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후기] 9th. 테베를 공격한 7인의 전사

아이스킬로스의 [테베를 공격한 7인의 전사]를 힙합 버전으로 개작한 윌 파워의 [더 세븐]. Photo by Sara Krulwich.

 

 

1. 비극 3부작

 

3월 2일 아홉 번째 희곡모임이 있었습니다. 모임에서 읽고 있는 '그리스 비극'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작가들이 쓴 비극을 말합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매년 디오니소스 축제의 일부로 드라마 콘테스트를 개최했습니다. 수개월 전부터 예심을 거쳐 최종적으로 3인의 비극작가가 각각 3편의 비극과 1편의 사티로스극, 총 12편의 작품을 선보여 경연을 펼쳤습니다. 한 작가가 출품한 3편의 비극은 서로 관계 없는 별개의 작품들이다가 점차 꽉 짜인 3부작 시리즈물로 발전합니다.

 

가령, 지난번 [페르시아인들]은 [피네우스]와 [포트니아이의 글라우코스], 그리고 [불을 붙이는 프로메테우스]라는 사티로스극과 함께 상연되었는데요, [페르시아인들] 외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전해 오는 몇몇 구절들로 미루어보건대 서로 연결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피네우스]는 눈먼 노인 피네우스가 무서운 새떼한테 공격받는 아르고 호 선원들을 구해주는 전설을, [포트니아이의 글라우코스]는 인육을 먹고 발광하는 자기 말들한테 찢겨 죽는 포트니아이 사람 글라우코스 얘기고, [불을 붙이는 프로메테우스]에는 고약과 붕대라는 말이 나오는 걸로 보아 불을 전해 받은 사티로스들이 화상을 입는 내용인듯 합니다. (아르고 호 선원들을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은 아테네인들로, 글라우코스를 크세르크세스로 확대해석해서 3부작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보긴 했습니다.)

 

[테베를 공격한 7인의 전사]는 [스타워즈]나 [대부], [반지의 제왕] 같은 시리즈물처럼 연속성을 지닌 3부작의 마지막 편입니다. 아이스킬로스 프로덕션은 이 3부작으로 기원전 467년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을 거둡니다. 3부작의 나머지 두 편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그리고 사티로스극 [스핑크스]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관계로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소포클레스를 통해 익히 알려진 이야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겁니다. 라이오스가 낳은 자식은 아버지인 그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을 것이며 테베에 재앙을 가져오리라는 아폴론의 신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이오스는 아폴론의 경고를 무시했고, 오이디푸스가 태어났죠. 그 뒷이야기는 다들 아시는 대로입니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안티고네]를 통해 이 설화를 수차례 극화했습니다. 아이스킬로스의 [테베를 공격한 7인의 전사]는 내용상으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직후부터 [안티고네] 직전까지를 커버합니다.

 

 

2. 저주 - 죄책감의 다른 이름?

 

애시당초 라이오스는 왜 저주를 받았을까요? 주석과 신화에 따르면 저주의 시작은 권력다툼으로 테베에서 추방된 왕자 라이오스가 피사의 왕 펠롭스의 궁정에 피신해 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펠롭스에게는 아름다운 어린 아들 크리시포스가 있었대요. 라이오스는 펠롭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크리시포스를 사두마차 모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며 꾀어내 강간하고 교살합니다. 그 벌로 헤라가 테베에 보낸 스핑크스는 그리스어로 '교살자'란 뜻입니다. 크리시포스가 자살한 거라는 얘기도 있는데, 어떤 버전에서든 그의 아버지 펠롭스는 라이오스를 저주하고, 아폴론은 라이오스에게 자식을 갖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저주는 악행 당사자인 라이오스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계속됩니다. 죄를 삼대에 이르도록 묻겠다는 구약의 야훼는 그리스의 복수의 여신들 벤치마킹인가요? 왜들 그러는 걸까요? 인간 유전자풀에 대한 고대인들 나름의 고찰일까요? 라이오스의 뒤틀린 죄책감이 부부관계와 자녀들의 삶을 망가뜨렸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긴 요새는 개인상담보다는 가족상담, 더 나아가 가족사상담까지 한다니까, 그런 면에서 '삼대에 이르는 저주'를 이해해볼 수도.. 있긴 개뿔. 여하간 신들은 오이디푸스의 친부살해가 실현되자 이제는 오이디푸스 아들들의 형제살해 건에 착수합니다.

 

오이디푸스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많은(polys) 다툼(neikos)'이란 뜻의 폴리네이케스와 '명성을 추구하는 자'란 뜻의 에테오클레스. 그들은 오이디푸스가 격정에 못 이겨 두 눈을 뽑고 테베에서 스스로를 추방했을 때, 오이디푸스를 말리지도 지켜주지도 않았습니다. 몰락한 아버지를 여동생에게 맡겨둔 채 그들은 왕권을 두고 싸웠죠. 그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지독한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습니다. "내 유산 갖고 다투다가 서로를 죽여버려라!" 이게 아버지가 아들들한테 남긴 유언입니다. 

