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후기] 10th. 맥베스

노무라 만사이 극단의 [맥베스]. 2013. 명동예술극장.
3월 16일 열 번째 희곡모임이 있었습니다. 3월 이야기를 9월에 쓰자니 난감하네요. 이번 것은 모임 후기가 아니고 그냥 제 개인 리뷰입니다.
이날은 그리스 비극 대신 셰익스피어를 읽었습니다. 희곡 읽고 감상 나눌 틈도 없이 바로 이동해 노무라 만사이 극단의 [맥베스]를 단체관람 했습니다. 일본 전통극 스타일로 셰익스피어를 각색한 그저 그런 퓨전연극일 줄 알고 별 기대 없이 갔는데, 의외로 원작을 충실히 살린 편이었어요. 배우 다섯에 단촐한 세트였지만 부족함이 없었고, 무대연출도 아름다웠습니다.
1. 홀린셰드의 [연대기]
버나드 쇼가 말하길 셰익스피어는 "다른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먼저 했을 경우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 작품 상당수가 표절이나 개작이란 건데요, 엘리자베스 시대 극작가들은 줄거리나 캐릭터를 일종의 공공재로 여겼나 봅니다. 돈벌이만 된다면 소재를 어디서 훔쳐오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쨌거나 평범한 이야기를 비범한, 때로는 위대한 작품으로 바꿔놓는 재주만큼은 천부적이었죠. 셰익스피어가 다시 쓰기 전의 [오셀로]는 무미건조한 멜로드라마였고, [리어왕] 원작에서 왕은 미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해피엔딩이라고 합니다.
[맥베스]는 라파엘 홀린셰드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연대기]에 빚지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역사 혹은 전설을 다루고 있는 이 책 제 2권에는 야심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맥베스와 그를 부추기는 맥베스 부인, 살해당하는 국왕, 세 마녀들은 물론 뱅코우, 맥더프, 맬컴 등 [맥베스] 주조연들이 그대로 등장합니다. 내용도 [맥베스]와 유사합니다. 맥베스는 1040년에서 1057년까지 17년간 실제로 스코틀랜드를 다스렸던 왕이래요. 주군을 시해한 반역자에 수많은 이들을 몰살한 잔인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나중에 맬컴 왕자를 중심으로 반란세력이 형성되어 그리 된 거고 처음 십여 년간은 유능한 통치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홀린셰드의 이야기를 가져오면서 그 부분은 지우거나 축소합니다. 맥베스가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렸던 십 년 세월이 [맥베스]에서는 삭제되었습니다. [연대기]에서 덩컨의 죽음은 뱅코우와 귀족들이 맥베스와 공모한 암살이었지만, [맥베스]에서는 오직 맥베스 부부만의 책임입니다. 선거로 정권교체 하던 시절도 아니고, 반역은 무능한 왕을 제거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반적인 수단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을 셰익스피어는 의도적으로 배제합니다. 가령 [연대기]에서 젊고 유약한 왕이었던 덩컨이 [맥베스]에서는 늙고 인자한 성군이죠. 맥베스에게 명분을 주지 않아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명백한 악당입니다.
설정이 바뀐 데는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 극이 제임스 1세 앞에서 초연된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왕실극단을 후원했던 제임스 1세는 뱅코우를 시조로 하는 스코틀랜드 왕가 사람이었거든요. 네, 맥베스가 죽여버린 그 뱅코우요. 때문에 맥베스를 호의적으로 묘사하긴 어려웠다고 합니다.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했고 국왕의 절대권력을 강조했던 왕입니다. 아첨이라도 하듯 셰익스피어는 제임스 1세가 좋아할 만한 토픽 몇 개를 극에 넣었고 왕위찬탈자의 최후를 비참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극의 주제를 반역자 처단과 기존 질서 회복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더군요. 그들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권력에 영합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한 작가고, [맥베스]는 그의 정치적 보수성을 입증해주는 작품입니다.
