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식을 얼마나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가?

개인이 기억하고 유지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를 상정하고, 그 지식에 일정량의 힘을 꾸준히 쓰지 않았을 때 지식을 잊/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지식을 기억해야 할까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유독 역사에 약해서 역사의 세부 사항은커녕 그 피상적인 전체 형태도 어림 짐작하지 못합니다. 소위, 인문계열에서 국사파와 지리파로 나뉘어 공간에 대한 이해가 뛰어날수록 시간 상의 이해도는 떨어지는 가설 편견-집단을 상정한다면 저는 언제나 지리파였습니다. 이는 중학교 세계사부터 드러난 성정으로 도무지 연도 순으로 된 그 무엇이든 제 머리 속에는 순차 배열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피해갈 수 없는 수학능력평가 때문에, 인생에서 그다지 부딪힐 일 없는 국사를 전심전력으로 머리 속에 집어 넣으려고 노력한 3년 간의 결과도 한 줌 남아있지 않습니다. 한국의 공인 국사책은 국가에서 만들기 때문에 유일무이한 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적어도 8번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고한 역사의 모델을 한 자락도 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게 있어 역사란, 필요할 때 검색하거나 요구되는 영역의 관련 도서를 찾아 읽어 보충하는 정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몇몇 여론조사를 보고 오금이 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를 묻는 지상파 방송국 위주의 방송이 무서워요. 오답이거나 "몰라요"거나 인터넷 상에 캡처가 돌아다니며 영원히 놀림받는 상징이 되고 싶진 않거든요. 또한 제 자신을 통해 경험했듯 국사든 근현대사든 우리나라의 필수 교육에 있어봐야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 때 그 때 검색해서 참고할 수 있는 확실한 검증을 거친 참고자료(레퍼런스)나 접근이 간편하고 공인된 영역을 통해 제공하기나 했으면 싶습니다. 어디 무인도에 떨어져서 한국인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어 역사서를 집필할 일이 없는 이상 그 지식들을 힘써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각각의 역사사료를 기반으로, 그 사료에 대한 가치판단을 어떤 논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느냐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 후에 나오는 개념과 이야기들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도무지 어떤 식으로 무엇을 위해 꺼내는지 저도 모릅니다. 사실 전술한 것들은 생각나는대로 적다보니 갈길 모르고 여기 저기로 뻗어나가는데 아무래도 본론과는 별 관계 없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 지 몰라서 주저리 거렸는데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생뚱맞긴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개인의 지식 영역입니다.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보를 기억합니다. 보시다시피 자신이 볼 수 없는 영역은 관측이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그리고 지식 영역을 가르는 2가지 방법입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지식은 아주 여러가지 기준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생각했을 때 중요한 것으로 나눠봤습니다. 여기서 유심히 봐야 할 것은 관측 불능 영역과 내가 모르는 것 영역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왼쪽의 그림 상에서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모르는 것]으로 나눠져 있지만, 저 흰색 영역은 [나의 지식]이며 [[내가 아는 것]을 내가 앎]과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앎]으로 나눠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 자체를 몰라야만 진정으로 모르는 것이며, 그 지식이야말로 관측 불가능한 검은 공간에 놓여질 수 있습니다. 왼쪽과 마찬가지로 [남이 아는 것]과 [남이 모르는 것]에 대해 내가 (사실은) 알고 있는 영역으로 나눠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이 두 기준을 동시에 나타내면,