 

형제 간의 불화는 번갈아 가며 일 년씩 통치하자던 약속을 에테오클레스가 깨면서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정권이 조금만 불안정해도 내란이 일어나고 주변 도시들의 먹잇감이 되던 시절에 어쩌자고 그런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태숙 연출의 [안티고네]에서는 크레온이 이들 형제의 불화를 배후조종 했음을 암시합니다. 어쨌거나 에테오클레스는 왕위를 폴리네이케스에게 넘겨주지 않았고, 폴리네이케스는 왕권을 되찾기 위해 외국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쳐들어 옵니다. [테베를 공격한 7인의 전사]는 테베가 폴리네이케스와 적들에게 포위된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3. 일곱 개의 성문과 일곱 명의 전사

 

테베에는 일곱 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폴리네이케스는 각각의 성문에 자기가 데려온 전사들을 배치합니다. 저의 의문점. 성문 하나만 뚫으면 될 텐데, 왜 굳이 일곱 개의 성문에 군사를 분산배치 했을까요? 전술적 의미보다는 아이스킬로스가 썰 풀기 위함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썰. 네, 그래요. 이 작품은 제목이 주는 인상과 달리 전투신, 액션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장면은 오직 말, 말, 말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프리스타일 랩 배틀 비슷해요.

 

정찰병이 다급히 달려와 각 성문에 배치된 전사들의 정체와 외모, 언행, 방패문양까지 차례차례 전하면, 에테오클레스가 그에 맞춰 대적할 장수를 하나씩 선정하는 것이 이 극의 주요 볼거리입니다. 옆에서는 테베의 어린 여성들로 구성된 코러스가 미친듯이 신들을 부르짖으며 부들부들 떠는데, 에테오클레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아주 능숙하게 -심지어 약간은 신나보여요- 정찰병과 이러쿵저러쿵 대사를 주고 받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문을 지키는 적장이 누군지 밝혀지기 전까진 말이죠. 그것은 당연히 폴리네이케스였습니다. 친형제가 일곱 번째 문 뒤에 서 있음이 밝혀지자, 이때까지 그토록 침착하고 멋진 일처리를 보여주던 에테오클레스가 갑자기 바보가 됩니다. 아래 표는 에테오클레스와 정찰병의 병정놀이.

 

성문

공격수

공격수 프로필

수비수

수비수 프로필

 프로이토스문

 티데우스

 강둑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전의를 불태움.

 예언자 암피아라오스가 아직 때가 아니라며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자

 욕설을 퍼붓고 있음.

 뽐내기 좋아하고 오만함.

 방패문양 - 달과 별. 방패안쪽에 시끄러운 청동방울.

 멜라니포스

 용의 이에서 솟아난 자(테베 토박이 귀족이란 뜻)의 후손.

 겸손하고 점잖으며 허풍 싫어함.

 용감한 전사.

 네이스 문

 카파네우스

 몸집크고 거친 사내.

 허풍세고 교만이 하늘을 찌름.

 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제우스의 천둥번개도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침.

 (그러나 나중에 테베 성벽 오르다 벼락 맞아 죽음.)

 방패문양 - 횃불 든 남자와 "나는 도시를 불태울 거야"라는 글귀.

 폴리폰토스

 말은 어눌하나 용기는 불같음.

 호감가고 믿음직한 전사.

 엘렉트라 문

 에테오클로스

흥분한 암말들의 고삐를 잡고 빙빙 돌고 있음.

 방패문양 - 사다리를 타고 성탑을 기어오르는 무사.

  메가레우스

 크레온 아들. 용의 이에서 솟아난 자의 후손.

 (귀족가문의 자제가 목숨을 바쳐야

 이 전쟁에서 이긴다는 예언에 자진하여 희생함.)

 옹카 문

 히포메돈

 함성지르며 눈에 살기를 띠고 전장으로 질주함.

 약에 취한 사람처럼 보임.

 방패문양 - 연기를 내뿜는 티폰.

 (티폰은 제우스의 힘줄을 끊어놓은 그리스신화 사상 가장 강력한 괴물.

 그러나 제우스의 벼락에 맞아 산 속에 가둬짐)

 히페르비오스

 방패문양 - 불타는 벼락을 손에 쥔 제우스.

 보레아스 문

 파르테노파이오스

 아탈란테 아들. 미소년. 허풍쟁이.

 창을 신보다 더 공경하고, 제우스를 우습게 여김.

 방패문양 - 테바인을 잡아먹는 스핑크스.

 악토르

 히페르비오스 아우.

 말보다 손이 빠른 자.

 호물레이스문

 암피아라오스

 지혜롭고 훌륭한 전사이자 예언자.

 티데우스를 '인간백정'이라 욕하고, 조국을 침공하는 폴리네이케스 혐오함.

 자신이 이 전쟁에서 죽을 것임을 알기에 더욱 그러함.

