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립미술관 전시회 관람 후기.

자발적으로 가 본 적이 없던 미술관이 갑자기 가보고 싶어져서 가격이 매우 저렴한 시립 미술관을 다녀왔습니다. 단 돈 500원(성인)으로 하고 있는 전시회 전부를 볼 수 있다니 양심에 찔리더군요. 실내 온도는 세게 튼 에어컨에 냉방병 걸리는 제게 완벽하리만큼 적절해서 고마웠습니다. 문예회관 앞에 내렸다가 시립미술관까지 한참 걸어가야 하는 바보짓을 했죠. 아니, 문예회관 안에 전시회관 있는 거 아니었나 싶었지만, 걸어가다 익숙한 위령비와 영령비를 보니 새록새록 예전에 소풍왔던 기억들이 떠오르더랍니다. 비엔날레가 개최된지 얼마 안 되어 소풍을 비엔날레로 가게 되었는데 그 때 봤던 몇몇 전시품들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아마 오행 관련 주제였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그 이후로 자발적으로는 처음 갔어요.


시립미술관 1층에 미술도서실이 따로 생겼더군요. 원래 2층에 자료실로 있던건데 12년 4월에 아래로 이전했다고 하네요. 미술 관련 책들로만 이루어진 도서실이라 침을 흘리며 장서를 확인했습니다. 최신 도서가 딱히 많은건 아니었지만, 철학이나 건축, 회화, 예술 쪽으로 질 좋은 서적이 많더군요. 여기는 관람료 적용 없이 사용 가능한 구간인지라 시간 날 때 꼭 놀러와서 뒹굴거리며 책이나 읽어야 겠단 다짐을 했습니다. 원래 도서관에서 장서 열람을 할 때 도서관 크기에 따라서 너무 크면 전공 서적에 밀려 교양 서적을 찾기 힘들고, 너무 작으면 장서량이 너무 작아서 열람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특정 주제 도서 열람실이라니 즐거워서 현기증 날 지경이었습니다. 대출이 불가능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불편을 감소할 만 하고, 뒤집어 말하면 누가 그 시간대에 책을 읽고 있지 않는 이상은 책들이 거기에 언제나 있다는 거니까 좋게 좋게 생각할 수도 있겠더라구요.