이런 형태가 됩니다. 이해하기 쉽고, 표기하기 간단하게 O와 X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앞의 OX는 나, 뒤의 OX는 남에 대한 앎 기준입니다. OO는 [나도 알고 남도 안다]고 내가 인식하는 것입니다. 즉, 서로 대화할 때 자신의 입장에서 전제와 함의로 쓰이는 것들은 상징이며, 그것들은 남도 알고 나도 안다는 나 자신의 믿음에 입각해서 쓰입니다. 나는 알지만 남들은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 굴러다니는 이형의 상상들, 남에게 언급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할 감정과 논리들, 고도로 복잡성을 띄는 학문 영역들, 거의 대부분의 주관 체험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서로가 모른다고 으레 생각하는, OO와 역행하는 상식이 있습니다. 예컨데 미래라던가, 물리세계에서 관측이 불가능한 영역들은 나도, 남도 모른다고 우리는 인식합니다. 마지막으로 라캉에게서 이름을 빌려오지 않고, 제 멋대로 이름붙인 [진료계]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일상 생활에서 [나는 모르지만 남은 아는 것을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진료가 가장 알기 쉬운 예가 아닌가 싶어 붙였습니다. 의사들을 통해 우리는 "내 자신"에 대해 나는 모르지만 남이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괴이함을 경험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불편함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현실계에 속하는 지식이 상징계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진료계와 상상계 둘 중 하나를 거쳐야 하는데 상상계를 거칠 경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진료계를 거칠 경우 더 없이 고통스러워하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현회와 같은 [나]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설명꾼]이 흥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번의 고치는 비용에 대해 아까워하는 이유도 XO가 중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OO상징/상식은 남이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주관자들이며, 여기서 죽기 전까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은 이후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누구도 다시 돌아와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관측 불가능 영역에 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남] 사이에 어떠한 통로도 없습니다. 그림에서는 동일한 십자+ 형태로 그려져 있으나, 서로의 영역이 겹친다고 아무도 특정지을 수 없습니다. 즉, [나도 알고 남도 아는] 것에 대해서 남도 똑같이 그 영역을 [나도 알고 남도 안다]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당연히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징계 뿐만 아니라 다른 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이해의 형태라면 나의 OX와 남의 XO는 동일해야 합니다. [나]의 [나는 알고 남은 모른다] 생각하는 영역과 [남]의 [나는 모르고 남은 안다]라 생각하는 영역 말이지요. 이것이 거의 겹쳐지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정체성과 그 이외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남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라고 말하길 좋아하며, [나는 그것에 대해서 모른다]라고 말하길 싫어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영역의 괴리가 어떤걸 뜻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게 분명한 것은 [남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에 대해 나는 모르는 것]에 대한 투쟁이 가상과 현실에서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 이외에 모두 [남들]이기 때문에 세계의 인식지평은 [나]를 중심으로 정렬하는게 보기 좋습니다. 나 이외의 남은 다수이기 때문에 남을 중심으로 그렸다간  2차원 그래프에서 감당할 수 없는 형태가 될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상식의 형태, [나도 알고 남도 아는 것을 내가 앎]과 [나도 알고 남도 아는 것을 남이 앎]이 겹치는 부분은 왼쪽 위의 저렇게나 작은 부분입니다. OOOO. 우리는 상식을 세계 총체의 자아에게 요구하지만, 그것은 지식 전체에 있어 매우 좁은 구간입니다. 보시다시피 모두가 동시에 완결 무결하게 앎은 아주 좁은 곳에서 수반되며, 그 이외의 논란거리들이 훨씬 많은 영역을 차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을 [알]고, 무지의 앎을 서로에게 고백하고 인지함으로서 남이 나와는 달리 더 선행하여 아는 부분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세계의 상식을 빠르게 늘려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 글이 잘 이해되지 않으나 전에 했던 고민과 비슷한 것 같아 적어 봅니다.
      모든 공부를 연구방법론의 연장선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이 유일한 해결이 아닐까요.
      역사문제도 그렇고요.
    • 선인장3_ 제 개념에 대해서 누군가 이해를 바라고 설명하는 걸 거의 포기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건 글로 써내면서 설명을 만들어보며 개념을 [써 보는] 것 뿐이죠. 남에게 나 자신의 상식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집단과 개인간의 표피적인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데 그에 대한 반발 중 하나로 이 개념을 써 보려고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규교육에서 연구방법론이 가볍게 넘어간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긴 합니다. 적어도 이공계통은 실험설계 때문에 피부로 절감하긴 하겠습니다만..