 아무런 문양 없는 방패.

 라스테네스

 외국인 싫어함.

 노인의 지혜를 지닌 젊은이.

 매의 눈.

 일곱 번째 문

 폴리네이케스

 자신을 추방한 동생에게 복수하고 나라를 되찾겠다고 조국의 신들께 부르짖음.

 방패문양 - 정의의 여신이 폴리네이케스를 인도함.

 에테오클레스

 "더 이상 운명을 피하지 않겠어." 

 "형제 대 형제로 싸울 거야".

 

표를 보시면 알겠지만, 에테오클레스는 형과의 결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있다면 정찰병과 대진표 짜면서 다섯, 여섯 번째 문쯤 와서는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여섯 번째 문에 암피아라오스가 배치되었다는 보고를 받으면서도, 즉 이제 남은 문은 하나밖에 없으며 그곳에는 폴리네이케스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음에도 여섯 번째 문에 나갈 장수로 자신을 호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일곱 번째 장수로 폴리네이케스의 이름이 정찰병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에테오클레스는 갑자기 아버지 오이디푸스의 이름을 외치며 자신은 신들의 저주를 받았노라고 탄식합니다.  

 

       

4. 자유의지 

 

"꿈에 뮤즈 여신이 저더러 글쓰라고 명령했어요!"라는 말(아이스킬로스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은 '저 와인농장 일 집어치우고 극작가 되고 싶어요'란 뜻이고, 기술부족으로 바다에 배 띄우지 못하는 상황을 "우리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라고 표현하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는 게 좋겠습니다. 운명이니, 저주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에테오클레스의 속마음은 형과 화해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그의 행위는 불가해한 힘에 의해 강요되었다기보다는 자유의지에 따른 결정으로 보입니다. 에테오클레스가 국가 안위를 위해 안정된 왕권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형제를 제거하러 나간 것인지 아니면 형제 간의 해묵은 원한이 폭발하여 충동적으로 뛰쳐 나간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드는 생각은, 아무리 이성적이고 현명한 자라도 한 순간에 자신의 과거에 잡아 먹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극히 드물 거라는 점입니다.     

 

적다 보니 자유롭지 못한 자의 자유의지, 라는 이상한 표현을 한 셈이네요. 다른 분들은 이 극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극은 저주와 운명에 관한 얘기인가요, 자유의지와 선택에 관한 얘기인가요? 소포클레스 식으로 묻자면, 행함의 비극입니까, 당함의 비극입니까? 제 눈에는 나쁜 아버지의 기억을 끝내 떨쳐내지 못하고 형제에 대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어리석은 선택을 한 남자가 보입니다. 헤시오도스의 말처럼 '성격이 운명'일 순 있겠죠. 

 

 

5. 덧붙여진 종결부 - 안티고네

 

형제와의 싸움은 피하라는 코러스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일곱 번째 문으로 향했던 에테오클레스는 결국 폴리네이케스와 함께 시신으로 돌아옵니다. 전령이 등장해 테베의 안전은 지켜졌으나 오이디푸스의 아들들은 서로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는 얘기를 전합니다. 코러스는 형제살해의 비극을 애도하며 극을 마칩니다. 어떠한 화해도, 어떠한 구원도 없는 완전한 파국입니다. 간결하고 암울한 결말.

 

아이스킬로스가 의도했던 대로 극이 그렇게 끝났다면 정말 멋졌을 텐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거기에 100행 정도가 덧붙여진 것입니다. 후대에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붙여서 상연하기 위해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자매가 등장하는 장면을 추가했다고 해요. 아이스킬로스의 이 테베 3부작 중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가 잊혀지고 소실된 것도 나중에 나온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워낙 압도적이라 그런 것 같은데, [테베를 공격한 7인의 전사]마저 그런 굴욕을 겪다니.  

 

덧붙여진 부분은 안티고네 얘기입니다. 테베시 당국자들이 조국을 지킨 에테오클레스만 후히 장사지내고 매국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은 로드킬처럼 들판에 버려두겠다고 하자 안티고네는 반발합니다. 매장 금지는 신들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며, 처음에 약속을 깨트린 건 에테오클레스라는 거죠. 여기서도 안티고네는 역시... 안티고네답습니다. 아 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읽으면서 그녀가 약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안티고네가 폴리네이케스에 대해 근친상간적 애정을 품고 있었다는 해석을 봤습니다. "나는 사랑에 의해 이런 행동을 하는 거에요"란 대사가 있었죠. 자기는 오빠를 사랑하고, 죽어서 오빠 옆에 누울 거란 얘기도요. 반면 약혼자 하이몬 왕자에겐 전혀 관심없고 한 마디도 안 함.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돌아와 그렇게 미쳤던 거고, 정당한 방식으로 애도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우울했던 거란 얘기. 주디스 버틀러.