전시회는 '오월_ 1980년대 광주민중미술'과 '허정웅컬렉션특선전 기도의 미술' 둘이었습니다. 1층에 있는 오월 전시회부터 한 바퀴 느긋히 돌았는데 복잡한 심정이 들더군요. 저는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에 희미한 감정선과 함께,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해하고 있을 나름인지라 그 당시의, 그리고 그 이후 그 당시를 체험한 이들의 미술 작품에서 그 간의 정서가 전해지더군요. 80년대 ~ 90년대 후반까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몇몇은 약간의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80년대의 작품들은 창작가들의 깊은 정신적 내상이 작품에서 느껴졌습니다. 대부분이 검붉은 색조를 띄고 있었고 완전히 돌려서 말하거나 아니면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그대로 말하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문학계열에서도 5.18은 80년대를 지나치면서 말을 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바늘 덩어리가 되어 살 속에 깊게 묻혀 꾸준히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였는데 미술에서도 그와 같았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 특이하게 보였던 부분은 90년대 들면서 80년대 초반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반미의 상징이 직설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조기를 불태운다거나, 괴이한 오브제로서 또는 개의 얼굴이나 개로 표현되는 미국이 등장하더군요. 80년대에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그리는 그 자체(죽은 임산부, 진압당하는 사람들)가 거대한 힘을 전했다면, 90년대는 과격한 상징으로서 상황을 격화해서 그렸던 것들이 많아 작품을 통해서는 실제 상황을 체감하기 어려웠습니다. 노태우 정부 퇴진과 계엄철폐가 주요 주장이었던 5.18에서 이후 미국으로 그 비판하는 주체가 변경되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90년대의 운동권 그림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있는데 성조기를 반으로 가르며 통일을 주장한다던가, 적대적 상징으로 미국이 등장한다던가, 어떤 작품에서는 아예 군복을 입은 허수아비들을 미국이 조종하는 부분도 있더군요. 운동권의 반미에 대해서야 익숙하지만, 5.18의 연장선상에서 반미가 명확한 유산의 승계인가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전남대학교 선언문이 (한자가 많아 읽지 못한) 조선대 선언문과 함께 입구 쪽에 있었는데, '독재 뒤에 숨겨진 구조적인 실체' 비슷한 문구로 무언가를 명시하고 있긴 했습니다만 5월 8일인가의 투사일보에 보면 요구하는 바는 노태우 정권 퇴진과, 계엄 철폐 등으로 한국 내부 정치의 문제를 고발하는게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80년대 조각 작품 중에 5.18을 대속에 은유하는 작품(작품 제목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도 있었는데, 그건 그것대로 저에겐 머리가 아팠습니다. 과연 광주항쟁이 한국의 대속이었는가에 대한 의문 말이죠. 이러한 흐름은 근현대사를 꼼꼼하게 파악해야 답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목판화가 상당히 유행이었더군요. 왜 그랬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두 번째로 살핀 전시회는 '허정웅컬렉션특선전'이었는데 허정웅이라는 분이 국가에 작품을 기증하면서 그걸 기리는 의미로 전국 국가기관 미술관을 한 바퀴 순회 전시회를 여나 보더군요. 미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저도 알만한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서 놀랐습니다. 가장 유명했던건 아마 이우환 화가의 Point와 From Line이 아닐까 한데 이런 작품이 여기 전시되어 있다니 하고 놀랐어요. (예상외로 그 두 작품 크기가 상당히 크더군요.) 정말 다양한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보면서 이런 기분이 들더군요. 그림 자체보다는 그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상상하길 바라는 (또는 그 과정을 추측하기 쉽게 만들어진) 경우와, 그림 자체의 내용을 보라는 경우로 나뉜다는 생각이요. 이우환의 경우 전자이겠죠. 그런 전자의 경우 중에서 제 맘에 가장 든 화가는 '손이유'였습니다. '드러나는 것 잠기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아마도) 2개의 작품이 있었는데 그 두 작품 다 풍부한 겹침을 보여줘서 마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그 풍만함에 즐거웠습니다. 화가가 이걸 그리면서 선을 긋고 그 위에 또 긋고 그 위에 또 그엇겠구나 하는 그런 풍만함 말이죠. 그렇게 그려가면서 그림이 계속 '드러나'고 '잠'겼으리란 생각이 들더군요. 후자의 경우에는 제 맘에 드는 화가는 없었습니다. 그림 자체를 보려면 뭐라도 알아야될텐데 그런게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허정웅특선전에는 외국 네임드 화가들의 작품도 한 두 개씩 있더군요. 피카소 작 한 점, 살라도르 달리 작 한 점, 마르크 샤갈 작 한 점, 앤디 워홀 작 한 점 제가 이름을 아는 화가들은 이정도 였습니다. 파리나 런던까지 가지 않고도 이런 화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니 하고 아주 잠깐 즐거웠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제 감식안이 떨어진다는 걸 무시하고 작가들의 작품을 못 그렸다고 생각하고 싶더군요. 뭐, 잘 그리거나 못 그리거나 (아니면 그렇게 보이나)가 작품의 가치에 영향을 전혀 주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긴 하지만, 샤갈 작품은 귀여워보일 지경이었어요. '파리의 기억'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재일교포 메세나 정신 전국에 알린다 - 광남일보] 여기서 그 그림 볼 수 있네요. 한 번 보고 평가해보세요. 왼쪽의 저 공룡(?)은 도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하죠. 앤디 워홀은 모택동 사진 색칠해놓은 것이었는데, 익숙한 편이었고, 달리는 역시 초현실주의스러웠고.. 마리 로랑생이란 사람의 그림 두 점이 있었는데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제 눈으로 좋은 화가의 작품인지 판단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특선전 분류 중에서 재일 화가의 분류가 가장 분량이 많았는데, 바로 아래서 80년대 오월전 중심으로 작품을 보고 위로 올라와 재일 화가의 80 ~ 00년대 작품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몇몇은 민주항쟁에 대한 작품도 남겼지만 또 절반 이상은 전혀 무관하게 작품생활을 해왔거든요. 그런 것을 떠나서 재일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도 새로히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가장 최신 작품 중에 김인숙의 재일학생 사진집이 있었는데 보고 있자니 기묘했습니다. 일본에서 조총련계 학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었는데 일본의 문화인 문화제를 하면서도 언어는 한국어를 쓰고, 칠판 위에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올려져 있는 걸 보니 참 독특한 기분이더군요. 특히 운동회에서 만국기를 다는데 하나는 인공기로, 다른 하나는 한반도기(? 한국 전체가 푸른색인 국기)로 달더군요. 방과 후도, 특별활동도 사진으로 흘러지나가는데 재일에 대해 꼼꼼하게 알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500원 가지고 3시간을 즐겼더니 이건 도둑 심보가 아닌가 싶어서 자주 와줘야겠다 싶었습니다. 아,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 정말 알차게 즐기셨군요.. 미술관이 마음먹고 돌면 조용히 혼자 즐기는데 참 좋은 장소인 것 같아요. 소요 + 사색 + 감상 + 비평 등이 다 버무려진? ㅎ
      광주는 역시 예향의 도시인 모양입니다~
    • 가르강튀아_ 네, 혼자 놀 때 미술관이 최고에요. 작품 각각에 들일 시간 배분이 자율이라서. 감상 비평은 누군가와 같이 있는게 더 좋겠죠. 음, 그리고 광주가 예향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하정웅컬렉션특선전 앞에 '전국시도립미술관네트워크'가 들어가는데, '서울, 광주, 부산, 포항, 전북, 제주, 대전, 대구 등 8개 시도립미술관'에서 전시된다는 뜻이죠. 으, 그, 저.. 저는 진짜 독특하게 다른 곳과 다르지 않은 이상 칭찬하는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말이에요. 우리나라의 시도립미술관 퀄리티가 그렇게 차이가 나진 않을 듯 하고, 우리나라 정부를 칭찬하는게 어떨까 합니다.
      • ㅎㅎ 하지만 광주 비엔날레도 있잖아요! 물론 부산에서도 비엔날레를 하지만 제 경험에는 광주 쪽이 더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요. 특히 작년 광주 비엔날레가 참 좋았어요.

