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드럼을 추천해주신 (구)hermit 님께 감사 + 소녀혁명 우테나 회고 + 이쿠하라 감독님 덕분에 애니 덕후인 것이 부끄럽…





제가 마지막으로 본 일본 TV애니가 2004년의 사무라이 참프루이고

그 이후로는 대단한 작품이 안 나온다고 생각해서 일본 애니를 안 봐왔었는데

그건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했더랬습니다.


90년대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때 그런 대단한 작품이 쏟아져 나오던 세계가 약간의 쇠락을 겪는다고 해서 

대단한 작품이 안 나올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 대단한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중 제 안에서 정점에 있는 작품은 "소녀혁명 우테나"였습니다.

소녀혁명 우테나의 우수함에 대한 설명으로는, 

우선 제가 생각하는 작품의 장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아래 글을 인용하며 시작하고자 합니다. (출처는 엔하위키. 약간의 가필을 했습니다)








"스타일적으로는 독특한 캐릭터 디자인과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작화, 실험성이 강한 배경음악이 돋보이며 내용적으로는 페도필리아, 동성애, 근친상간, 의붓남매, 이지메 등과 같은 충격적인 소재들로 이야기를 채워 놓은 문제작.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제목인 소녀혁명이 암시하듯 기존의 권위적 남성성과 사회에 의해 강요되던 여성성에 대한 고찰을 심도있게 다루고 있으며,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의 명성에 화룡점정을 찍은 작품.


기본적으로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1화 혹은 2화 내에 기승전결의 흐름을 가지며 그와 동시에 메인 플롯을 진행시키는 변신소녀물(전투로 마무리 짓는), 학원배틀물이나 로봇물에 가까운 구조를 보인다. 이 때문에 각 에피소드의 갈등의 진행은 대부분 비슷한 패턴을 보이지만, 각각의 절묘한 캐릭터성과 및 그들의 인간적인 갈등과 맞물리면서 각 편마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구조. 특히 아리스가와 쥬리 관련 편들은 연출이 장난이 아니다.


당시 대히트해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비밀주의, 불친절한 스토리 전개, 캐릭터 상관관계를 답습한 면모를 보이지만 전혀 다른 매력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고, 에바와는 달리 이야기로서의 결말은 매우 확실하게 끝맺음했다. 특히 당시 시청자들을 단 한 방에 공황상태로 몰아간 결말부의 충격적인 대반전은 이 작품이 만들어진 지 12년이 지난 현재에도 따라갈 작품이 없을 정도."




제가 소녀혁명 우테나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은 바로 그 "스타일"이었습니다.

딱히 제가 소녀만화의 팬이 아니었음에도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기본적으로 고전적이고 극히 탐미적이면서도, 또 그 극단의 고전성과 탐미성의 추구를 통해 오히려 참신성을 획득하는 작화,

또 당시 TVA로서는 혁신성과 실험성을 과도하게까지 밀어붙인 연출 (지금 봐도 실험적입니다)

또 당시의 어느 TVA들보다도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연을 가장 바닥까지 파고 들어간, 

그러나 그러한 비관과 심연의 구렁텅이에서도, 희망과 미래를 패기 있게 밀어붙였던 각본까지

이 모든 요소가 도무지 믿기 힘든 수준으로 짜여져 있었던 저의 올타임 베스트 애니메이션입니다.


(이 작품에서 '희망과 미래'의 핵심은 '자매애'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최고의 자매애를 보여준 작품은 '델마와 루이스'가 아니라 바로 이 '소녀혁명 우테나'가 되겠네요)




"펭귄드럼"의 연출의 99%는 바로 이 우테나에서 온 것입니다.

이쿠하라 감독의 연출의 특성은 애초에 그의 작품들을 통관하는 하나의 스타일에서 유래하는데,

이에 대하여 어떤 분이 데이비드 린치와의 유사성을 들어 지적한 문구가 그러한 특성을 잘 설명합니다.