           

 

6. 코러스 - 전쟁과 여성

 

인상적인 코러스가 등장합니다. 병풍처럼 보이는 여타 코러스들에 비해 이 극의 코러스는 주인공과 팽팽히 대립합니다. 주인공은 코러스한테 단단히 화가 나 있어요. 여기서 코러스는 테베의 젊은 여성들인데 우리의 주인공 에테오클레스가 하필 여성혐오자랍니다. 적들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들어오자 공포에 질린 코러스가 제우스부터 시작해서 포세이돈, 아폴론, 헤라, 아테네, 아르테미스 여신 등등을 부르며 살려달라 애원하는데 에테오클레스가 상당히 같잖아 하면서 신들이 아니라 성벽에 대고 기도하라고, 도시를 구해주는 건 성벽이니까! 라고 한소리 합니다. 그래도 계속 코러스가 신들을 찾아대자 "복종은 성공의 어머니이자 구원의 와이프!"라고 외칩니다. 자기 말 듣고 제발 입닥치고 꺼지라는 소리예요. 나중에는 신들을 막 원망해요. 왜 여자들이란 종족을 지어 함께 살게 하셨냐, 쟤들은 시민의 의무도 다하지 않으면서 괜히 호들갑만 떤다고 엄청 짜증.

 

그런데 코러스들은 나름대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피임도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인구조절이란 전쟁을 통해서나 이뤄졌겠죠. 싸움에서 이긴 쪽은 진 편 여자들의 남편과 아이들을 몰살하고 여자들만 데려와 노예로 삼았습니다. 패전국의 젊은 여성들은 그야말로 성노예나 다름 없었고요.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트로이가 함락되자 네옵톨레모스의 노예로 주어졌는데 그 전에 눈 앞에서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가 살해당하는 걸 지켜봐야 했죠. 피사의 왕과 결혼해 아이들 낳고 잘 살고 있던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어느날 갑자기 쳐들어온 아가멤논에 의해  남편과 아이들을 살해당하고도 그 원수의 아내 노릇을 해야만 했고요. 고대 도시국가 밀레토스에서는 아버지와 남편 혹은 아들을 죽인 철천지원수를 남편으로 삼아야 했던 여인들이 남편과 같이 식사를 하지 않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규율을 만들어 서로 맹세했다고 합니다. 딸들에게도 똑같이 하도록 가르쳤구요. 바빌론의 남자들은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을 때 각자의 가정에서 어머니를 제외하고 단 한 명의 여자만 남겨두고 나머지 여성은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식량 아끼려고. 여자 한 명 남겨놓은 까닭은 식사준비 시키려고.

 

상황이 그러한데 여자들이 성이 함락되느냐 마느냐 하는 순간에 공포에 질리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들도 신한테 기도하는 것 대신 시민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겠죠. 시민권만 주어졌다면. 요즘도 교회와 절마다 여성신도들이 차고 넘치는데 그 시절엔 오죽했겠나 싶습니다. 아이스킬로스는 에테오클레스에게 감정이입하며 대사를 썼을까요, 코러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심정으로 대사를 썼을까요? 어떤 입장이었든 간에 아이스킬로스가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현실을 잘 파악했다는 건 알겠습니다.

 

여성들이 에테오클레스에게 한 방 먹이는 장면도 있습니다. 에테오클레스의 폭언이 끝나자 코러스가 바로 "오이디푸스의 아드님!"이라고 불러버린 겁니다. 오이디푸스. 그 이름만 들으면 그 집안 애들은 죄다 머리 쥐어뜯으며 경기합니다. 곱게 자란 아이들이라 그게 인생 최대의 불행이자 약점이거든요. 뭐, 저만 그렇게 읽은 걸지도 모르지만, 코러스와 에테오클레스의 신경전이 느껴졌습니다.     

 

 

7. 윌 파워

      

힙합으로 그리스 비극을 읊은 [더 세븐]의 연출자 이름은 진짜 Will Power라고 쓰네요. 의지의 힘! 운명은 No? 설마 본명은 아니겠죠. 

아래 동영상은 절반도 못 알아 듣겠지만 들리는 것만 써보자면 대략 이런 얘긴 것 같네요. 어휴, 숨 차. 오역 확률 70%.

 

