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와 일상 잡담입니다.(스포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글 남깁니다. 철철마왕입니다.

지난 목요일 절찬 상영 중인 설국열차를 관람했습니다. 근 몇 달만에 극장을 찾았던 터라 묘한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평소 허리디스크를 앓고 있었는데 4월부터 증상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고 결국 6월 중순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다행히 수술 결과는 매우 좋았고 요즘은 꾸준히 운동하며 잘 지냅니다. 그래도 극장에서 두 시간 넘게 앉아 있는 것은 허리에 무리가 갈까봐 피했는데요, 그래도 설국열차 아닙니까. ㅎㅎ

영화는 굉장히 인상 깊게 봤습니다. 기차의 끝 칸부터 끝 칸까지 직선으로 달려가는 이야기처럼 연출 또한 빙빙 돌리지 않고 직진합니다. 아쉬운 점은 영화의 호흡과 저의 호흡이 잘 맞진 않아서 영화가 달릴 때 저는 쉬고 싶었고 제가 달리고 싶을 때 영화는 한 숨 쉬고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저는 단백질블록에 꽂혔습니다. 영화 관람 후 내내 머릿속에서 그것이 맴돌더니 급기야 꿈까지 꾸어버렸습니다. 어두컴컴한 강을 배로 건너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그 강은 단백질블록이 녹아서 만들어진 강이라는 황당한 내용입니다. 꿈을 꾸고 며칠이 지난 지금도 강 표면의 덜 녹아내린 단백질블록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고백합니다. 기어코 오늘 양갱을 샀습니다. 흐허헝. 평소에 전혀 먹지 않는 음식인데요, 사야 할 것 같아서 샀습니다. 웃기죠? 굳이 단백질블록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꼬리칸의 식량인 그것이 꼭 제 것인 것 같어서랄까요? ㅎㅎ

설국열차에 관해 다시 곱씹다 보니 문득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커티스는 열차 밖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민수의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한낱 약쟁이의 헛소리로 치부하죠. 그리고 나서 아동 노동 착취의 모습에 분개하며 엔진에 팔을 우겨 넣었습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팔을 버린 길리엄의 행위와 오버랩되면서 커티스가 진정한 지도자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엔진에 팔을 집어 넣는 그 순간의 커티스의 머릿속이 궁금합니다. 커티스는 기차를 멈출 생각이었는가, 일단 눈앞의 아이를 구할 생각이었는가. 엔진 속 아이를 봤을 때 커티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1. 인류의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 묵인한다.
2. 아이를 구한다.

영화를 보신 분들께서는 아시다시피 커티스는 2를 선택합니다. 제 궁금증은 이대목에서 생깁니다.

커티스는 선택의 순간 아이를 구한다면 기차가 멈출 것이고 이는 곧 인류의 멸망이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전술했듯이 커티스는 열차 밖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엔진의 참상을 보는 순간 민수의 말을 갑자기 믿게 되었을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설마 추악한 엔진 따위와 인류는 될 대로 돼라는 심정이었을까요? 듀게의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 자신이 혐오했던 인육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가 유지된다면 대체 무슨 의민가.. 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랄까요.
      • 그렇다면 최후를 각오하고 마지막 존엄성을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겠군요. 제가 중요한 걸 못 보고 길을 잃었던 기분입니다.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 저는 그 순간에 그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 엔진 아래 있던 아이는 타냐의 아이였죠. 타냐의 아이를 부탁한다는 마지막 말을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종반부에 와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엔진으로 가서 윌포드를 죽인다는 목적은 좌절되었고, 아이를 구하겠다는 약속만 남았으니까요.
      아이를 본 이상 다른 문제는 생각나지 않고 아이를 구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이 떠오른 건 아닐까요. 열차가 충돌하기 직전 남궁민수와 같이 아이를 감싸안아 보호하는 커티스는 남궁민수처럼 아버지의 모습을 보입니다.
      • 오~그럴 수도 있군요. 어쩌면 1과 2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의 본능적인 행위였을지도요.
    • http://www.extmovie.com/xe/movietalk/2212594 (설국열차GV 중.. )

      관객4님이 하신 질문에 봉준호 감독이 답변한 내용에 어느 정도 설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덕분에 gv내용까지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중에 늦게나마 남궁민수의 비전에 동의했다는 대목이 제 질문에 답이 되는 지점인데요, 영화상에서 커티스가 늦게나마 민수의 견해에 했다는 것이 잘 드러났는지는 의문입니다.
        • 저도 마지막 부분의 연출이 조금 덜 다듬어진 것 같아 아쉽더군요. 아마도 한국과는 다른 타이트 한 촬영일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 5세 아이의 존재는 커티스의 혁명은 엔진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는데 그 무한 동력의 엔진 자체가 사실은 거짓임이 밝혀진 순간이니까요. 보시면 그 토록 저주했던 윌포드이고 바로 좀전에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을 대량학살 했음에도 불구하고 커티스는 인류의 종속을 위해 윌포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중이었죠. 요나가 성냥을 달라고 왔을 때 요나를 밀치기도 했구요. 커티스가 최후에 송강호를 따른 게 단순히 열차의 비인간성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죠. 커티스는 인류의 종속을 위해선 다른 인간들을 희생시키는 게 어쩔 수 없다는 윌포드의 견해에 거의 수긍해 가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엔진은 무한한게 아니라 멸종하는 중이었음이 요나에 의해 드러났고 대량학살이나 5세 아이에 대한 학대 같은 것들도 엔진이 멈추는 걸 조금 늦쳐줄 뿐 근본적으로 이 시스템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커티스는 깨닫게 된 것이라고 봐야겠죠.

