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젊은 날의 하명중 씨가 딱 그런 이미지에 맞는 배우입니다. 유현목 감독의 [불꽃], 임권택 감독의 [족보], [깃발 없는 기수],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에서 맡은 배역이요. 임권택판 [택시 드라이버]이자 [광장]인 [깃발 없는 기수]가 특히 그랬고요. (일제 해방 후 나라 전체가 좌우로 나뉘어서 서로 헐뜯고 죽이는 와중에 신문사 사회부 기자가 세상에 환멸을 느끼며 고뇌하는, 사회파 정치 암살 스릴러)
시드니 루멧 감독의 [핵전략 사령부]도 그런 영화죠. 냉전기에 기계 고장으로 핵전쟁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정치/군 관료들이 회의하는 걸로 두 시간을 끌고 가는 토론 스릴러입니다. 멍청하고 과격한 캐릭터는 없고 모두가 이성적으로 사태가 왜 이렇게 됐는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는 무엇인가, 차선은 무엇인가, 일이 터진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피를 말려가며 논합니다.
물론 열한 명의 배심원이 피고의 유죄를 믿어 의심치 않는 가운데 단 한 명의 배심원이 '의심의 여지가 있지 않느냐'며 나머지 열한 명을 설득하려 드는, 같은 감독의 배심원 영화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도 그런 작품이고요.
처음에는 무슨 내용인지 종잡을 수 없어서 지루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처어어언천히 지구의 종말이 눈앞에 드러나면서 모든 이를 옥죄는 과정이 일품인 걸작입니다.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 좋아하시는 분이 많이 계실 텐데, 저는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은 꽤 말이 되는 이야기를 놀랍도록 말이 되게 풀어낸 영화지만 [핵전략 사량부]는 언뜻 들으면 말도 안 될 만큼 과격한 이야기를 놀랍도록 말이 되게 풀어낸 영화라고 생각해서 이쪽을 좀 더 좋아합니다.
옛 게시판 시절에 곽재식 님께서 리뷰도 쓰셨으니 참조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http://djuna.cine21.com/bbs/view.php?id=review&page=1&sn1=&divpage=1&sn=off&ss=on&sc=off&keyword=핵 전략&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