      호야야_ '들어낸'도 아니고, '들어난'을 쓰고 싶어서 이번에는 '들어난'에 맞는 문장을 만들었다 생각했는데 완전 아니네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건지.
    • 각 영역에 키배뜨는 사람들간의 반목을 대입해보니 묘하게 재미있네요

      즐거운 글 잘 읽었습니다.
    • 전 다른의미로다가..

      머리가.나쁜데.이미지로기억해요.

      비슷한거 같은거 뉘앙스.분위기등 기가막히게 잘 캐치해요.

      그래서그런지 늘 대강이예요.

      모든 기억이 이미지화되어 저장되기 때문에

      풍경, 분위기로 길을 기억하거나 해요.
      • 제말은 그래서 제가.. 역사도 지리도기억을 못한단거죠..
    • 흥미로운 생각에 "진실/진리" 변수를 하나 더하자면.
      "내가 아는것" 이 두개로 나눠질수도 있겠다 생각합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모르는것" 그리고 "내가 아는것"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는것" - 진실을 틀리게 알고 있는것이죠. 겉에서야 내가 아는것으로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사실은 내가 모르는것으로 들어가야 하는것들이지요. 또 이런식으로 생각하자면 "내가 알고 남도 아는것" 또한 같은 방식으로 더 쪼개질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남도 아는것",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고 남은 아는것", "내가 알고 남도 안다고 생각하지만 남은 모르는것" 그리고 "나나 남이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두 모르는것" 이런식으로.

      이렇게 생각해보니 상식은 훨씬 더 작아지겠네요.

      흠미로운글 잘 읽었습니다.
    • ripa_ 이 글에서 설명을 하지 않은 4자리 2진수 (앞의 자리가 뒤의 자리의 10배를 뜻하진 않지만..), OOOO ~ XXXX 사이값들이 몇몇 다툼들의 꽤 적절한 이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직 몇 개 값 빼고는 그리 해석을 붙일만하지 못 해서 잘 모르겠지만요.

      익명요_ 뇌과학이 발전하고 있는지라, 인지심리학 개통의 철학적인 접근이 얼마나 학문적으로 유의미한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감을 바탕으로 사고의 종류를 구분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히 그 중에서 큰 계파가 시각과 청각이 아닐까 싶은데, 이미지 사고과정은 시각-사고가 아닐까요. 하여간에 좌우뇌의 시간과 공간 분할 사고라는게 뇌량을 포함하고도 어떤 변별적인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Neo_ 아느냐 모르느냐, 와 옳은가 그른가는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보 인지가 가치판단보다 선행되기 때문에 일단은 진리치는 제외했습니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모르는 것]이란 것은 [모르는 것]과 [안다고 생각한 것]의 혼용, 특히 안다고 생각한 [것]에서의 대명사격 정의가 존재하므로 제가 정의하고 있는 [앎]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기준점, 예컨대 "내가 알고 남도 안다고 생각하지만 남은 모르는 것"에서 [남은 모르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주관자의 설정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제 인식지평 하에서는 모든 이에게 타자인 객관자를 따로 설정하지 않았고, 그런고로 인간-관찰자를 제외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판단을 해야 판단자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Neo님께서 말씀하신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더한다면 이보다 더 좁은 영역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진리치에 대한 다툼은 현대해체주의와 상대주의 등으로 많이 희석된 감이 있어 케바케 등으로 알 수 있듯 서로 이해의 기반을 다진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 1. 진리치를 제외하면 답이 틀리던 맞던 [앎]으로 넣을수 있겠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2. [모르는것] = [틀린답을 알고 있는것] 의 관계정의가 궁금합니다.
      물론 위의 2번 역시 진리치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경계가 모호해서 말입니다.
      2번이 정의가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서 위의 [모르는것] 의 검은색부분이 전혀 다른색으로 바뀔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1. '앎' 혹은 '지식'의 정의로 시작하셨어야 할 듯.

