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유도한 이야기 - 설국열차 강력 스포일러
설국열차가 15세 관람가인데, 생각해 보니 제가 대화를 나눈 아이는 15세가 안 되었네요.
아이는 말이 없어요. 정물 같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애써요.
아이는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로 들릴듯 말듯 말합니다. 저를 잘 쳐다보지도 않아요. 언젠가는 시선을 맞춘 채로 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겠죠.
- 어젠 뭐했니?
- 영화 봤어요.
- 오, 무슨 영화?
- 설국열차요.
- 그래애애애애~~~?
저는 '그래?"를 길게 빼면서 순간 갈등했어요. 그 동안 성공적으로 스포일러를 피해왔거든요. 휴가도 없는 여름을 보내면서, 열심히, 부지런히, 피했지요. 잘 피하고 있어, 이러면서.
저는 망설이다가,,,, 아이와 대화하는 것을 선택했어요.
스포일러쯤이야.
저는 쉼호흡을 했어요.
- 그거 기차에 탄 사람들 이야기라며? 난 줄거리를 하나도 모르는데, 사람들이 기차에서 뭐하는 거야 ?
- 뒷칸에 있는 사람들이요...
- 응!
- 앞칸으로 가요.
줄거리 파악을 했나봐요. 내심 흐뭇.
- 그래, 얼핏 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
- 가면서 싸워요.
- 그래? 근데 싸우면서까지 왜 가? 앞칸에 뭔가 있나?
- ......
- 앞칸에 뭐, 보물 같은 게 있나?
- ......
아, 저는 아이가 이야기의 갈등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해요.
- 앞에 중요한 게 있나? 이를테면 황금? 보물지도? 아니면 가서 맘대로 기차를 조종하려고?
아이는 한동안 말을 않다가,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저는 막 얘가,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하고는 막 기대하는데
- 송강호가 총에 맞아요.
첫 번째 공격이 왔어요.
- 뭐? 그래? 총에 맞아서.... 송강호가... 죽어? 그래? 죽어? 그렇구나!
또 쉼호흡을 해요.
- 그래서, 사람들이 앞칸에 도착을 하긴 하던?
- 네...
- 거기에 뭐가 있어?
- .....
저는 아이가 애드 해리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막 기대하는데!
- 근데 기차가 뒤집혀요.
두 번째 공격이에요.
- 뭐, 뭐라고? 기차가? 통째로? 뭐? 철로를 이탈해서? 굴러가? 뒤집혀?
- 사람들이 다 죽어요.
세 번째 공격이에요.
- 뭐? 다? 다 죽는다고? 앞칸 뒷칸 사람들 다? 정말이야?!!! 다? 다 죽어? 그럼 세상에 아무도 안 남아?
저는 정말로 멍했어요. 아, 나는 정말로 스포일러를 잘 피하고 있었던 거였어! 아니, 설국열차 줄거리가 이래?
- 두 명이 살아요.
- 그래? 누구?
- 한국 여자애랑 흑인 꼬마요.
- 그래? 아......그래, 그럼 그렇지. 애들이 사는구나..... 생존자가 있는 거지.... 그렇지? 그래!
음, 그런 결말이군. 아이들이 사는군. 그랬어, 라며 주억거리는데
- 근데.....곰을 만나요....
네 번째 공격이에요.
- 뭐, 고, 곰? 고옴? 지금 곰이라고 그랬니? 무슨 곰? 곰이 나온다고? 곰이 기차에 타니? 원래 있었니?
- 아뇨, 내려서 만나요. 북극곰요...
- 뭐, 북극곰이 나와? 그래서? 어떻게 돼? 애들이 다쳐? 먹혀?
- 아뇨
- 그럼? 곰이 따라와?
- 아뇨
- 그럼? 애들이 도망가?
- 아뇨
- 그럼?
- 쳐다봐요
- 가만히?
-네
- 쳐다본다고? 그냥?
- 네, 그게 끝이에요.
- 응? 곰이랑 애들이랑 서로 쳐다보는 게 끝이라고?
- 네...
- 그냥 이렇게? 서로 쳐다봐?
- 네... 끝이에요
- 아, 그렇구나.... 그게 끝이구나......(털썩)
결국 아이가, 이야기를 추동하는 원인이나 갈등 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했어요.
이것이 스포일러랑 맞바꾼 대화의 수확이에요. 중요한 거였어요. 나중에 한 생각이지요. 그 땐 중요하단 생각을 못했어요. 스포일러 당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 흠... 그래서 결말에 대해서 말들이 많은 거구나! 응, 이제 알겠다! 그런 거구나!
-......
- 그래서....너는 애들이 죽을 것 같아, 살 것 같아?
- 살 것 같아요...
- 그래? 나는 네 이야기를 들으니까, 애들이 잡아먹히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 ......
- 왜 그렇게 생각했어?
- ......
- 곰이 착해 보였어?
- 아뇨
- 그럼 왜 그렇게 생각했어? 애들이 자기들을 보호할 무기 같은 게 있었니?
- 아뇨...
- 그럼 어째서 살 것 같이 느껴졌어?
- .... 그냥요
- 그래... ? 그렇게 봤구나. 그래, 걔네들이 살 것 같단 말이지?
- 네
- 그래....그렇게 봤구나.... 호오, 알겠다.
-......
저는 스포일러를 당한 대신 아이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어요. 아이가 세상과 사물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에 대해 조금 짐작해 보는거지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오래 전에 알게 된 늙은이는 스포일러 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쿨하게, 그래, 이 영화로 몇 분은 이야기 했으니까....하다가, 근데 이런 생각도 들어요.
나도 이 영화가 똑같이 보일까?
안 보이는 거 아닐까?
4차 공격 당하고, 인터뷰고 뭐고 그냥 보는데, 감독은 합방(!) 때까지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희망적이라는데,
나는 이야기만 들으니까, 잘 모르겠던데, 막 비관적으로 보이는 거 아닐까? 아니면 다른 상징으로 보이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이 영활 두고 욕을 욕을 하네요. 저도 뭐, 사람들 다 좋다는 걸 욕을 욕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쨌든 이 영화는 봐야 할 다른 목표가 생겼네요.
왠지 아이가 본 게 나에게도 보이는지, 우리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맞추어 보고 싶어져서요. 다음에 만날 때 또 얘기하려면 얼른 봐야 하는데 말이죠.
내 눈에도 '아이들이 살 것 같이' 보였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동감'이라고 막 연발하면서, 열린 결말에 대해서 심도 깊게 얘기해야죠.
이거 예매해야겠죠? 아우, 귀찮네요.
모든 집에서 뜨거운 물을 펄펄 끓이는 것처럼 덥네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