2. 맥베스
정치적 보수성. 모호한 말이죠. 제가 생각하는 정치적 보수성이란 이런 겁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인간의 지혜를 대표하는 오이디푸스가 신탁을 대변하는 테이레시아스와 겨루다가 결국 패배하잖아요? 예언을 눈먼 점쟁이의 돈벌이쯤으로 치부하던 오이디푸스는 선왕 살인사건을 조사하다가 자신에게 내려진 근친상간 신탁이 실현됐음을 깨닫고 자기 눈을 찌릅니다. 법률이 규정한 살인죄가 아니라 신이 정해 놓은 금기를 위반한 죄로 스스로를 처벌해요. 사실 이 사건의 1차 책임은 동성애 상대를 교살한 라이오스 왕에게, 2차 책임은 아기를 유기한 이오카스테 왕비에게 있습니다. 무지는 법적 처벌의 대상이 아니죠.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무죄를 주장하는 대신 자해를 통해 속죄를 시도합니다.
자해부위가 성기가 아니고 눈이라는 건 시각경험에 기반한 과학적 추론과 이성의 한계를 지적한 거겠죠. 기원전 5세기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는 합리적 사유와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소피스트들이 여론을 주도하던 곳입니다. 폴리스에 새로운 법률과 제도, 정치체제가 도입되면서 전통적 세계관은 해체되었고, 예언을 비롯한 종교적 관습과 사제들의 교리는 공격받았습니다. 그러한 때에 소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국가행사에서 오이디푸스에 빗대어 소피스트들을 디스하고 기존의 가치를 옹호해 준 셈입니다. (페리클레스의 포퓰리즘적 정치선동과 중우정치를 생각해보면 별로 놀랍지도 않지만.)
그는 인간중심적 사고방식과 합리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을 요구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명제에는 동의하지 않았을 사람이에요. 필멸의 인간보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 혹은 섭리나 운명이 있다고 믿었겠죠. 저한테는 그런 믿음이 보수성이고, 그런 연극이 정치적입니다. 참고로 [오이디푸스 왕]은 초연 당시 비극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았습니다. 오이디푸스한테서 페리클레스가 연상되어 지나치게 정치적이란 인상을 주지 않았겠나 추정합니다. 30년 후 재공연되었을 때는 금상을 받습니다. 시대 상황과 무관하게 연극 자체만 놓고 보면 드라마가 강한 극이죠. (극립극단 리허설북1. [오이디푸스 – 그 연습과 과정의 기록] 61쪽. 강태경 인터뷰 참조)
얘기가 길어졌네요. 여하튼 제 기준으로 보면 [맥베스]는 보수적이지 않습니다. 맥베스가 국왕 찬가에 소모품으로 쓰일 만큼 단순한 악당 캐릭터도 아니고요. 오이디푸스가 막판에 본 게 본질이고 궁극적인 의미였다면, 맥베스가 막판에 깨달은 건 그딴 본질이나 의미 따위는 없다는 겁니다. 오프닝씬에서 마녀들이 노래하듯이 “Fair is foul, foul is fair.”예요. 더러운 것이 깨끗하고 깨끗한 것이 더럽습니다. 진실이 거짓이고 거짓이 진실입니다. 오늘의 충신이 내일의 반역자고 나의 반역자가 저 사람의 충신입니다. 훌륭한 왕이 알고 보니 청맹과니고 개차반이 알고 보니 훌륭한 왕입니다. [맥베스]는 온통 저 메인 테마의 변주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런 세계관 속에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진리나 지켜야 할 윤리 같은 게 들어 있을 리가요. 맥베스는 오이디푸스처럼 자기 눈을 찌르는 퍼포먼스는 하지 않습니다. 맥베스 부인처럼 자살하지도 않아요. 자해나 자살도 존재의 항변이고 일종의 의지인 건데, 맥베스에게는 그런 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자기 고통에 어떠한 의미 부여도 하지 않아요. 당연히 구원도 화해도 없습니다. 굉장히 어두운 인물이에요. 맥베스가 마지막 장에서 토해내는 대사는 이렇습니다.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할 뿐.