"[앞부분 건너뛰고] 학교나 대학 동호회 등에 가서 제가 하는 일은 힙합이 어떻게 제게 힘을 주는 도구로 쓰일 수 있는지 전하는 겁니다. 힙합은 강력한 에너지에요. 부정적인 것도 긍정적인 것도 아니에요. 그건 쓰기 나름이죠. 마치 단어들처럼요. 마치 공처럼요. 만약 여러분에게 강하고 자극적인 에너지가 있다면 힙합은 강하고 자극적인 도구가 될 거에요. 만약 여러분이 가진 게 쓰레기라면 힙합하다가 정신나가버리겠죠.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건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에요. 제가 힙합으로 하고 싶은 것은, 저는 힙합아티스트니까요, 젊은 세대들을 오래된 이야기 전통의 보고에 노출시키는 거에요. 그 멋진 고전들 말예요. 서양고전 뿐 아니라 아프리카, 아프로-아메리카, 극동아시아 것들도 좋죠. 나이드신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맥락을 봐주십사 하는 겁니다. 힙합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감안해달라는 말 하는 거 아녜요. 전체 그림을 봐주세요. 자, 이제 프리스타일로 여러분들이 스냅넣고 제가 라임넣어서 솔로를 할  거에요. 제가 인생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뭘 재밌어 하는지 제 스타일로 얘기할게요. 그 다음엔 제가 뒤로 빠질테니 여러분, 거기 여러분, 여러분, 여러분이 앞으로 나오셔서 여러분들의 얘기를 들려주세요. 그 다음엔 다시 앙상블 속으로, 커뮤니티 안으로 들어가시고요. 저는 우리 무대가 이런 식으로 가야 한다고 봐요. 여러분들이 뛰쳐나와 여러분들의 문화와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그 다음 뒤로 빠져서 다른 사람들이 솔로할 때 잘 들어주는 거죠. "           

 

 

 

 

8. 그외

 

-오이디푸스에게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없었습니다. 그를 기른 건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가 아니었으니까요.

 

-크리시포스의 사랑을 놓고 다투다가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를 살해했다는 엉뚱한 설도 있네요. 크리시포스가 한 가문의 종말을 불러올 정도로 미소년이었나 봅니다. 누구보다 그 자신이 미모로 인해 고통받고 절망했겠지만. 

 

-크리시포스를 죽인 건 라이오스가 아니라 왕위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한 그의 이복형제들이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 이복형제들이란 바로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와 그의 동생 티에스테스. 그들은 라이오스가 크리시포스를 겁탈하고 잠들길 기다렸다가 몰래 들어가 라이오스의 칼로 그를 찔렀는데, 크리시포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아버지 펠롭스에게 진범을 말하고 죽었다던가요. 그 일로 인해 이들은 아버지 펠롭스에게 추방당하고 저주를 받는데, 저주 때문일 리는 없겠지만 하여간 아트레우스 일가는 라이오스 왕가 못지 않게 끔찍한 일들에 얽힙니다. 

 

-별 건 아니지만 희곡모임 분들은 오늘 모임에서 읽을 [아가멤논] 참고자료라 생각하고 함 보시길.

: 아트레우스는 아내가 티에스테스와 잔 걸 알고는 조카어린이들을 요리해 티에스테스에게 먹이고, 티에스테스는 죽은 아들들의 복수를 위해 친딸을 강간해(친딸에게서 태어난 자기 아이가 아트레우스에게 복수해준다는 망할 놈의 신탁이 있었음) 아이기스토스를 낳고, 아트레우스는 그 조카딸과 재혼해 누구 아이인지 모른 채 아이기스토스를 아들처럼 기르다가 출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그에게 살해당하고, 아이기스토스는 훗날 의붓형(혹은 사촌형 또는 외숙? 복잡하네요 ) 아가멤논이 트로이에 전쟁나가 있는 사이 아가멤논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와 부부처럼 살면서 아가멤논이 십년만에 귀향한 날 밤 그를 살해하죠. [아가멤논]에서 포로로 잡혀온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의 궁전에 들어서자마자 이 피비린내나는 과거의 환영들을 보게 되고 도살된 어린아이들의 살점이 타는 냄새를 맡습니다. 

  

    • 반가운 후기글 잘 읽고 있습니다. 모임은 조용히 계속되고 있군요^^
      • 후기가 밀려서 그렇지 모임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 역시 덧붙일 말이 없는 후기가... 점점 후기의 완결성이 높아집니다 브루넷님! 우리가 덧글을 안 남기는 건 후기가 이미 완성형이라서예요!

      그래도 조금 더 감상을 말해보자면...
      -저는 에테오클레스가 끝까지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고 봤어요. 오이디푸스에서 안티고네까지 이어진 자기파멸적 충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면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가 차갑고 이성적으로 계획을 세우듯 차근차근 일곱번째 문의 형제와의 결전으로 다가간 근본원인은 따로 있다고요. 형제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더 좋을 게 없겠지만, 이 싸움을 피하면서 얻을 만큼 가치있는 승리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명분이 삶을 지배할 때가 오기 마련이고 그 때에 자기 운명에서 피하면 비겁한 짓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보면, 에테오클레스가 보이는 오만함과 선병질적인 신경질과 까다로움이 잘 이해되는 동시에, 그가 굉장히 냉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아요. 과연 왕권을 손에 넣을 만한 사람이군 싶달까요. 상황을 냉정하게 보면서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동시에 무자비하죠. 권력의 속성에 아주 잘 어울린다는 인상입니다. 둘이 번갈아 통치한다고 정해진 순간부터 그게 유지될 거라 믿는 사람은 없었을 거고, 결국 누가 선빵을 날리느냐의 문제잖아요... 에테오클레스라면 충분히 선빵을 할 만한 머리도 배짱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는 왜 그 모양인지; 펠롭스 왕은 아버지 복도 없더니 자식 복도 지지리 없네요.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 둘이 크리시포스를 살해하는 장면은 칭기스칸이 동생과 함께 이복형제 살해하던 모습도 겹쳐 생각납니다.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남자애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이복형제를 죽이는 공통점 때문이기도 하고... 칭기스칸 전기에 보면 그 살인사건 때의 현장과 심리상태가 손에 잡힐 듯 묘사되어 있던데 알려주신 장면도 확 와닿는 심상이 있어요. 욕심많고 영리한 어린 맹수들의 느낌.

