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에 대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판권版權
1. <법률> 저작권법에 의하여 인정된 재산권의 하나.
도서 출판에 관한 이익을 독점하는 권리로
저작권자가 출판물을 맡은 사람에게 설정한다.
2. <출판> 책의 맨 끝 장에 인쇄 및 발행 날짜,
저작자ㆍ발행자의 주소와 성명 따위를 인쇄하고 인지를 붙인 종이.
책의 판권 페이지에 관한 문의를 몇 번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한번 정리해 두려고 했는데 귀찮다는 핑계로 계속 미루다가
마침 독자 한 분이 댓글로 물어보시기에 이참에 간단히 적어 봅니다.
딱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판권 페이지란
책의 서지사항과 저작 및 출판권에 관해 기록해 둔 면面을 말합니다.
책의 맨 앞이나 맨 뒤에 배치하지요.
그 위치는 출판사가 정합니다.
언젠가 출판 관련 수업 도중에
“판권 페이지는 왜 어떤 책은 앞에 있고 어떤 책은 뒤에 있나요”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영미권 도서는 앞에, 일본어권 도서는 뒤에 있는데,
한국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과거에는 대부분 권말에 판권 페이지를 인쇄했으나
최근 몇 년 사이 권두에 인쇄하는 출판사들도 많아졌습니다.
판권 페이지에는 저작권을 존중하자는 차원에서 저작권자의 이름을 맨 위에,
그 아래로 출판권자와 출판사 주소 ISBN 등이 들어갑니다.
저작권과 출판권을 위해 꼭 필요한 내용 이외에도
발행부수라든가 출판에 참여한 스탭(‘스태프’라고 해야 하지만 입에 잘 붙지 않아서)의 이름을 넣어
출판사의 개성을 드러내는 책들이 많아졌습니다.
바람직한 일이라 사료됩니다.
스탭이 너무 많을 경우 발행인의 이름만 넣기도 하는데,
이는 출판사의 시스템상 책을 만든 인원의 잦은 교체 때문입니다.
즉, 1쇄를 만들었을 때는 홍길동이 책임 편집자였는데
홍길동이 그만두고 나서 2판을 찍었다면 책임 편집자 이름이 바뀌어야 하지요.
하지만 모든 책을 그와 같이 하는 것도 꽤 번거로운 작업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바뀌지 않을 '발행인' 이름만 들어가지요.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세지만 예전에 출판사에 다닐 때 내가 만든 책에 내 이름이 안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어요.
내가 만든 책이란 느낌도 들지 않았고.
그래서 이 다음에 출판사를 차리면 판권 페이지에는 반드시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름을 넣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상황이 어찌 됐건 판권 페이지에는
그 책을 만드는 데 관련 있는 사람들의 이름은 싸그리몽땅탈탈털어 넣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건 그냥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 출판사 분들이 기분 나빠 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여튼, 그건 그렇고
제가 방금 저 위에서 '1쇄'니 ‘2판’이니 하는 용어를 썼는데
'쇄'와 '판'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쇄刷
같은 책의 출간 횟수를 세는 단위.
판版
책을 개정하거나 증보하여 출간한 횟수를 세는 단위. 1판은 초판, 2판은 중판 또는 재판이라고도 한다.
간혹 ‘판’과 ‘쇄’의 개념을 혼동하여 쓰는 분들이 있는데.
간단히 말해 '1판1쇄'로 인쇄한 책을 또 찍기 전에,
책의 내용을 대폭 개정하여 필름을 다시 출력하면 2판이 되는 거고,
내용의 수정 없이 증쇄를 했을 경우는 2쇄가 되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내용을 수정하지도 않았는데) 출간 즉시 재판 돌입! 같은 문구는 잘못된 표현인 거죠.
초판(1판1쇄)을 찍을 때의 제작 부수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출판사가 손익 분기를 고려하여 알아서 찍으면 됩니다.
많이 찍어도 되고 적게 찍어도 상관없어요.
500부가 될 수도 있고, 50,000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증쇄의 경우도 마찬가지.
10,000부를 다시 찍어도 2쇄고 단 100부만 다시 찍어도 2쇄는 그냥 2쇄입니다.