      2. Neo가 언급한 것 처럼, 본문의 '상식'은 대단히 협소한 개념. '공리'에 가깝게 보이는군요.

      3. 관련하여, 재미있는 현상은 '잘못 알다'죠. 편견, 착각, 오해 따위.
    • Neo_ [모르는 것]과 [틀린 답을 알고 있는것]의 관계 정의는, [나]의 판단을 기반으로 합니다. 개인의 정보 인식 범위를 추상화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제 모델은 유아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인지하고 있는 것과 파악하고 있는 것을 구분했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식 지평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인식 - 어떤 정보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 - 이고, 인식 지평 내의 모르는 것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틀린 탑]과 함께 [알고 있는 것]이 동시에 서술되러면 [틀린 답]에 대해 남이 정의하거나 자기가 정의내려야 합니다. 남은 틀렸다고 알지만 자신은 틀렸다고 모를 경우 그저 아는 것이며, 자신이 틀린걸 안다면 [틀린 답]이란 걸 아는게 됩니다.

      타락씨_ 가장 마지막 표의 정의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설명이어서 구멍투성이입니다. 임의적인 제 앎의 정의는 어떤 것에 대한 인지/인식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저 대명사격 단어를 자신이 창조하든, 아니면 이미지로 기억하든 최소한의 인지를 앎으로 두고 있습니다.

      2. 제가 설정한 상식이 공리와 다른 점은, 서로가 합의하지 않고 이미 세계 자체에서 향유되었다는 거죠.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전제되는 형태의 상식입니다. 우연한 일치로 선험적으로 동일한 영역에 위치한 상식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양쪽의 OO** / **OO로 확산되는 타자의 [서로가 함의했다고 생각한] 상식과 자아의 [서로가 합의했다고 생각한] 상식이 서로 말을 맞춰봄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분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철저한 유아론이죠.

      3. [잘못] [알다]는 제가 대괄호를 쳤듯, 두 자아의 오지랖에서 비롯되는 말이죠. 알다는 타자의 것이며, 잘못은 자아의 것이라 편견, 착각, 오해 그 등의 XOXO, OXOX식의 정체성 대결이겠죠. 특히 (제 언어 정의에서의) 상징계를 상상계적인 범위에서 사용하려면 그만큼의 논리나 정서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에게 "잘못 알고 있다"라고 [진료]하려면 상대가 자신이 남보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아는 것부터 시작해야할테니까요.
    • 재미있는 글이네요.

      이글에 대해서 앞에 분들이 제기한 물음을 조금 심화시켜서 보겠습니다.

      1. 앎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매우 포괄적이고 넓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앎, 혹은 지식 자체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인식론의 주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서 암묵적 지식이나 수행적 지식은 앎의 영역에 속하나요?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안다'와 나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안다'라는 앎에 대한 두 진술은 동일한 앎을 지칭하는 것인가요?


      2. 앎과 진리에 대한 해명 또한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함은 앎의 대상에 대한 참임을 혹은 거짓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그 한 본질이라는 것이 직관적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르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앎이라고 할 수 있나요?

      3. 첫번째 도식에서 관측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불분명합니다. 관측을 단지 직접적인 감각기관을 통한 감각자료로 한정 하는 것인지,
      간접적인 지식을 포함하는 것인지, 아니면 좁은 의미에서 경험과학적인 검증 가능한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네요. 이 각각의 관측이
      지식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무엇이 가장 근본적인 근거로서 제시될 수 있는가는 서양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아닌가요?