무대 위에 있는 동안은 뽐내고 종종거리며 다니지만,
곧바로 잊혀지는 불쌍한 배우.
인생은 소란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바보의 이야기".
Life’s but a walking shadow. 셰익스피어가 워낙 좋은 대사들을 준 덕분이겠지만, 맥베스는 악행에도 불구하고 저 같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현대사에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뻔뻔한 학살자들을 두고 있는 입장에서 정권찬탈 후 멘탈이 붕괴해버리는 주인공 부부한테 연민마저 들고요. 이 작품은 사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맥베스의 사이코드라마나 다름 없습니다. 작가가 떠들썩한 중세풍 환상과 함께 전시하는 것은 살인자의 내면이고요. 혹시 야심이나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하셨다면 실망스러울 겁니다. 주로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얘기거든요. 죄의식? 죄의식과는 좀 다르고요.
맥베스가 연회장에서 본 것은 뱅코우의 유령입니다.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 덩컨 왕의 유령은 보지 않으면서 자객을 시켜 살해한 뱅쿠오의 유령을 본다? 그는 살인을 후회하는 게 아닙니다. 마녀의 예언을 두려워하는 거죠. 자기가 왕이 된다는 예언이 실현되었으니 이제는 뱅쿠오의 자손이 왕이 된다는 예언이 실현될 차례잖아요. 행복한 삶과 친구들을 잃어가면서까지 손에 피를 묻혔는데 그게 고작 뱅쿠오의 아이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함이라니! 괴롭겠죠. 죽은 덩컨 왕에 대해서는 의외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맥베스의 논리에 따르면 살해당한 덩컨은 지하에 편히 누워 잠들어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거에요. 자기는 왕을 죽이는 그 순간 잠도 죽여버려 한숨도 못 자는데, 정작 신의 가호가 필요한 쪽은 이미 죽은 그가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자기 아니냐고요. 하하. 뱅쿠오의 아들 플리언스가 가까스로 도망쳤기 때문에 마녀들의 예언은 깨지지 않았고 맥베스는 여전히 그 예언 속에 갇혀 있습니다. 가해자가 어느새 피해자입니다. 이제 맥베스는 더 이상 먹잇감을 문 늑대나 독수리가 아니라 말뚝에 묶여 사냥개들에게 물어 뜯기고 있는 곰이에요. (말뚝에 묶인 곰: 엘리자베스 시대에 유행했던 동물학대놀이래요.)
3. 마녀들
맥베스는 자기가 하려는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햄릿처럼 얼떨결에 저지른 일도, 오셀로처럼 속아서 저지른 일도 아니에요. 그는 살인을 저지를 경우 어떤 결과가 올 지 거의 정확히 예측했어요. 세상의 질타와 심적 압박감으로 자신이 질식할 것임을 내다봤죠. 그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렸고요. 그 정도로 영리한 자가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을까요?
그건 운명이었을까요, 그의 의지였을까요? 마녀들이 맥베스를 유혹한 것일까요, 맥베스의 욕망이 마녀들을 부른 것일까요? 노무라 만사이의 연출은 전자의 입장을 취합니다. 무대 전면에 거미줄이 크게 그려진 검은 천을 늘어뜨리고 그 앞에 맥베스 부부가 서 있는데 그야말로 마녀들의 거미줄에 포획된 먹잇감입니다. 맥베스가 아니라 마녀들의 의지가 극을 이끌어가죠. 셰익스피어 원작에는 맥베스가 마녀들을 만나기 전부터 권력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는지, 아니면 마녀들을 만난 이후에 그런 욕망을 자각하게 된 건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마녀들이 맥베스와 만날 모의를 하는 장면에서 극이 시작할 뿐이죠. 마녀들은 맥베스의 악몽일까요? 환상일까요? 혹은 현실일까요?