그러니까 쇄가 많다고 그 책이 ‘반드시’ 많이 팔렸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쇄가 많으면 많이 팔린 것처럼 독자들이 느낀다고 여겨서 그랬는지
1쇄, 3쇄, 5쇄 하는 식으로 건너뛰어 2쇄, 4쇄는 생략하고 찍기도 했다고 합니다.
요즘에도 간혹 그런 출판사들이 보이는데.
독자들이 판권 페이지의 ‘쇄’ 부분을 얼마나 주의깊게 보는지도 잘 모르겠군요.
어떠신가요? 쇄를 유심히들 보시나요?
(혹시 대부분 주의 깊게 보는데 나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걸까?).
저야 업자니까 책을 손에 들면 반드시 판권을 먼저 보긴 합니다만.
아무튼 이때 1쇄를 찍고 증쇄할 경우 오탈자나 내용의 변화가 없다면
2쇄를 찍기 전에 판권 페이지만 따로 필름을 출력해야 합니다.
혹은 아래 두 번째 사진과 같이 대수가 딱 떨어지지 않아서
‘돈땡 혹은 돌려찍기’(란 한 장의 필름에 같은 페이지를 두 번 찍는 것)를 할 시에는 이를 감안하여
판권 페이지 필름을 두 장 출력해야 합니다.
(나중에 착각하고 한 장만 출력하기도 한다).
그런 만큼 이게 의외로 번거로운 작업입니다.
위 첫 번째 사진에서 보듯 16페이지 가운데 1페이지만 수정 필름을 출력하여
전체 필름 가운데 판권 페이지 부분에 붙입니다.
지금이야 데이터만 전송하면 각 제작처에서 필름을 갖다주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필름 출력소에서 필름을 받아다가 인쇄소에 직접 갖다줘야 했어요.
아니면 택배로 보내든가(서울에서 일산까지 택배비가 장난 아니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냐면.
쇄 부분에 10 9 8 7 6 5 4 3 2 1 을 쭉 늘어놓고(아래 첫 번째 사진)
증쇄를 할 때 따로 필름을 뽑을 필요 없이 1부터 지워가는 형식(아래 두 번째 사진)으로 만드는 겁니다.
필름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이해가 더 빠를 텐데 필름 상에는 필요 없는 부분을 칼로 긁어내면 인쇄할 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 10 9 8 7 6 5 4 3 2 1 쇄, 를 쭉 늘어놓은 거지요.
2쇄를 찍을 경우 인쇄소에 '1'을 지워주세요, 하고 전화만 하면 되니 퍽 간단합니다.
단, 발행일을 표기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혹시 왜 1 2 3 4 5 6 7 8 9 10 쇄, 가 아니라, 10 9 8 7 6 5 4 3 2 1 쇄, 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셨으리라 봅니다.
왠지 이것조차도 어째서인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그럼 그냥 설명할까.
아니아니 역시 귀찮으니까 관둡니다.
그럼 10까지 다 지우면 어떻게 되나(정확하게는 9까지 지우면 어떻게 되나, 라고 물어야겠지).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됩니까. 판권 페이지 필름을 다시 뽑아야죠.
이번에는 20 19 18 17 16 15 14 13 12 11 쇄... 이렇게.
저는 이런 방식을 어느 영미권 원서의 판권란을 보다가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대관절 이게 뭔가 싶었지만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무릎을 탁 치며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방법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전 고려원 편집장님으로부터
엣날에는 고려원도 그렇게 하다가 관두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해요.
이상, 출판에 대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마칩니다.
덧) 요즘은 CTP (computer to plate) 방식이 상당히 많이 쓰이는데,
즉 필름을 출력하지 않고 데이터를 쏴서 곧바로 인쇄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는 걸로.
뭐 그다지 궁금해할 분도 없을 듯하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이 방식이 최근 선호되는 이유는
책이 장난아니게 안 팔리기 때문이라는 시장 상황과 관계가 깊습니다.
말해 놓고 나니 우울하네요.
돈땡(돌려찍기)에 관해 이해가 안 가시는 분은 이쪽. http://www.booksfear.com/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