      -7+7 공격수 수비수 표 일목요연하고 좋습니다. 테바이를 지키는 수비측 장수들보다 공격측 장수들이 더 생생하고 매력적이라고 기억은 하고 있었지만... 이건 뮤지컬로 치면 표몰이용 유명 아이돌 7명과 이름없는 신인 7명으로 대진시켜야 할 것 같은 묘사네요;;; 공격수들을 경박하다고 까고 있지만 사실은 작가가 진중한 쪽보단 화려한 걸 쓸 때 신이 나는 체질이었던 걸까요? 입담대결이나 묘사에 공을 들이는 걸 봐도 그렇고요.
      • 우리 이젠 제발 온라인소통 좀 해요ㅋㅋ

        에테오클레스가 굉장히 유능해보인다는데 동의해요. 오이디푸스에 대해 그가 똑똑했고 통치를 잘 했단 얘기는 들었어도 우리가 본 모습은 그가 몰락하던 날부터라 막연했는데, 에테오클레스를 보니까 딱 오이디푸스도 이랬겠구나 싶어요. 날카롭고 말 잘하고 용기있고 자존심도 강하고..아, 자존심 하니까 생각나는데요, 당시는 아무리 무신론자라도 신을 통하지 않고는 말을 할 수가 없던 때라(신성모독자는 있어도 무신론자는 없었을 듯한..) 에테오클레스도 어쩔 수 없이 신을 찾긴 하지만 그래도 꼭 토를 다는 게 웃겼어요. '신들이여, 우리를 구해주소서. 내 말은 그게 서로에게 이익이 될 거란 얘기에요. 번영하는 도시라야 신들을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망하면 우리 당신들한테 제사 못 지낸단 소리죠? 이게 무슨 기도야ㅎㅎ 첫머리에 에테오클레스가 '전쟁에서 이기면 그건 신 덕분이겠지만, 일이 잘못 되면 모든 시민들이 나만 욕할 거요.'란 얘기도 정말 냉소적이잖아요. 그 모든 면면들에서 저는 자꾸 오이디푸스가 스쳐 보였어요. 젊고 오만하고 거의 신처럼 여겨졌던 왕. 그런데 자존심 강하면 오만한 건가요? 쓰다보다 또 생각이 삼천포로 가네요.:-)
      • -적어주신 것을 보니 제가 '형제살해'를 피할 수도 있었던 일, 혹은 마땅히 피했어야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나 봐요. 뒤에 노태우 있는데 끝까지 간 김영삼-김대중 보는 느낌도 좀 있었구요. 그런데 그 대결을 피했다면 테베가 싸움에 승리했더라도 에테오클레스는 겁쟁이,란 꼬리표를 달고 민심 잃어 결국 왕위를 놓쳤을 수도 있겠네요. 게다가 명성에 집착하는 편이라면.. 그의 이름이 왜 '에테오클레스'인지 이제 알겠어요. '폴리네이케스'는 계속 시비를 걸어오고 에테오클레스는 그걸 노련하게 오디세우스처럼 피하는 성격이 아니라 반드시 받아치고 그뿐만 아니라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겠군요. 인간부싯돌 같은 형제.(유모가 힘들었겠군.) 그 정도 권력/돈/명예가 걸린 일이라면 자기 의지로만 멈출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있겠구요. 폴리네이케스 입장에서도 어차피 정권에 부담스러운 존재니까 언제까지나 추방자로,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러느니 차라리 여기서 끝을 보고 싶었을 것도 같네요. 그들의 대결이 이제 좀 이해가 가요.

        -저는 이번 후기 적으면서 라이오스가 자꾸 생각나더라구요. 라이오스와 크리시포스에 관해서도 우리는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상상해볼 수 있잖아요. 혈기왕성한 왕자, 그러나 추방된 왕자, 그 불안감과 억눌린 욕구들. 오이디푸스와 에테오클레스로 짐작해보건대 라이오스의 성격도 대략 그려지고요. 사두마차 모는 법 가르쳐줄게, 에서는 형이 오토바이 타는 법 가르쳐줄게,가 떠오르지 않나요? 못된 이복형들한테 시달리던 크리시포스에게 라이오스는 좋은 형이었을 수도 있죠.
        라이오스는 그 신탁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그 죽음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아름다운 이오카스테 왕비를 맞았어도 늘 불편했을 것 같고요. 오죽하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발목에 구멍뚫어 묶은 뒤 내다버리겠냐고요. 그 잔혹성에서 그가 느낀 죄책감의 크기가 짐작돼요. 그리고 스핑크스. 테베처럼 큰 나라를 다스리다 보면 역병, 굶주림, 가뭄, 전쟁 등 끔찍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건데 그걸 라이오스는 '교살자'란 이름의 괴물이 자기를 벌하러 왔다고 느낀 거잖아요. 흠 좀.. 라이오스 나쁜 놈 맞는데 제가 왜 동정을 느끼죠..

