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 큰내용 없는 묘사인데 기억에 남는 그럴싸한 구절 있으십니까?

비도 줄줄 오고 어째 쓸쓸한 느낌 감도는 주말 저녁이라 한 번 이야기 꺼내 봅니다.


소설에서 별로 큰 내용 없는 묘사인데, 기억에 오래 남고, 멋있다, 표현이 감칠맛난다, 말이 재밌다 싶어서 오래 생각나는 구절 있으십니까?


이런 이야기하면 저는 항상 단박에 떠오르는 게, 먼저


현진건, "운수 좋은 날"에서: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것입니다.


시작 장면인데, 이거 보고 나서, 비가 올 때마다 "추적추적 내린다"라는 말이 괜히 엄청 멋있어 보이고,

가끔 겨울에 눈올 것처럼 어두컴컴하니 구름 울적하니 꼈을 때, "저런게 새침하게 흐린 품"이지...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하게 됩니다.

내용이야, 구성 하며, 구성의 표현하며, 이야기가 드러내는 20세기초 서울 거리의 풍경하며,

뭐 누구나 다 아는 걸작 이고요.


두번째는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에서:

여름장이란 애시당초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이것인데, 역시 첫 부분입니다. 여름날 오후 쯤 후덥지근한데 빨리 그냥 접자 싶은 마음 드는 분위기가 기막히게 표현되는 거 같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은 막판에 너무 억지로 반전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용 전체는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 시작 부분만은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면 알려진 이효석 단편들이 대부분 도입부 묘사가 좋은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특히 이 "여름장이란 애시당초 글러서," 이 부분은 너무 입에 잘 와닿아 감겨서, 여름에 더운 날에 힘들게 거리 걸을 때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입니다.



요즘 소설 중에는 ... 요즘이라고해도 벌써 20년전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만,


듀나, "태평양 횡단 특급"에서:

열차가 아즈텍을 떠난 뒤에도 그의 옆얼굴에는 예의 사람 좋은 미소의 끝자락이 남아 있었다.


입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은 처음 읽었을 때는, 이번에는 좀 쉬어가는 소설이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볼 수록 왜 이렇게 잘쓴것처럼 보일까요.

"태평양 횡단 특급"은 매정하고 냉정한 시각으로 서술되는 이야기가 많다는 평이 주류인 듀나 소설치고,

거기에 대한 반론도 될만한 끈끈한 애정이나 미련 같은 이야기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 더 정이 가는 느낌도 있습니다.


정이 들고, 사랑에 대한 기억도 아련히 남아 있는 느낌을 부정하는 듯 부정하는 듯 하면서도

독자는 다 들여다볼 수 있게 풀어내는 서술이나, 특히 이야기 서술에서 시간 순서를 잘 헤집어 놔서

결말이 해피엔딩처럼 생겼는데도 쓸쓸함이 확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여운도 진하게 남는 것이 참 절묘해 보였습니다.


위 문장은 마지막 말인데, "예의"라든가, "사람 좋은 미소"라든가하는 표현이

이야기의 다른 부분에 비해서는 좀 상투적으로 과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미소의 끝자락"이라는 말도 그렇고.

그런데, 그렇게 좀 마지막에는 약간 오글거림 감수하고 한 번 질러주는 것도

안타깝게 이야기 지켜봐 준 독자에게 한 번 솔직하게 깊게 느낌을 주는 맛이 산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뭐 이렇게 소설에서 유난히 생각나는 부분, 구절 같은 것 혹시 없으신지요.

    • "태평양 횡단 특급"에 실려 있는 "대리살인자" 입니다. 그러고보면 어느새 보라빛향기도 23년(!!)전 노래... 1990년 시점에서 1967년을 보는 것 만큼 옛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 마치 호텔에 있어야 할 모습을 구현한 호텔의 요정 같다고 나는 느꼈다.
      손에 조그마한 금지팡이를 들고 쓱 흔들면, 디즈니 영화처럼 마법의 가루가 흩날리고, 룸키가 나오는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댄스댄스댄스
    • 큰 내용 없는 부분은 아니지만 '성채(하서출판사)'에서 '그녀는 이미 끝나 있었다.'라는 부분이 항상 기억납니다.
      저도 '운수좋은날'의 '새침하게 흐린 품이~' 부분 입에 달라붙더라고요.
      '동백꽃'의 "느이 집에 이거 없지?"는 재밌어서인지 자꾸 생각나고요.
      소설은 아니지만 성석제 '소풍' 중 '껍디기로만 껍디기로만'의 문장들 좋아해요.(묵껍데기는 맛있다. 묵껍데기는 묵집 할머니의 나이 일흔셋 먹은 동생이 손등을 맞아가면서도 훔쳐먹을 정도로 맛있다.)
      적고 보니 다 내용 관련해서 인상적인 부분들 같기도 하네요.ㅠㅠ
    • 1Q84에서 읽은 "차가워도 차갑지 않아도 신은 이곳에 있다." 이 문장이요. 이거 전형적인 중2스러운 멋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중2병스러운 구절 하면야:
      "헤밍웨이라는 사람이 누구이길래?"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훌륭하다고 해줄 때까지 똑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남자지."
      "그러자면 시간이 죽도록 오래 걸리겠군."
    • 작년 팅커테일러솔저스파이 읽을 때 친구와 통화하다가 르카레 표현력이 끝내준다 함들어봐라 하면서 줄친 부분 몇 개 읽어줬는데 친구 반응이 '뭥미' 이래서 내심 실망했던 생각이 나네요.ㅎ 다시 찾아봐도 재밌는데...

      (신나게 떠들고 있는 어떤 인물의 대사들 사이에 나오는 묘사) "그의 날카로운 혀는 자그마한 입술의 가장자리를 재빨리 한 번 핥은 후 풀숲으로 몸을 숨기는 뱀처럼 사라졌다", "마틴데일의 혀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내밀어 입술 주위를 정찰하더니 흔적처럼 희미한 미소를 남기며 사라졌다",

      (어떤 집을 털기 쉬웠다는 것을 설명하며)"그 집의 자물쇠는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저절로 열리는 그런 물건입니다"
      • 오 저도 윗문장 재밌군,했던 기억이 나요.
        • 원문은 모르지만 번역도 참 잘한 것 같아요. 문장이 좋은. 번역 이종인이네요. 르카레 책들이 다 번역 좋았어요. 역자는 다 다른데. 역시 원작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죠.
    • 유명한 문장이긴 하지만, 문장 자체만 놓고 보면 참으로 평범한,



      카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トンネルを通と、そこは雪国であった(터널을 지나니 그곳은 설국이었다)。



      왜인지 울림이 강한 문장이에요.
    • 직접 읽은 건 아니지만, 요즘 일본소설 봇이란 트위터 아이디를 팔로하고 있는데 와닿는 글귀가 많아요.

      <script async src="//platform.twitter.com/widgets.js" charset="utf-8"></script>
    • "아우구스투스가 현관에 나오는데 돼지들이 커다란 방울뱀을 먹고 있었다"
      음음음....방울뱀....
    • 비바람이 몰아치면 꽃도지듯



      안녕만이 인생이네.



      이부세 마스지 - 권주



      사람간에 관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던 싯귀더군요.. 출처가 소설은 아니고 바텐더라는 만화였습니다
      • 원래 당나라시인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죠. 우무릉의 권주란 시입니다. 아래 참조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oyangsung&logNo=10234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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