다음은 모임 분들과 마녀에 관해 나눈 얘기입니다.
-마녀들은 대체 뭘까요?
-맥베스의 욕망이 만들어낸 환영이라고 봤어요.
-그럼 뱅코우가 보고 들은 건 어떻게 설명하죠?
-현실적으로 가능한 설명은, 맥베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싶은 측에서 사람들을 마녀로 분장시켜 길목에 배치하고 맥베스를 부추겼다 정도? 마녀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믿지는 못 하겠어요, 맥베스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마녀가 내면의 목소리 아니면 내면의 욕망을 깨운 사소한 사건이 아닐까 해요. 둘 다 일 수도 있고요. 승전한 전쟁영웅들이 지나가는데 누군가 맥베스가 진짜 왕감이라고 말했다면 듣는 순간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면서도 속으론 맞아, 그렇지. 내가 왕보다 못한 게 뭐지? 내가 왕이 못 될 게 뭔가? 실제로 나라를 지킨 건 나잖아. 왕은 자리보전만 했을 뿐이지. 그러면서 자기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만 하고. 그래, 내가 왕이 되는 게 맞지. 지금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 몰라 몰라블라블라 하고 욕망이 깨어나 커지고 합리화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그 소리를 한 사람이 거기 없었을 수도 있고 지나가던 맥베스가 안 들었을 수도 있고 듣고도 웃어넘길 수도 있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한 결정적 순간. 뒤돌아 보면 좀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사소한 사건과 뒤따르는 마음의 파장, 그런 거요.”
-오, 완전 동감.
-전 당시엔 진짜로 그런 초현실적인 게 있다고 믿었을 것도 같은데요.
-하긴 1600년대 영국에서 어떤 아내가 남편이 고자라고 이혼소송을 내자 그걸 인정할 수 없었던 남편 측에서(인정하는 순간 평생 독신예정) “마법에 의한 일시적이고 한정적인-오직 아내 한정- 성 불능”으로 변론했던 사례가 있더라고요.
-푸하하하. 마법에 의한 성 불능이라니! 이런 잔인한 센스쟁이들.
-마녀재판도 하던 시절이니까, 셰익스피어가 마녀들의 존재를 비유가 아닌 실제로 믿었을 가능성도 있겠어요.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거 있나요? 저는 셰익스피어가 재밌겠다 싶은 설정들은 다 갖다 쓰느라 그런 거 같은데요. 무슨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흥행을 위해서요.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해요. 너무 20세기 프로이트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고대 희랍 비극의 신탁처럼 마녀들의 예언은 모호하고 중의적이며 ‘참말 같은 거짓말들’입니다. 거의 말장난이죠. 불안에 떨던 맥베스는 다시 마녀들을 찾아가 “여자가 낳은 자가 너를 해치진 못할 것”이란 예언을 듣고 안도합니다. 모든 사람은 여자로부터 태어나니 그 말은 맥베스가 불사신이나 다를 바 없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나 그 문장의 키워드는 “여자”가 아니라 “낳은”이었죠. 맥베스는 결국 제왕절개로 엄마 배를 찢고 나온 맥더프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예언은 끝까지 맥베스를 조롱합니다.
4. 레이디 맥베스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하므로 다른 산문에 비해 압축되어 있고 함축적입니다. 또한 연기나 연출 등 대사 외의 것들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행간이 넓습니다. 시처럼요. 맥베스 부인은 그 넓은 행간으로 인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인물입니다. 의미심장한 대사들이 대사 이상의 풍부한 맥락을 이 인물에 제공해주고, 그녀를 사악한 마녀부터 공허한 불임여성, 부부 문제로 우울한 아내, 남편의 꼭두각시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설명할 수 있게 합니다.
“난 젖을 먹여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젖을 빠는 아기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요. 하지만 필요하다면 난 그 아기가 내 얼굴을 보며 웃고 있을지라도 이도 없는 잇몸에서 젖꼭지를 빼내고는 가차없이 아기 머리통을 박살낼 거에요.”