 

"현실을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는 척하고 있지만 잘 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은 모호한데다 과거의 망령들이 현재에 간섭하고 말도 안되는 설정들이 튀어나오면서 막판엔 아예 대놓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붕괴" (http://giantroot.pe.kr/1259)


(이쿠하라 감독은 실제로 데이비드 린치에 관심이 많고,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본 스타일의 뼈대를 추구하기에
그것이 구현되는 연출에서 감독은

온갖 환타지와 할 수 있는 멋은 다 부린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과

온갖 상징을 동원하여 인간 내면의 심연을 파고들어가는 연출을 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에반게리온의 하얀 띠 부분의 연출을 훨씬 더 화려하고 다채로운 연출 도구들을 사용하여 표현해내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테나나 펭귄드럼을 보신 분이라면 이게 무엇인지 단박에 이해를 하실 것이고,

두 작품의 스타일이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스타일 뿐만 아니라 디테일한 연출도구들까지 무수히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했는데 

거기까지 한 것은 우테나 팬들에 대한 팬서비스 차원이었다고 생각되네요)


그래서 펭귄드럼이 우테나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그 평가에 일견 수긍하면서도,

이쿠하라 감독의 스타일이 21세기의 진보된 CG의 기술력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훨씬 더 다채롭고 화려한 연출의 영역을 넓힌데에 

작품의 진보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체적 유기성과 짜임새에 있어서는 우테나보다 못한 작품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테나는 총 39회라는 긴 분량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한 회 한 회 쌓아나가며 전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펭귄드럼은 완급의 조절이나 전체의 짜임새에 있어서 우테나보다는 떨어지는 작품이 맞다고 봅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이쿠하라 감독의 "데이비드 린치"적 특성을 생각하면 그러한 "짜임새"라는게 의미가 크게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고전적인 완성도 비평의 관점에서 보자면 말입니다.


특히 "완급조절" 측면에서 아쉽습니다.

hermit 님도 언급하신 링고의 스토커질에 분량이 지나치게 할애되었다는 점이 특히 아쉽습니다.

물론 그런 정말 뜬금없어 보이는 엉터리 개그질도 이쿠하라 감독의 본질적 특성이자 장기의 하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테나에서도 그러한 특성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한 전개와 연출이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전반의 링고의 스토커질을 좀 줄이고, 후반의 내용전개에 조금만 더 할애했더라면 전체 모양새가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또 주제의식도 훌륭하고 감동적이긴 한데,

이러한 주제의식을 밀어붙이는데에 있어 과연 현재의 작품의 연출과 전체 모양새가 최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남습니다.

특히 완급조절의 측면에서 이러한 아쉬움이 주로 유래하는 것 같네요.

물론 이 정도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문제작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녀혁명 우테나는 그러한 점에 있어서도 역시 추호의 의문점도 갖게 하지 않았던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펭귄드럼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완성도가 어쨌거나 하는 걸 모두 떠나서,

펭귄드럼은 제게 1998년에 우테나를 처음 만나던 때의 설렘과 기쁨과 두근거림을

15년만에 그대로 다시 만나는 행복을 누리게 해준 작품입니다.

(아 그러니까 약 90%까지 우테나와 똑같은 작품이니까요. 장점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타 아님)


이 느낌을 이해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15년만에 우테나를 다시 보는데 이게 두 번째 보는 것 같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보는 것처럼 두근대고 설레었다는 말입니다 . 

우테나를 좋아하던 분들이라면 아마 저랑 똑같은 걸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제가 우테나를,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을, 나아가 일본 애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90년대에 제가 보낸 10대는 일본 애니에 오롯이 바쳐졌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구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애니메이션을 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2000년대 이후로는 영화에 빠져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 아티스트들의 훌륭함을 알게 되면서

제가 그렇게 좋아했던 일본 애니에 관심을 거의 끊다시피 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마법소녀 마도카"와 "펭귄드럼"이,

일본 애니메이션에도 충분히 존경을 바칠만한 이런 대단한 아티스트들이 있다는 것을,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현실의 이야기를 하자면

어른 남자(네 접니다)가 일본 애니를 보는 것은 해가 갈수록 좀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마도카" 같은 마법소녀물을 저같은 어른 남자가 보고 있는 걸 누가 보거나 하면 -_-)


그러나 "펭귄드럼"까지 보고나서,

제가 이것들을 보고 있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10대 때에도 일본 애니의 우수함에 대한 막연한 확신은 있었습니다만

이후 10년간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거의 다 감상한 후 돌아와서 다시 만난 일본 애니의 아티스트들은 

여전히 그 우수함이 전혀 빛바래지 않고 살아있었네요.