        그때문에도 이번 전시를 보진 못했지만 왠지 광주시립미술관이라는 전시공간에 막연히 신뢰가 가서요..
    •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소식을 미술 잡지에서 읽고는 꼭 가보고 싶었는데, 제가 사는 도시하고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아직까지 못가보고 있습니다ㅜㅜ. 대신 올려주신 리뷰 잘 읽었어요. 덕분에 잔인한오후님의 즐거운 시간이 제게도 전해졌네요ㅎㅎ. 가격 대비 만족도를 따지자면 역시 미술관 만한 곳이 없죠.
    • 낭랑_ 이번에 본전(?)을 너무 잘 뽑아서 또 가고 싶네요. 기억력이 떨어져서 감평을 얼릉얼릉 적어놔야 나중에 보고, 아 이런거 봤었지 기억할 수 있는 편이라 다음 번에도 후기 쓸 수 있도록 노력할께요ㅎ. 제 생각에 문화 즐기려면 가까운 곳에서 하는 거 찾아 편한 차림으로 설렁설렁 가는게 최고인거 같아요. 가까운데서 혹시 뭐 하나 살펴보세요, 멀리 오려하면 영영 못 감ㅠ.

      가르강튀아_ 그랬군요. 작년이면 라운드테이블인가요? 부산 비엔날레도 가 보셨다면 저와 차이가 크실꺼에요. 전 본문에도 말했듯 자발적인 미술관 관람은 처음이었어요. 라운드테이블은 여성 큐레이터 다수 중심으로 이루어져 보고 싶긴 했는데 게을러서 못 갔네요.
      • 네 맞아요 라운드 테이블이었어요. 전체 기획 의도나 컨셉에서는 강한 인상을 받지 못했는데 개별 작품들에서 많은 즐거움을 얻었어요.

        무각사 대웅전에 전시한 볼프강 라이프의 망망대해도 인상적이었구요. 제가 비엔날레 경험이 그렇게 많진 않지만 광주는 확실히 그동안의 내공이 보인다랄까.. 어쨌든 저같은 타지인에게는 그 도시 자체가 비엔날레와 함께 경험되는 경향이 강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 아 저 공룡은 아마 말이나 당나귀가 아닐까 싶은데요 ^-^ 근데 공룡이라고 하시니까 아무리 봐도 공룡으로 보입니다....아무튼 당나귀도 그렇고 포옹하고 있는 커플, 하늘을 나는 말을 같이 타고 가는 커플, 다닥다닥 집들이랑 태양 등 샤갈이 자주 그리는 모티프들이 등장하는 소품 같아요.
    • 유니게_ 크기가 120x100cm라 보기보다 상당히 커서 세밀한 팬터치를 볼 수 있었어요. 짧은 선들로 이루어진 외각선이 부스스하게 일어선 솜뭉치처럼 대상을 보이도록 만들었고, (흔히 다색으로 가득찬 잘 알려진 샤갈의 작품과는 다르게) 여백이 꽤 많아서 미완성작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파리의 '기억'이라는 부드러움만은 잘 전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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