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 먹다가 면이 코로 나온 이야기

제가 사는 동네는 대학교를 끼고 있다보니 밥집들이 주로 학생입맛에 맞춰져 있죠. 파스타라거나 파스타라거나 스파게티라거나. 요즘은 일본카레같은 것도 있구요.

보통 학교 앞 파스타집이라고 하면 엘레강스한 분위기와 엘레강스한 맛과 엘레강스하지 않은(...) 가격으로 식사겸 데이트겸 과시의 장소가 되기 마련인데요.

딱 한군데 안 그런 집이 있더라구요. 마치 일본요리만화에 나오는 '청춘의 그 시절 주린 우리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경양식의 로망을 안겨준 그 양식당!' 뭐 이런 삘로다가 말이지요.

엘레강스하지 않은 분위기, 엘레강스한것 같기도 한 맛, 엘레강스한 가격으로 파스타를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가게라 (그렇다고 정말 짜장면처럼 맨날 먹을 수 있는 뭐 그런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다가...)

학교앞에 위치하고 있는 파스타집이지만 학생들은 별로 찾지 않고 동네 주민들, 특히 어르신들이 자주 찾으시더라구요. 

사장님 내외도 반은 체념한 그런 기분으로다가(응?) 아홉시쯤 되면 아예 셔터를 내리고 동네 친구들과 주거니 받거니 술판을 벌이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시구요.

사장님 부부가 나이가 지긋하신 분인데, 남편분이 사람좋은 미소로 주방을 책임지고 있고, 서빙 + 계산 + 서비스를 담당하시는 아내분은 동네 이모같은 분위기로다가

제가 혼자가면 "왜 오늘은 혼자 왔어?"라고 하시고 여자친구님이랑 같이 가면 "오늘은 그 아가씨가 아니네?"라고 훈훈한 립서비스를 날려주시는...으음...


아무튼 오늘은 빨래를 한짐 돌려놓고 '아 간만에 파스타나 먹어볼까.'하는 심정으로다가 털레털레 걸어갔더랬죠.

아니다다를까, 바로 옆 가게에 우글거리고 있는 대학생커플은 - 심지어 거기는 웨이팅까지... - 한 명도 없고 동네 어르신들이 두테이블정도 차지하고 앉아서 친목회 비슷한걸 하고 계시더군요.

파스타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테이블 위로는 이미 빈 맥주병이 몇병이나 놓여있으며, 그 사이사이로 흥에 겨운 목소리들이 오가며 친목을 나누는 그런 자리.

7천원짜리 파스타를 시켜놓고는 '오, 나이들고 나서도 주말에 파스타와 맥주를 놓고 한담을 즐길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같은 중2병스러운 생각을 하며 앉아있는데, 그쪽 테이블에 파스타들이 주루룩 놓이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엄숙하게 가라앉으며 '맛의 달인'같은 분위기가 펼쳐지더군요. 알고 보니 그분들도 동네 싸게 먹을 수 있는 '스파게티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 와본 모양이에요. 


"이 뻘건거 좀 봐봐. (아마도 토마토)"

"내건 허연것이 흐물흐물한디 (아마도 까르보나라)."

"내건 뭐 면밖에 없어야?!? (아마도 올리오?)"
"암튼간에...이게 그 뭐여 이태리 잔치국순가배"

"아 임자 촌시럽게 잔치국수가 모여. 이건 빠스타제, 빠스타!"

"빠스타가 뭔 뜻인데?"

"에...그...잔치국수 같은 뜻이제."


웃지 않으려고 면을 입안 가득히 우겨넣고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소리죽여)하이고, 옆에 저 총각은 왜 국시먹다가 몸을 막 떨어싸?"

"국시 아이라카믄!"

"이게 빠스타가 맛있는가벼."

"요새 데레비 보니까 저런 총각들이 많드만."

"이, 나도 봤어야. 그 에드워드 권인가"

"갸는 옛날에 망했어. 사기꾼 아닌가 사기꾼."

"이 뻘그무레한 것이 그래 맛있기는 맛있는갑제"

"잔치국수맴치로 많이 묵는다고 하잖어?"

"아 빠스타라니까!"


그리고 전원 미식가스러운 태도로 엄숙한 시식을 하신후 레모네이드로 입가심을 하시고 한참을 말없이 앉아계셨더랬죠. 그리고 누군가가 정말 작은 목소리로


"...묵어보니까 비빔국수만 몬하네."

"아 좀 조용히 있어야."

"몬한거를 몬하거라 하제 뭐라 해야?"

"아 거 체신머리 없구로!"

"날도 더운데 면이 뜨거웅께..."

"여 사장님요, 이거 매실(아마도 레모네이드) 한잔 더 주소!"

"다음에는 냉면 묵으러 가야."

"아 좀 조용히 하라니까!"


...그래서 파스타를 먹는둥 마는둥 하고 가게를 굴러나왔다는, 써놓고 보니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였습니다. ㅠㅠ



    • 재미있구만요. 근데 이분들이 어느쪽 말을 쓰시는 거죠? 체신머리 없구로는 경상도말인데 명령형으로 쓰는 조용히 있어야 이건 전라도쪽인 것도 같고, 여 사장님요, 이건 또다시 경상도쪽인 것 같기도 하고...
      • 팔도 어르신들이 다 모여있는 것 같았어요. (서울 어른만 없다는게 함정...) 아마 부부인듯한 어르신들은 배우자의 사투리가 은근슬쩍 섞여있기도 하고...
        아, 제 워딩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군요. 금붕어 같은 기억력이라...;ㅁ;
        • 아하 'ㅅ'
          하여간 재미있게 잘읽었어욤
    • "아 임자 촌시럽게 잔치국수가 모여. 이건 빠스타제, 빠스타!"
      "빠스타가 뭔 뜻인데?"
      "에...그...잔치국수 같은 뜻이제."

      꽁트같네요. 너무 웃겨요 ㅎㅎ
    • 서울에서 냉면먹다 보면 저런 경우가 꽤나 많습니다(...) 정치얘기는 좀 짜증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가만히 어르신 팟캐스트(...) 듣고 있으면 많이 재밌습니다.
    • 재미있습니다. 글쓰는 계통에 계신 분 같아요. 우리동네에도 하나 있었으면 싶은 파스타집.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4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38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48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5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0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1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6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8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4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29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3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7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6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2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5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