      4. 개인적으로는 개념들에 대한 정의가 매우 불분명하고, 자의적이어서 결론은 좋은게 좋은 거다라는 수준의 결론 밖에는 도출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타인의 앎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의 문제, 실은 타인이 좀비가(모든 외적인 모습과 반응은 우리와 같지만,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의 문제 조차도 그리 쉽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 1. 자전거와 특수 상대성 이론은, 신체 기억과 정신 기억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도 말했듯 (아직 인류 총체의 머리 속에서 인지하는 그 구상 형태에 대해 구체적인 일반/평균 해석이 없으므로) 자신의 인지를 끌어낼 수 있는가가 주 요점입니다. 내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생각]이 무엇인지 공리적으로 정의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해 물었을 때 안다/모른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아니면 머리 속으로 무심히 안다라고 생각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자전거의 경우, 자전거를 타는 법을 '내가 알고 있다' 생각하는가 생각하지 않는가가 중요하지 몸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기억하나 정신적으로 잊었다면 그것은 모른다, 또는 관측 불가능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동일한 앎을 지칭하는게 아니며, 어디에 (신체/내적 자각) 기반을 하는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우리가 최초로 경험하는 감각|오감 세계는 참/거짓을 구분해주지 않습니다. 가치 판단은 참/거짓에 대한 논리를 배우고 나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것을 제외하는게 더 깔끔하다 생각합니다.

      3. 관측 불가능 영역 개념은 우주의 관측 불가능 영역에서 따왔습니다. 빛이 그 테두리에서 시작하여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는 영역, 즉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단위가 발산하였으나 수렴하지 않는 영역, 한계점이란 오마쥬로 이름 붙였습니다. 즉 관측 불가능 영역이라는 표현은 문학적인 표현이고, 그 영역을 채우고 있는 검은 색은 인지 바깥의 영역, 즉 그 유무 자체에 대해 인지조차 못하는 무엇들로 채워진 영역입니다. 우리가 한번도 말하지 않았거나, 생각하지 않아야 되는 것들입니다. 즉, 막 태어난 아기에게 있어 산타클로스 같은 정보입니다.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없는 정보의 무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4. 아쉽게도 유일하게 체험/관찰 가능한 자신을 기준으로 남의 내부를 상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오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굳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가 남과 같다면' '남이 나와 같다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그리고 메타-앎과 메타-모름에서부터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으면 세계의 틀을 빠르게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써 봤습니다. 무언가를 아는 것, 안다고 해서 우월하거나 모른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하며 서로가 특정 층위의 위상 때문에 정서적으로 멀어지게 만드는 형태라면 변화는 더 멀지 않을까 싶어 듬성한 논리로 구축해봤습니다. 저도 "[나]와 [남] 사이에 어떠한 통로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서로의 정체에 대해 동일하다는 믿음에서부터 시작해야겠죠.

      그리고 제가 구축한 가설 혹은 탁상론이 자의적인 것은 당연합니다.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니까요. 이런 것을 쓰면서 제 1 조건, 생각하는 자신 하나만으로도 사적 형태의 철학을 누구든 부끄러워하지 않고 조립/자립 발전시켜볼만하다는 것을 말해보고도 싶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 1. 안다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이 모호하다면, 그것을 안다/모른다고 대답가능함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는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에 대해서 안다, 혹은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더 많은 지식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까? 자전거의 사례를 들자면, 우리가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머리로는 알지 못해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몸으로는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경우에 더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관측 불가능의 영역이라는 설명은 납득하기 힘드네요. 이 논의의 기본적인 순환은 안다라는 동사와 생각하다르는 동사를 구분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 같지 않나요? 안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좀더 먹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대상에 대한 인식 가능성에 대한 사유가능성이 세계에 대한 관측의 한계를 지정한다고 할 때, 무언가 세계를 겉도는 것이 발생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왜 이중적인 구분이 필요한가요?

        2. 최초의 감각 경험은 참 거짓을 하나 제시해 주지요. 바로, 이것을 내가 지금 느끼는 것 자체는 참이라는 사실이요. 그래서 우리는 환영에 속을 지라도, 환영에 대한 감각 자체에는 속을 수가 없지요.
        가치평가는 논리가 없이도 가능합니다. 갓난아기들도, 맛난 것은 맛나고 더 이쁜 것은 더 이쁘다는 판단을 내릴 수가 있지요. 가치평가가 항상 규범성을 가지거나 논리 이후에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3. 인식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하기에 하겠지요. 칸트적으로 말하면 물자체가 그럴터이고요. 그것을 인간의 주어진 한계 조건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1단계의 내가 알고 있음과 없음조차도 모르는 2단계의 무지를
        가정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조차도 못한다라는 논의는 실은 안다라는 동사에 대한 부정확하고 불성실한 정의에 기반한 말장난은 아닐까요?