        -아이스킬로스 관련 해설서 보면 '그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작가였습니다.'라고 나오는데, 이젠 과연 그럴까 싶은 의문이 막.. 너무 신나하시잖아요, 이분. 애국심과는 하등 상관없는 날건달 동네깡패 같은 놈들 까려고 쓴 건데 너무 열심히 까다보니 빠는 걸로 보이나?
    • - 후기가 이미 완성형이라서예요! 222222

      - 저도 설사 둘이서 번갈아 가며 나라를 다스리기로 한 합의를 에군도 폴군도 진심으로 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그리고 둘다 당연히 자기가 결국은 왕이 되어야한다고 믿었을 테구요. 왕좌는 하나, 사람은 둘. 에테오클레스가 자신을 상대하러 나왔을 때 폴뤼네이키스가 어떤 반응이었는지 이 작품 속에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저는 폴군도 당연히 에군이 자신을 상대하러 나왔을 거라 생각 했을 거 같아요. 결국 에군이 말하는 그 '저주'라는 것도, '내가 왕좌를 차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자라면 누구든 죽여 버릴 테다.' 를 포장하는 방식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코러스) 걱정하면서 지적하는 형제간의 살육이라는 꺼림직함을 '저주'란 말로 정당화하는 것 뿐, 에초에 이거 이래도 되나? 하는 고민은 없었을 듯해요. (필록테테스의 오디세우스라면 자기 손으로 피를 보고야 말기 보다는 슬그머니 상대를 궁지로 몰거나 남이 죽이도록 했을지도?)

      - 처음으로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이 고전음악같은 스타일을 가지고 있구나,란 생각을 했던 작품이었어요. 전령의 보고와 에케오클레스의 지시는 똑같은 구조를 반복하고, 전쟁이 여자들에게 가져오는 비극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들의 탄식도 (코러스) 눈으로 봐도 비슷한 단락들이 반복되는 게 보일 정도로 비슷합니다. 내용보다 스타일이 주는 쾌감이 신기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소포클레스는 21세기의 눈으로 굳이 뭘 발견하거나 이해해야 할 필요가 거의 없는데, 아이스퀼로스는 뭔가 영 마뜩찮다가 이 작품으로 완전히, 오, 쫌 하는데, 영감,으로 평가가 바뀌었습니다. (근데... 이해는 가지만, 맹장도 아니고... 안티고네 이야기는 왜 이 쪽에다 붙여서는. =_=)

      - 아가멤논도 배역을 나눠 독회를 해서 더 재미가 살아난 것 같은데, 이 작품이야 말로 배역을 갈라 했더라면 좀 더 강렬한 맛이 있을 것 같아요.
      • -사실은 듀게 희곡모임 같은 거 없고 제가 혼자 다 지어서 쓰는 거로 보여요. 다들 이러시기에요.

        -모임분들 대다수가 이들의 대결은 당연한 거고, 나라도 피하지 않고 나갔을 것 같다고 반응하셨죠. 저는 계속 아니, 이렇게 똑똑한 남자가 왜 그깟 집안의 드라마에 휩쓸리나 싶었거든요. 에테오클레스 대사처럼 형제 대 형제인 동시에 왕 대 왕, 적 대 적인 거군요. 체스판 같아요. 연민이 드네요. 오디세우스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진 않은데, 오이디푸스 가족들은 어휴, 질린다 하면서도 자꾸.. 그래서 이들이 비극주인공이 되는 거군요.

        -[페르시아인들] 읽을 때부터 소포클레스랑은 뭔가 확 다르다 싶었는데 그게 코러스가 달라서 그랬던가 봐요. 형식적인 면은 잘 몰라서 자꾸 내용상 뭐가 다르다, 관점이 어떻다 하는 얘기만 했던 것 같아요. [페르시아인들], 특히 뒷부분 크세르크세스가 선창하고 코러스가 떼창하는 부분을 어제처럼 해봤어야 하는데 아깝..