          아이를 희생시키고 필요 없는 사람들을 학살해가며 인류의 종말을 막느냐 아니면 인류 대부분을 희생시키더라도 새로운 시스템을 모색하느냐 중에서의 선택이었다면 영화에서 좀 더 설명이 필요했다고 보는데 엔진의 부품들도 마모되는 중이었고 동력 역시 무한하지 않아 인류의 멸망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커티스의 선택도 영화상으로 봤을 때 충분히 납득이 된다고 저는 생각되네요.
    • 커티스가 엔진칸 문 앞에서 남궁에게 들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를 불가능으로 치부했을거라 생각친 않습니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회색이 있듯 사람이란 언제나 명료한 구분을 하며 살진 않죠 커티스 입장에선 그간 줄곧 품어왔고 실행까지 큰 희생을 거치며 달려온 목적이 눈 앞, 엔진칸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남궁의 제안은 갑작스러운 것이었고 전진해 윌포드를 전복시키는 것은 몹시 바랬던 것이죠 관성 때문에라도 엔진칸에 들어가 윌포드와 마주하고 싶었을 겁니다 또 남궁의 제안은 어디까지나 증거 없는 추측이었죠 두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기댈 뿐이고 다른 하나는 커티스가 계속 바래왔던 간절함이었습니다 엔진칸 앞에서 커티스가 남궁의 제안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고 절대 성공 못할 것, 으로 판단 내린 후 전진했을 것 같진 않네요

      아이를 구하고 남궁의 제안, 폭탄을 터트려 열차 생활을 끝내는 것을 받아들인건 (이후의 결과가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당초의 목적대로 윌포드를 제압해 열차 내의 계급제를 부숴봐야 열차가 존속시키기 위해선 계속 희생을 감수해야한다는 점을 확인한 순간 당초의 목적 자체가 모순이라 불가능하단 점을 알게되어서겠죠

      두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가 쓰레기가 된 상황에서 미뤄놨던 불확실한 남궁의 제안을 받아들이느건 자연스럽게 여겨졌습니다 나가면 다 죽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이 열차는 멈춰야 한다 이 시스템은 똥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팔이 잘리며 구해낸 아이가 어차피 문이 열리면 죽을지도 모르지만 가능성이 있단 점에서, 의미은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커티스가 아이의 이후 생가 여부에 대한 경우의 수를 따져보고 팔을 내밀었을 것 같진 않고요 커티스가 동경했지만 차마 할 수 없었던 다른 이를 위한 희생을 계산 없이 무의식적으로 행했을거라 생각해요 폭발 전에 아이들을 몸으로 감싼 것도 마찬가지고요 (폰이라 문장이 거친 점, 온점이 없는 점, 양해바랍니다)
      • 조금 추가합니다 결과적으로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 목도한 진실에 멘붕한 상태에서 일종에 목 하나를 넘는 성장을 했다고 봅니다 본능적으로 눈 앞의 타인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길포드 같은 사람이 된거죠 그 직후 죽어서 아깝긴 합니다만 커티스로서는 죽기 전에 바람을 이뤘으니 경사는

        경사죠 그래서 전 영화 결말을 쵸큼 찡~ 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 엔진 바로 앞에서 남궁민수에게 과거를 고백하는 장면 때문에 마지막 행동에 설득력이 생기는 거 같아요. 과오를 씻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있었겠죠. 전 그 행동에서 약간 자포자기한 거 아닌가 싶은 느낌도 받았어요. 시스템이고 대의고 다수의 안녕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고 그냥 난 다시는 내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겠다! 뭐 이런 거.
      그래서 월포드의 비아냥 거리는 말에 감정이입이 되더군요.-_-
      • 과오를 씻고 스스로를 구원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군요. 아, 월포드가 뭐라고 비아냥 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ㅜㅜ nice였던가요?
    • 전 이렇게 유지되는 세계라면 죽든 살든 일단 깨야한다-라고 판단했다고 느꼈어요. 윌포드의 연설과 길리엄의 정체에 충격받고 아 진짜 이렇게라도 유지시켜야 하는 건가? 라고 엄청난 혼란을 느끼는 와중에 엔진 속에 든 아이를 보고 속이 뒤집힌 거죠. 그게 커티스의 마지노선이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아이를 잡아먹었다는 얘기를 한 것도 다시는 그런 짓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커티스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한 밑밥이었다고 봅니다. 팔을 집어넣는 순간에는 이러면 엔진이 멈출텐데 뭐 이런 건 고려대상 축에도 들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 다음 성냥 넘길 때는 이딴 세상 터뜨리고 보자 이런 심산이었을 거고요.
    • 제가 보기엔 사람은 관념적인 것이거나 전해 들은 것 - 지금 74%의 꼬리칸 사람들을 학살한다고 들은 것 - 보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보다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윌포드의 설득대로 밸런스를 위해 74%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관념적인 개념으로 설명을 듣는 것보다 눈 앞에서 어린아이가 그 위험 천만한 기계 안에서 기계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 것이죠.
      바로 미디어의 중요성이 이것입니다. 아무리 걸프전, 이라크 전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되고 있었다고 말해도 눈 앞에 사진 한 장 보다 설득력이 적게 마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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