는데 음악은 별로였지요. 선과 악이 이분법 같진않았구요 그냥 토벌하는 군인이나 마을사람 모두 시대의 희생자다 이런 말을 하는거 아닐까요? 서북사투리쓰는 상사 할머니한테 내어미도 빨갱이들한테 죽었다면서, 여튼 이런 내용을 말하는 내러티브가 너무 식상하거나 그러니 좀 뻔하긴하죠.

      근데 영상이나 영화 찍기 방식에서의 날것은 새로운맛이 있는것같아요 카메라 움직임이나 동굴안에서일대일대화씬 같은거보면 놀랍다는 탄식이 터져요, 와 감독이 멋대로하는데 쑈트가 사는구나 이런거?

      결국은 감독의 양면이 잘드러난 나름 괜찮은 수작 정도로 점수를 주고싶네요 저는
      • 서북사투리 쓰는 상사의 어머니 이야기는 지금 기억이 나네요. 영화 보고 나서는 그가 너무 '악인'으로만 묘사되었다는 인상이 강했거든요. 저는 그런 요소들이 영화에서 더 부각이 되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 전반적으로 쓰신 글에 공감합니다만... 몇 가지만 짚으면, (스포일러 경고?)

      1. 감독 인터뷰를 읽은 기억에 따르면... 미국 얘기는 애초부터 신경써서 묘사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실제 제주도민들도 미군은 거의 볼 수 없었던 존재라고 했던 것 같아요. 정치적인 얘기보다 희생자에 대한 제의 내지 추모적 성격이 강한 영화였으니 충돌하는 연출은 아닌 것 같습니다.

      2. 물허벅을 지고 다니는 소년병이 계속 나오는데 그게 제주도 설문대할망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거라고 하더군요. 죽을 끓이다가 솥에 빠져 죽는 얘기라고 했던가;;; 신비한 증언자 느낌으로 받아들이신 거라면 얼추 제대로 보신 것 같기도 합니다.

      3. 저는 무조건적인 선악 구도로 보진 않았습니다. 군인들이 잔악하게 나옵니다만 까라면 까야 하는 사람의 딜레마도 어느 정도는 묘사됐다고 생각합니다. 주민들 중에서도 당장 살려고 배신하는 인물이 나오기도 하고요. 게다가 군인들이나 주민들이나 빨갱이고 뭐고 간에 일단 당장 겨울을 나는 게 다급하기는 마찬가지인 상황이니까요. 제 기억에도 제주도가 영상에서 이렇게 춥고 고달프게 묘사된 적이 꽤 드물죠 아마.

      오멸 감독에 대한 지금의 거장 대접은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이긴 한데, 씨네21의 기사들은 거의 제2의 홍상수를 만난 건가 싶을 정도이더군요. 앞으로 더 두고봐야 할 감독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그래도 단점들에 불구하고 복기할만한 장점도 있었다고 봅니다. <친구> 같은 케이스보다도 이렇게 지역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영화 자체가 드물고, 회화적으로 이미지를 인상적으로 아름답게 꾸민 장면도 있었고요. 기대치를 어느 정도 조절하고 본 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 1. 오히려 그러한 의도였다면 영화 앞뒤의 설명은 지나치게 정치적이지 않았나 싶어요.
        2. 설문대할망 신화는 흥미롭군요. 역시 이런 배경지식이 없어서.. 그 장면이 무슨 의미인가 했어요.
        3. 선악의 대립은 너무 나간 표현일 순 있는데 결국 캐릭터의 피상적 묘사를 비판하고 싶었어요. 가족사의 아픔이 복수심으로 변한 군인의 심정, 살고 싶은 마음에 이웃주민을 배신하는 청년의 마음 등등 복잡다난한 인간심리일텐데 영화에선 가볍게 훑고 넘어갔던 거 같거든요.
    • 사소한 오류를 지적하자면, 우정을 나눈 두 청년은 서울말 쓰는 청년과 인천 출신 청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군인은 성질 괴팍한 상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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