        4. 유일하게 관찰 가능한 자아에서 기반하는 내성철학의 선구자인 데카르트도 다른 인간들이 그저 자동인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를 꽤 고민했지요. 상대방이 나와 동일하다는 믿음이 하나의 전제라면,
        상대방의 앎이 나의 앎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과 일정한 갈등을 빚겠지요. 왜 인간의 인식의 구조는 보편적이며, 그 내용은 개별적인가를 설명하는 틀이 제가 보기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 잔인한오후/
      1. 본문은 세계를 주체의 인식에 포착된 관념적 세계와 그 외부로 분할, 또 그 관념적 세계인 의식을 '앎'과 그 여집합으로 분할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여기서 '앎'의 정의가 [어떤 것에 대한 인지/인식]에 그친다면, '앎'과 그 여집합의 분할이 무의미/불가능하죠.

      2. '공리'를 언급한 이유는 그 '상식'이 (공리계와 비슷한 상식계라는 개념을 도입하자면, 그 안에서는, 그리고 그 안에서만) 항상 참이라 전제되기 때문.
      '상식'의 '선험성'이 '보편성'을 담보한다면 서로 다른 상식의 충돌이란 사태가 불가능해 보이고,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상식'으로 성립할 수 없을 것 같군요.

      3. '잘못 알았다'/'착각했다'는 자인은 흔하게 접할 수 있죠. '과거의 자신을 타자로 대상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텐데, 글쎄요, 별 의미없어 보이는군요.
      마지막 문장의 [진료]개념까지 끌어오게 되면.. 타자인 과거의 자신이 스스로의 무지를 자인하는 일은 불가능한데, 그렇다면 현재의 나에게 '내가 잘못 알았다'는 자인이 불가능할까요? :)
    • 타락씨_ 1. [어떤 것에 대한 인지/인식]은 제가 상정한 앎의 가장 얇은, 최소 단위입니다. 무언가를 인지해서만 분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기질이 유기질을 상상할 수 없고, 식물이 동물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현재에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을 미리 구분해놓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제가 그린 그림은 움직이지 않으나, 실세계는 타락씨님의 3번 문항처럼 동적이죠. 정적인 상황을 놓고 관념화했지만, 동적인 상황도 고려해야 합니다. 가장 첫 번째 그림부터 마지막 그림까지, 움직이지 않는 영역은 없습니다. 당연히 저 상태로 놓고 보면 그 형태 그대로 굳어 완결성을 유지하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죠. 어떻게 될지 저도 생각해보진 않아 언급하진 않았지만, 세계의 인식 지평에서 각각의 영역이 다른 영역으로 변화, 발산, 수렴하는 상황은 생각해봤습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지식의 현실계 > 상상계 > 상징계나 현실계 > 진료계 > 상징계로의 이동은 동적 상태에서만 가능하겠죠. (또한 그러한 이동은 세계의 자아에 있어 서로 옳지 않게 겹쳐지는 부분에서 강하게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세계나 자아의 하얀 동그라미 자체도 제 글의 맨 위에 언급했듯 꾸준히 힘을 부여하는 부분은 유지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잃/잊어 소멸되겠죠. 즉, 제 자아 세계는 현재를 기반하고 있고, 세계 지평도 마찬가지 입니다. 죽어버리면 탈락이에요.)