부끄럽지 않습니다.

일본 애니는 대단하니까요.


돌아온 탕자(?)가 이제부터 지난 10년간 제가 놓친 일본 애니의 걸작들을 하나하나 감상하려 합니다.

두근거리네요.

마도카와 펭귄드럼을 비롯한 2000년대 일본 애니의 걸작들을 알려주신 hermit님을 비롯한 게시판의 덕후 동지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돌아가는 펭귄드럼을 재미있게 잘 봤지만 그 감상은 마사토끼님의 감상과 거의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masaruchi/110161648594 <- 그 감상
      • 아... 마사토끼 님 역시 대단하네요 ㅋㅋㅋㅋ
    • 재밌게 보셨다니 저도 좋군요 >_< (舊 hermit)
      • 다시 한 번 감사감사!! +_+
    • 사실, 듀게에는 골수 애니팬들 (이라고 적고 오덕이라 읽음)이 얼마 안되는 것같아, 주로 루리웹을 출입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centrum 님의 글이 아주 반갑습니다.
      그동안 왠만한 애니는 거의 봐왔다고 자부하지만 우테나는 좀 망설여졌었어요. 베르사이유 장미 스타일의 소녀취향 애니가 이닐까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요. 그런데 최근, 제가 속해있는 지역 Anime 클럽 부회장 (30대의 백인 남성)이 우테나를 극찬하기에 한번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었지요. centrum 님의 글을 보니 반드시 봐야겠네요.
      우테나처럼 '자매애'의 정점을 찍는 애니라면 마리미테 (마리아님이 보고계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림체가 다소 적응안되지만, 일단 그 단계를 넘기면 엄청 재미있습니다. 원래는 여성팬들을 겨냥해서 제작되었지만, 일단 방영되고나서는 남성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된 애니입니다. 다만, 취향을 탈 수있는 애니라서 주변인들에게 추천은 차마 못한다는... -.-

      그건 그렇고 며칠전 호무라의 성우인 '사이토 치와'씨가 결혼하셨다고하네요. 마도카 팬들이 반응이 참 대단했습니다. -.-
      • 네 꼭 보셔야 합니다 +_+
        이 만화의 작화 스타일이 소녀취향이고 어쩌고는 전혀 문제가 안 될만큼
        대단한 연출과 완성도를 가진 애니이기 때문입니다 +_+

        P.S.
        아... 그 루리웹이란데에 가면 지금 덕후들이 바글바글한 건가요?
        근데 거기는 왠지 좀 무섭네요 ㅜㅜ
        전 듀게에서 노는 거에나 만족을 ㅜㅜ
    • 우테나, 손에 꼽는 제 인생의 애니중 하나입니다.한창 애니에 푹 빠져살때 이 애니를 봤다는 사실에 운이 좋았다고 여깁니다.
      우테나를 그냥 자매애라고 뭉뚱그리는 건 지나치게 표면에만 국한한 것이고요, 키치적이면서도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통찰같은 것이 만만치않은 애니죠.
      • 네 그래서 내용상의 "희망과 미래"의 "핵심"이 "자매애"라고 썼습니다 ^^
        그거뿐만 아니라 연출, 작화, 각본 등의 모든 요소와 그것들이 다루고 있는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의 깊이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애니였죠 *_*
        • 으하하 자매애에 대한 제 의견은 cadenza님의 댓글을 두고 하는 말이었어요 ^^;;;
          자매애의 정점 마리미테라고 하시길래 고건 좀 아니지않나 싶어서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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