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없는 친절

저녁 귀갓길에 언짢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는 분께 빌릴 물건이 있어서 이대에 들려야 했어요.

이대 지하철에서 개찰구까지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진짜 어마어마하게 길죠.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짧은 계단도 손잡이를 붙들고 다니는 저한테는 진짜 공포스러운 높이;

제 앞에는 너댓 살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와 보호자로 보이는 할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빨리 내릴 시간이 오기만을 고대하며 벌벌 떨고 있었는데

까불거리던 그 아이와 할머니가 저에게로 떨어지셨어요.

저는 체격이 있는 편이고

아이와 할머니는 자그마하셨고

무엇보다 제가 손잡이를 꼭 잡고 있었기 때문에

셋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둘을 몸으로 막은 저도 뒤로 휘청거리기는 했지만요.

뒤를 보고 떨어졌다면 굴렀을 거리를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전... 할머니가 제게 당연히 사과하실 줄 알았어요.

아이한테도 주의를 주실 거라고 생각했죠.

근데 그냥 어이쿠 하고 바로 서시더니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 걸어가시더군요.

그래서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저한테 사과 안하시냐고요.

그랬더니 귀찮은 말투로 <저런, 미안해요> 하고 그냥 가시려고 하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그리고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바로 무릎 꿇고 아이를 잡아서 야단을 쳤어요.

방금 네가 한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아느냐. 너랑 할머니랑 나랑 셋이서 저 끝까지 떨어졌다면 어쩔 뻔 했느냐.

앞으로 에스컬레이터에서는 절대로 위험한 행동 하지 말아라.

그제서야 할머니께서 <너 혼날 줄 알았다> 이러면서 애를 데리고 도망가시더라고요.

 

전 다리랑 손이 떨려서 한참 지하철 벤치에 주저 앉아 있다가 겨우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떨어지던 아이랑 할머니를 막은 순간 느꼈던 다행이다 라는 생각에 대해서 잠시 후회했어요.

그건 가치없는 친절이었어요. 앞으로 똑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제가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당분간 이대에 갈 때는 버스만 타야겠어요. 그 에스컬레이터를 또 탈 엄두가 당분간은 안날 거 같네요.

 

 

 

 

 

    • 예전에 철로에 아이 떨어진거 구해주다가 본인 다리가 절단이 난 철도원이 있었죠.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있었는데도 그 애미는 애만 싹 데리고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죠. 저도 처음에 좋게 좋게 생각해서 경황이 없어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겠지 했는데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왔다는 소식이 없더군요. 그 사람은 두 다리를 잃어서 생사의 고비에 시달렸는데 더군다나 직접 애를 밀치고 차에 치여서 그 광경 다봤을테고 애도 말했을테고 심지어 방송 매스컴이 떠들어댔는데도 안왔습니다. 몰랐을리가 없겠죠. 어쩌면 저 할머니같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어요.
    • 간혹 저런 분들이 있더라구요. 무지황당하죠. 그래도 애가 떨어졌으면 아마 또다른 깊은생각을 하셨을거예요. 잘하셨어요.
    • 저도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친절이나 도움을 주고나서 후회할 때가 있어요.
    • 잘 하셨어요. 당연히 해야하는 반응이지만 한국인이라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 같은 용기있는 행동 하셨네요.
    • 잘 아는 타인에게 친절이나 도움을 주고나서도 후회할 때 있는 걸요
    • 사소하지만 가방열려있다거나해서 알려주면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경우도 많고 뭐 그렇더라고요.
      그냥 타인이 자기에게 뭔가 말한다는게 친절이나 도움으로 생각하기 이전에 경계하고 자기를 비난한다고 생각하고 귀찮게한다 생각하고 뭐 그런가 봅니다.
      진짜 갈수록 삭막해지죠. 잘못한 사람한테 잘못했다고 말하는거도 그랬다가 해꼬지 당하지 않을까 주의해야하고, 친절도 베풀었다 보따리내놓아라하는 꼴 당하지 않을까 조심해야하고 뭐 그런 세상...
    • 고맙다는 말 한 마디쯤 하면 다들 자기가 지는 것처럼 느껴지나봐요.
    • 글쎄, 사람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보다 내가 감사를 받지 않다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거라면 정말 그건 가치가 없는 친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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