덩컨을 죽이기 직전 갈등하는 맥베스에게 맥베스 부인이 하는 말입니다. 이런 대목 때문에 [레이디 맥베스] 같은 작품도 나올 수 있었겠죠. 악령에게 자신의 여성성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하고, 가슴을 젖 대신 담즙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이 여성 캐릭터는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맥베스 못지 않은 강렬함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맥베스 부인이 세 마녀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합니다. 남편의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한다는 거죠. 더 나아가 ‘수염 난 여자’인 마녀들처럼 맥베스 부인의 여성성도 모호하며, 권력의지를 불태우는 장면에서는 남편과 성 역할이 전도된 것처럼 보인다고요. 반면 맥베스 부인을 희생양으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부인이 맥베스를 이용한 게 아니라 맥베스가 부인을 이용했다는 거에요. 아이가 없었던 맥베스 부인은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편을 도울 수밖에 없었으며, 마녀들의 예언으로 운을 띄운 맥베스의 편지가 부인에게는 압박으로 작용했을 거라는 식이죠. 이런 가정은 후반부 맥베스 부인의 붕괴를 설명하기에는 좋습니다. 자기 욕망이 아닌 남편의 욕망을 대리하다가 감당 못 하고 깨진 거죠.
다음은 한태숙의 [레이디 맥베스] 보고 오신 분께서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이 극에서는 섹스도 살인도 레이디 맥베스의 주도에요. 맥베스는 연회에 나타난 망령 때문에 오줌까지 지립니다. 그 연회 이후로 갑자기 레이디께서 심약해지셔서 왕의 얼굴이 아버지를 닮았다며 잊혀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해요. 레이디 맥베스가 남편한테 살인 사주하는 대목 보면 되게 강렬하잖아요. 대체 그 담대한 여자가 왜 그렇게 죄책감에 시달렸는지에 대한 답은 의외로 없었어요. 그냥 처음 해본 일이라 멋모르고 대담했던 건가? 저로선 좀 납득이.. 그래서 제 머릴 쥐어짜내서 생각한 것이 권력욕에 눈이 먼 살인 초짜가 일 벌이고 나니 밀려드는 죄책감에 붕괴한다, 였습니다. 하하.
-원래 심약한 애들이 말 세게 하잖아요. 진짜 강하고 사악한 사람들은 별 말 없죠. 자기 가슴을 쓰디 쓴 담즙으로 채워달라느니, 동정심에 발목 잡히지 않고 끝까지 잔인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느니 하며 필사적으로 기도할 때부터 알아 봤음.
-극은 레이디 맥베스가 몽유병과 불면에 시달리자 맥베스가 주치의를 붙이는 장면에서 시작해요. 주치의가 레이디 맥베스를 치료하기 위해 과거의 일을 자세히 기억해보라고 주문하자 레이디 맥베스는 그 모든 일을 다시 곱씹어보고는 자살해요. 자살이지만 타살에 가까운? 그러다 보니 모든 장면의 주인공이 레이디 맥베스고, 맥베스는 이야길 이어나가기 위한 조연이죠. 병풍.
-[신의 아그네스]의 닥터 리빙스턴 같은 주치의인가요?
-아, 주치의도 보조적일 뿐이에요. 모두 레이디 맥베스가 중심. 그래서 극장(고양 아람누리) 크기에 비해 극이 좀 작아 보였다는… 딱 작은 대학로 소극장 연극이었어요. 그래도 같은 연출자의 [안티고네]보다는 설득력 있었어요.
-아줌마라 그런가 저는 자꾸 부부관계에 집중해서 보게 돼요. 아이가 없는 맥베스 부부의 공허함이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인 것 같고요. 불임 모티브를 중심으로 맥베스 부부와 맥더프 부부를 양 축에 놓고 극을 연출해도 재밌을 것 같은데 그런 얘기는 없었죠?
