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팔순.. 어떤 팔순 '파티'를 꿈꾸시나요 ㅎ

외할머니의 팔순.. 어떤 팔순 '파티'를 꿈꾸시나요 ㅎ


주말에 외할머니의 팔순 잔치가 있어서 전라도로 갑니다.

엄마의 고향은 목포. 아직도 외가댁 식구들은 모두 목포와 광주 근처에 모여 사시죠. 

여섯 자매 중 큰 딸인 엄마만 서울로 시집오셨어요. 

덕분에 다른 다섯 자매와 그 자식들(제 이종사촌들이죠)은 외할머니와 함께 아주 자주 얼굴 보면서 살아왔는데 

저희 가족은 일년에 한두번 보는 신세.. 


외할머니는 곁에서 항상 돌봐주는 딸들보다 멀리 있어서 잘 못 보는 큰딸인 저희 엄마를 늘 조금 더 애틋해 하셨던 것 같아요.

한 번씩 저희 가족이 목포에 오갈 때마다 차 트렁크에 다 들어가지도 못할만큼 생선들과 젓갈, 텃밭에서 직접 키우신 과일, 채소들을 싸주시고 

그래도 자식 둘이 꽤 자랄만큼 나이가 든 엄마 손을 잡고 운전 조심하라고 잔소리 하시면서 몰래 눈물을 훔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요. 


그냥 글 쓴 김에 외할머니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관 정도는 했을 인물이라는 얘기를 꽤 많이 들으신 분이에요. 

그 옛날에 (그러니까 1930년대에 태어나셨네요) 사범학교를 나와서 교사를 하다 

당시 집안에 돈 좀 있으셨으나 곧 여러 사업으로 날리시게 되는 외할아버지를 만나 결혼. 

풀채도 좋으시고 여든이신 지금까지도 어딜가면 미인이시라는 얘기를 들으실 정도예요 ㅎㅎ 

(그러나 저희 엄마가 외할아버지를 닮으시는 바람에 저는 그 유전자를 못 물려받았다는 슬픈 얘기가 있죠 ㅠ)


게다가 5남매 중 큰딸로 카리스마가 대단하셨죠. 

홀어머니가(외증조할머니는 5남매 중 막내가 세살일 때 남편을 6.25에서 잃으신 후 혼자서 다섯 남매를 키우셨죠.. ) 다섯 남매를 키우시는데 맏딸로 일조하셨죠.    

본인도 6자매를 키우시며 그 카리스마는 더욱 증폭되셨고..

외할아버지께서 공무원 퇴직하신 후에는 직접 자영업에 뛰어들어 사업에 소극적이셨던 할아버지 대신 재산도 축적;


여튼 항상 판단력이 뛰어나셔서 동네에서 갈등이 일어나면 

중재는 항상 외할머니의 몫이셨다고 해요. 동네 재판소같은 분위기?

입담도 좋고 일도 잘 하셔서 무슨 일이든 쓱싹쓱싹 해치우시는 분.

- 전 그런 미모와 판단력과 카리스마 모두 물려받지 못한 듯 합니다 ㅜㅠ  


10여년 전에는 몸이 편찮으셔서 저희 친정집에서 1년 정도 생활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 할머니랑 처음으로 이런저런 깊은 얘기들을 많이 나누기도 했죠. 

할머니께 하고 싶으신게 뭐냐고 여쭸더니 


- 얘야, 난 내가 젊으면 꼭 운전을 배우고 싶다

= 운전이요?

- 막 이리저리 다니고 싶은데를 다닐 수 있지 않겠니 

= 지금도 저희가 태워다 드리면 돼죠. 어디 가고 싶으세요? 

- 꼭 어디라서가 아니라. 혼자서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드니 무릎도 아프고 어딜 다니는게 제일 힘들다. 너는 운전도 할 줄 아니 좋겠구나. 


하셨던 게 생각나요. 그 연세에도 자유를 갈망하셨던 거죠. ^^

할머니는 역시 독립적인 여성이셨어..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나요. ㅎ


미인에 성격 좋고 머리도 좋고.. 상당한 스펙;을 갖추셨음에도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그저 '아들 못 낳은 며느리'로 구박받으셨던 분..  

 

실은 엄마 위로 오빠가 있었는데 갓난아기 시절 잘못되셨었나봐요 

덕분에 딸을 줄줄이 여섯이나 낳아보았지만 기대는 번번이 어긋나고 말았죠. 