        여러분, 혹시 아이스킬로스 희곡을 모여 읽으실 기회가 있으시다면 꼬옥 배역 나눠 읽어보세요. 주조연 배역들은 두 세명이 나눠서 일인다역으로 읽으시구요, 나머지는 테이블 좌우로 나눠 앉아 좌코러스, 우코러스 해서 떼로 읽어보세요. 아이스킬로스 극에서는 코러스 비중이 높고 배우와 주고받는 대사도 많아서 재밌습니다. 뭔가 규칙적인 음율이 느껴지는데 가령 이런 거에요. 배우 - 좌코러스 1 - 배우 - 우코러스 1 - 배우 - 좌코러스 2 - 배우 - 우코러스 2 - 배우 - 좌코러스 3 - 배우 - 우코러스 3 - 배우 - 좌우코러스1,2- 배우 - 좌우코러스 1,2 - 배우 - 좌우코러스2,3 - 배우 - 좌우코러스2,3 - 배우 - 좌코러스 모두 - 배우 - 우코러스 모두 - 배우 - 좌우코러스 모두 - 배우 - 좌우코러스 모두... 이런 식으로 크레센도로 막 달려가요. 코러스는 좌우 각각 번호가 열개도 넘어요. 매번 그렇게 크게 움직이는 건 아닌데 절정에 이르면 배우 한 명이 코러스 열셋, 열넷도 상대해요. 추가 가운데에서 가만히 있다가 누가 와서 살짝 건드리니까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는데 점점 진폭이 크게 흔들리는 느낌. 아이스킬로스 극들이 대개 처음에는 지루하다가 사건전개 되면서부터는 둥둥둥둥 감정폭이 격해지고 그러다가 절정에 이르러 꽝! 터지고 파국이 오는데 멋집니다.

        -하여간 앞으로 남은 아이스킬로스는 모두 배역 나눠 읽기로 했어요. 두근두근.
    • 잘 읽었습니다. 꾸준하시네요.
      훅 읽다보니 그리스 비극과 비교할만한 다른 지역의 텍스트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져요.
      공통되게 가족간의 막장극, 신과 운명에 의한 비극, 이런 정서가 넘실거릴지.
      • 제가 희곡은 희곡모임에서 읽은 게 다라 잘 모르..

        로마 연극이 그리스극을 거의 고스란히 번안한 다음 그 위에 폭력성과 선정성을 끼얹었다고 들었어요. 극에서 죽는 배역을 죄수에게 주어 공연 중에 진짜로 죽인다든가(어휴).. 그리스비극에서 그런 장면들은 그냥 대사로 처리돼요. 세네카의 [오이디푸스]에는 원작에서 중요치 않았던 예언자의 점치는 장면이 무대 전면에 되게 괴기스럽게 나오구요. 산 동물을 무대 위에서 잡아 피를 낭자하게 뿌려댄다거나 불에 지글지글 굽고 연기피운다든가.. 그리스와 달리 로마에서는 여성도 간혹 무대 위에 올랐다는데 대강 어떤 맥락이었을지 짐작되시죠.

        그런데 지금까지 읽은 것들을 돌이켜보면 그리스비극이 특별히 막장이라기보다는 비극이 소재로 삼고 있는 고대 신화나 설화가 날 것 그대로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스비극은 오히려 원초적인 그리스신화나 서사시를 기원전 5세기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고 보여지구요. 우리한테야 삼천년 전이나 이천오백년 전이나 별 느낌이 없지만, 그리스비극이 전성기를 맞았던 시절은 마라톤전투(그리스 중산층인 중장보병의 승리)와 살라미스해전(사회최하층인 노잡이들이 승리의 주역) 이후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확대되고 문화전반에 계몽주의, 이성주의, 과학주의, 합리주의 등이 퍼지던 시기 같거든요(그냥 제 느낌상.. 저도 잘 몰라요).

        가령 [오이디푸스 왕]이나 [엘렉트라]의 주제가 근친상간이나 불행한 운명 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소재를 가져왔고 그 시절에도 그런 식으로 얄팍하게 신화를 소비하는 게 대세였겠지만, 소포클레스는 그런 관점이 과연 옳은지 질문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최소한 "내가 행한 거냐, 당한 거냐" "운명이냐 의지냐"라는 문제의식을 계속 끌고가죠. 그리스비극에 종종 등장하는 "신탁"은 [맥베스]에 나오는 마녀들의 예언과 그리 다른가요? 그런데 후자의 경우 우리는 맥베스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과 심리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리스비극도 비슷해요. 소포클레스보다 이전 세대고, 보다 종교적이라는 아이스킬로스도 막상 읽어보면 운명극이라는 인상 별로 없어요. 오히려 당대 사회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 느껴지지.

        그리스비극 빅3 작가들은 각자 백여편에 가깝게 작품들을 써댔으니 소재나 주제가 가족막장이나 운명으로 특화되진 않았을 것 같은데, 후세인들이 자꾸 그런 식으로 소비하고 기억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그 수많은 작품 가운데 대표작으로 남은 것들이 어째 오이디푸스, 아가멤논, 메데이아처럼 언뜻 보기엔 자극적인 그런 얘기들.. 그런 작품들마저 막상 읽어보면 그게 다가 아니지만요.
    • 댓글 짧게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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