-부부 관계는 섹스씬(이라고 전 생각하는데)에서 그 부부의 실세가 레이디 맥베스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있고, 맥더프는 거의 말로 초간단히 때우고 레이디 맥더프는 나오지도 않아요.
BBC에서 만든 [맥베스](1983)를 보면 맥베스 부인이 남편 편지 읽는 장면이 거의 베드신에 가깝습니다. 그 영화에서 유일하게 야한 장면인데, 애랑 같이 보기 살짝 민망한 수위로 맥베스 부인이 자기 몸을 더듬고 자위하듯 독백을 해요. 보면서 이 여자가 아이를 잃어서 그런가, 원체 공허하고 무기력하게 살고 있었구나, 저런 얼토당토 않은 편지 한 장에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그러냐.. 뭐,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돌파구 없는 관계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아이는 죽었고 남편은 밖으로 돕니다. 그에겐 자아실현의 장인 전쟁터라도 있지만, 자아 강한 중세시대 영주의 아내가 삶의 에너지를 발산할 만한 데가 얼마나 있었겠어요. 맥베스 부인의 하루하루가 어땠을지 상상해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럴 때 날아 온 남편의 편지는 마녀들의 예언을 들려 줍니다. 참 이상한 편지죠. 길에서 만난 괴상한 늙은 여자들이 자기더러 왕이 될 거라고 했다는 얘기를 왜 나한테 할까.
그럴 때 보통의 아내라면, 남편과 탄탄한 관계를 맺고 있고, 안전하게 지켜줘야 하는 어린애들을 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4막 2장의 맥더프 부인과 같은 반응을 보일 겁니다. 미친 소리 그만하고 얼른 집에 와서 애나 보라고요. 반역에 실패하면 집도 작위도 잃을 테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잃게 될 테니, 그런 헛된 꿈을 꾸는 남편에게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주의자라고 욕이 나올 수밖에요. 레이디 맥베스가 남편의 위험한 야심에 동조한 것은 그녀의 삶이 이미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더 일찍 자살했을 수도 있어요. 맥베스를 움직인 게 권력욕이었다면 맥베스 부인을 움직인 것은 자신의 삶을 구제하려는 욕구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맥베스 부인은 다시 소외됩니다. 부인을 발판 삼아 덩컨 왕을 살해한 후 맥베스는 냉담해지죠. 뱅코우 부자 살해를 계획하면서는 부인의 도움을 원치 않습니다. 희곡으로 읽으면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대목인데(3막1장. 43행 “혼자 있겠소.”) BBC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맥베스가 부인을 배제하는 순간으로 잘 살렸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맥베스 부인의 발병이 갑작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당연해 보였습니다. 부인의 몽유병 장면은 뱅코우 유령이 연회에 등장하는 장면과 더불어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홀린셰드의 [연대기]를 거의 베끼다시피 가져왔다고 해도 그 두 장면 때문에 [맥베스]의 원본성은 셰익스피어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5. 꼬마유령들
해석자에 따라 어떻게도 달라질 수 있는 설정이지만, 텍스트가 분명히 주고 있는 정보는 맥베스 부인에게 아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맥베스, 그에게는 자식이 없다’라는 대사가 4막에 나오기 때문에 그 아이는 이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죽은 걸로 보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아이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 극 전체에 꼬마유령들 이미지를 흩뿌려 놓았죠. 동정심은 ‘돌풍에 걸터앉은 벌거숭이 갓난아이’처럼 악행을 환기시키고, ‘어린 영혼’이 안개 구름 위에 앉아 헤카테를 부릅니다. 마녀들의 가마솥에는 자기 새끼를 잡아 먹은 암퇘지의 피와 함께 ‘갈보가 개천에서 낳아 바로 목 졸라 죽인 아기의 손가락’이 들어갑니다. 신경쇠약 직전의 맥베스는 마녀들의 가마솥에서 ‘피투성이 어린애’ 환영과 ‘왕관을 쓴 어린애’ 모습의 환영을 봅니다.