그러나 지금은 사실 여섯 딸들 덕분에 누구보다 든든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 편이라고 생각되네요.. 

딸들이 다들 어머니라면 끔찍한 효녀들이거든요. 서로 우애도 깊고..


여섯 딸들이 디테일한 갈등은 있어도 기본적으로 서로서로 모두 친한데 

자매가 없는 전 이모들이 서울에 일이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저희 친정에 와서 묵어가고 

엄마는 이모들과 같이 누워서 밤새도록 이런저런 얘기 하고 하는 모습이 참 부러웠어요.      

어떤 얘기도 다이렉트로 할 수 있는 진짜 친한 친구가 다섯명이나 있는거죠. 휴. 


여하간 그래도 할머니는 외롭긴 외로우시겠죠. 

외할아버지가 8년전쯤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혼자 지내신지 꽤 되셨는데

할아버지랑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으셨고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꽤 (사실은 전 인생을 두고) 힘들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관을 내리는 장지에서 "이 나쁜 사람아! 나를 혼자 두고 가면 어쩌라고!" 라면서 우시던 것이 생각나요. 

서로 으르렁대면서도 50여년을 함께 산 부부관계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로구나 했었네요. 


그런 할머니께 큰 손주인 바쁘다는 핑계로 제가 해드린 게 정말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네요. 

작년에는 어버이날에 꽃바구니를 보내긴 했는데.. 올해는 그것도 빼먹었고 ㅜ 


돈도 좀 팡팡 벌었으면 좋은 명품; 선물이라도 해드릴텐데 그럴 돈도 없고 뭐가 좋은건지 잘 알지도 못하고요. 

제가 해드린 거라곤 제일 결혼 안할 것 같던 망나니같던 애가 결혼해서 증손주 안겨드린 것 정도? ^^; 


암튼 외할머니 팔순 잔치는 직계가족들과 외할머니의 오랜 노인정 친구분들 정도만 조촐히 모여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미 직계가족만 해도 30여명.. 이 정도면 이미 조촐함을 넘어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

어쨌든 예전의 저같았으면 외할머니를 위해 동영상도 만들고 했을 텐데  

에효.. 이제 나이들고 애 키우랴 힘드네요.  


선물이라도 해볼까 친정 엄마와 의논해 보고 검색도 해 봤는데

엄마는 됐다고 하시고 딱히 마땅한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고  

곧 외국으로 나갈 예정인데 

컴퓨터를 못하시니 적적할 때 손주들 사진이나 보시라고 전자액자에 사진이나 담아 드릴까  

하는데 과연 얼마나 이용하실지는 미지수네요. 


여튼 덕분에 이번 기회에 외할머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  

제 70이나 80 생일 파티?를 연다면 어떤 모습으로 열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대략 2050년 안팎이 되겠네요. 100세 시대에 나이 80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사회가 되려나요 ㅎ

일제 때 태어나신 외할머니에게 팔순 때 전자액자를 선물하는 손녀의 모습도 상상치 못했던 장면이겠지만 

대체 그때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감도 안 오네요. 

(듀게 유저 주제에 SF를 별로 안 읽어서;;)


그래도 80까지 살게된다면 파티 정도는 제 가족과 진짜 아끼는 친구들 몇몇을 함께 불러 

평생 모아온 베스트 앨범을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2003년까지 그해 최고의 노래를 모은 개인 컴필레이션 음반도 만들고 했었는데.. 음악 들은지도 너무 오래됐네요 흑)

되도록 건강을 유지해서 맛있는 와인도 한잔 하고 놀았으면 좋겠네요! 

- 음 장소는 비포 미드나잇에 나왔던 그리스 정도가 괜찮을 것 같아요 ㅋ

오래오래 술먹고 놀기 위해 몸 관리 진짜 열심히 해야겠네요. -> 오늘의 결론이 되버린 ㅎ 



    • 글 잘 읽었어요! 멋있는 외할머니, 다복한 엄마, 센스있는 손녀시네요.
      노인들의 이야기는 기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터뷰하고 녹음해놓고 풀어서 책 만들어 드리면 좋아하실 거 같아요.

      가족이 그립네요...
      • 앗, 감사합니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기록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동감이요.
        정말 여러번 생각만 했던 내용이긴 한데 할머니 살아 계실 때 녹음하고 책 만들어 드리면 진짜 좋을 것 같네요.
        애니하우님의 가족은 어디에 계신지... 좋은 주말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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