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림 까기
그렇지 않아도 퍼시픽 림 까고 싶었는데 마침 까는 분위기가 되니 저도 조금 거들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퍼시픽 림은 그냥 돈 많이 들인 멍청한 영화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단순히 제 덕력이 충만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솔직히 이 영화를 좋게 보신 분들은 그다지 진지하게 보지 않으셨거나 애초에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감상 방식이야말로 덕후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퍼시픽 림은 일본 괴수물의 전통을 무리하게 따르려 했던 탓인지 조금 심할 정도로 말이 안 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먼저 카이쥬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어떤 행성의 문명을 멸절시키려고 하는 외계인의 입장에서 크고 눈에 잘 띄는 괴물을 딱 한마리 씩만 보내는 것보다 더 비효율적인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행성의 여러곳을 동시에 공격하지는 못하면서 여러곳으로부터의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기 쉬운 방식이지요.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들은 뇌가 네트워크로 연결되기까지 한 고도의 사회적 생물들이고, 진화 과정에서 그 이점을 이용해 세력을 키워왔을 테니 카이쥬 방식의 비효율성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나 인류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라면 또 모르겠지만, 여하간에 이 외계인들이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카이쥬를 제압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거를 만들었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왜 하필 인간형 거대로봇이어야 합니까? 우리 모두의 어릴 시절 로망이라서요? 기계를 사람 모양으로 만들면 무슨 없었던 힘이 생기기라도 한답니까? 초반에 나온 설명처럼 독성이 강한 괴물의 피로 환경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는 방식은 제외한다 하더라도, 사람 모양의 기계를 타고 가서 두들겨 패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생각난 것만 써보더라도, 뭔가 그물 같은 것으로 괴물을 둘둘 휘감은 다음 그 위에 고경도 수지를 뿌려서 굳힌 후 전기로 감전시켜 죽인다던지.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싸움은 바다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저는 이게 물 속에서는 전파를 이용한 통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원격 조종 방식이 아닌 파일럿이 직접 탑승해야만 하도록 만든 근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처음부터 물 속에서 싸운다는 전제로 만들었다면 왜 로봇들의 모양이 최소한 수중에 적합한 유선형도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싸우다가 괴물이 헤엄으로 도망이라도 친다면 번거롭게 다시 수면으로 예거를 띄운 다음 헬기로 건져내서 쫓아가야 될 판인데, 그 따위 쓰잘데 없는 고철을 만들 기술이면 차라리 수중 기동성이 높은 다관절 잠수함 같은 것을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각 나라에서 카이쥬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자국의 해안선을 따라서 장벽을 짓는 것이 나옵니다만, 괴물이 들어오는 경로를 이미 알고 있는 이상, 굳이 벽을 세울 거라면 최대한 포탈에 가깝게 둘러싸는 형식으로 세우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주위로 예거 기지를 세우는 것이 방어하기 훨씬 간편하지 않을까요? 바다가 너무 깊어서 벽을 쌓기가 어렵다면 어떻게든 최대한 두껍고 무거운 구조물을 만들어서 포탈 위로 가라앉혀 버리는 방법도 있을 거고요. 상식적으로 우리가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어떤 방법이라도 태평양의 해안선을 따라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정신나간 짓보다는 효율적일 겁니다. 어쩌면 애초부터 대운하처럼 그 사업 자체의 쓸모보다는 관광 자원이나 일자리 창출이 목적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집시 데인저는 원자력이니까 아날로그라는 것도 개소리입니다. 원자력을 에너지원으로 쓴다고 해서 제어방식까지도 다 아날로그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게다가 두 사람의 파일럿이 좌뇌와 우뇌를 제공하여 예거를 조종한다는 것도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과학자라고 하는 자식들이 지구에 관한 정보가 모조리 새어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카이쥬와 드리프트를 하려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퍼시픽 림 관객들이 무슨 대머리 여가수 같은 부조리극을 보러 온 것도 아닐 거고, 이 정도까지 되면 감독이 판타지를 만드는 데에는 제법 소질이 있으나 SF에는 별 재주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