      그리고 공리와 (제 상정의) 상식의 차이점 하나 더 알게 되었군요. 제게 있어 상식이란 서로가 [동시에 알]고 있는 것일 뿐, 그게 옳다거나 그르다거나와는 관계 없습니다. 즉, 서로가 A라고 알고 있는 (AOAOAOAO) 형태를 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요구하는 민족주의식 상식이란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3. 잠시 잊고 있었는데 '과거'의 자신을 언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타락씨님께서 설명해주셨듯, 그것은 동적인 상황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 오메가3_ 저도 위에서 말했듯, [인지하고 있는 것과 파악하고 있는 것을 구분했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왜 앎과 생각함에 대해 집작하냐면, 서로가 동일한 가치/값/사실에 대해 알고 있을 경우에 대화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때의 대화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XXOO와 OOXX와 같이, 난 나와 남이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남은 나와 남이 더 모르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키보드 배틀이 일어날 경우, 얼른 그에 대한 외적 논리의 구조 형태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면, "알고 보니까 내가 님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나도 몰랐고 님도 모르고 계셨네요"라고 말할 수 있거나, "알고 보니까 님이 제가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요"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다는 것은 앎이라는 최소 단위에서 회로도를 덧붙여 몇 단계의 수행을 하는게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맨 처음처럼, 무언가를 지식으로써 아는 것보다 몇 가지의 사실이 주어질 경우 그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게 아닌가, 함으로 글의 제목 [우리는 지식을 얼마나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인 최소 지혜(라고 불리는 논리 계산)를 짊어지는게 가볍겠다 싶었습니다. 또한 모르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해 그것은 그저 지식일 뿐, 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상 상황을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자의적인 목표를 가진 인식체계 구조였기 때문에 겉돈다고 생각합니다.

      2. 그에 대해선 꽤 논란의 소지가 있는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먼저인지 누가 판단하거나 실험할 수 있나요? 저는 가정할 뿐입니다. 인식이 판단에 앞서는지, 판단이 인식에 앞서는지는 수 많은 철학자들을 괴롭혔고 이제는 뇌과학 등으로 그 증명을 넘겼다고 생각하며, 저는 그 분야에 대해 무지합니다.

      3. 2중이라고 하시는데 저는 그 둘의 차이에 이름을 붙여야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안다라는 동사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 한정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거겠죠. 그리고 굳이 그 영역을 나눠 상정하는 이유는 세계의 인식 지평 부분에서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의 지평선에 대해 구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인구 수를 바탕으로 (살아있는 인간) 각각의 인식 지평을 거대하게 그려내고 그것이 꿈틀꿈틀대며 어느 방향으로는 커지고 어느 방향으로 작아지는 것을 생각할 때, 누구도 몰랐던 부분이 어떤 초기 발견자에 대해서 인식의 영역(XXOX)으로 들어오는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귀찮아서 표기 안했지만 [남]의 관측 불가능 영역과 [나]의 관측 가능 영역의 갭 부분도 분명히 들어가야 오류가 없겠죠.

      4.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자가 보편성을 띄는 것은 아닙니다. 잘 읽을 수 있도록 거의 동등하게 4분할한 것 뿐이지 실질 세계에서의 비중은 어떻게 생겼을지 저는 모르죠. 지식을 나눌 수 있는 많은 방법 중에 2가지를 양 쪽에 동등하게 사용했다는 결과일 뿐이지 이것으로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요즈음의 영미권에서는 인식적으로 다른 논쟁자들 사이의 논쟁보다 오히려 인식적으로 대등한 논쟁자들사이의 논쟁에 대한 철학적인 해명작업이 활발합니다.

        시간이 나시면 peer disagreement와 higher order evidence관련한 문헌들을 읽어보시길.
    • 오메가3_ 지식이 빈약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방향까지 귀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식적으로 다른/동일한 논쟁자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어 자체에서 오독할 수 있는 직관이 매우 흥미롭군요.
    • 잔인한 오후/시간이 나시면, 이 논문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fas-philosophy.rutgers.edu/goldman/SeminarFall2007/November%207th/Kelly%20-%20Peer%20Disagreement%20and%20Higher%20Order%20Evidence.pdf
    • 잔인한오후님이나 오메가3님 타락님들, 댓글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른 비슷한 주제도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보시면 또하나의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나올것 같긴한데 말이죠.
    • 오메가3_ 영어눈은 까막눈이지만 가능한 만큼 읽어보겠습니다. 이 분들이 그래프나 그림 좋아하시면 좋을텐데..

      Neo_ 저도(혹시나, 또는, 저만)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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