맥베스가 보는 피투성이 어린애 환영은 태어날 때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나왔다는 맥더프를 상징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갈보가 개천에서 낳아 바로 목 졸라 죽인 아기일 수도 있고, 레이디 맥베스가 언젠가 낳았으나 지금은 죽어버린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맥베스가 사나운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동안 맥베스 부인 혼자 아이의 죽음을 감당했는지도 모르죠. 왕관을 쓴 어린애 환영은 장차 왕이 될 맬컴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미스테리 심령물 말고 맥베스의 심리물로 본다면 그 환영은 왕위를 계승시킬 자식이 없는 맥베스의 회한일 수도 있겠죠.
맥베스의 괴로움 중 상당 부분은 그에게 아이가 없다는 점에 기인합니다. 불모성. 왕위를 물려줄 수 없음에 절망합니다. “모든 것을 다 쏟았지만,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그는 탄식해요. 마녀들이 자신에게 준 것은 ‘열매 없는 왕관’과 ‘헛된 왕홀’ 뿐이라고 이를 갈아요. 자신을 아껴주던 주군을 죽이고, 숙면을 죽이고, 명예도 친구들도 다 잃었는데 그 모든 게 뱅코우의 후손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면 허무할 법도 하죠. 하지만 자기 대에서 권력을 쟁취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저렇게 속상해하는 것을 보면, 그가 진짜로 원했던 건 왕좌가 아니라 아들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6. 맥더프 일가
아이가 없는 맥베스 부부와 달리 덩컨 왕, 뱅코우, 맥더프, 시우드에게는 모두 아이가 있습니다. [맥베스]에서 덩컨 왕을 시해한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맥베스가 아이들을 죽인다는 거에요. 덩컨의 죽음이 무대 뒤에서 처리된 것과는 달리 맥더프의 어린 아들은 무대 위에서 난폭하게 살해당합니다.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극화될 때는 종종 생략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거의 그대로 살린 노무라 만사이의 [맥베스]에서도 맥더프 일가 부분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맥더프 부부는 맥베스 부부와 대조적입니다. 맥더프는 맥베스에 반기를 들고 맬컴 왕자를 찾아 잉글랜드로 떠납니다. 가족들은 스코틀랜드에 남겨 두고요. 폭정에 신음하는 조국과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처럼 비장하게 떠나요. 남편의 편지 한 장에 인생을 걸었던 맥베스 부인과 달리 맥더프 부인은 남편의 선택을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미쳤군요. 아내와 새끼들, 집과 작위를 버리고 자기 몸 하나 피한 것이 지혜라고요? 그건 미친 짓이에요! 그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새들 중 제일 작은 굴뚝새도 자기 둥지에 낳은 새끼들을 위해 올빼미와 맞서는데 그이는 우릴 두고 떠났다구요. 그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부부싸움 14년 경력의 제 눈에는 남편이 운만 떼어도 아내가 귀신 같이 알아 듣고 공조하는 맥베스 부부보다 아내가 남편한테 가차없이 분통을 터트리고 사랑이 없다고 원망도 하는 맥더프 부부 쪽이 훨씬 친밀하고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가 화를 내도 어린 아들래미가 별로 걱정하지 않는 건 이 둘이 평소 좋은 부부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빠를 두고 맥더프 부인과 어린 아들이 나누는 대화가 제법 웃깁니다. 뱅코우 유령 장면과 맥베스 부인의 슬립워킹 장면 못지 않게 재밌는 씬이에요.
7. 뱅코우
맥베스가 보낸 자객한테 머리가 스무 군데나 푹 찔려 죽은 탓에 불쌍해 보여서 그렇지 뱅코우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아닙니다. 덩컨 왕이 자기를 좀 칭찬하자 “제가 만일 폐하의 가슴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만 있다면, 그 열매는 다 폐하께 바칠께요”라고 하트를 날리고, 덩컨 왕이 공기가 맑네~ 한 마디 하면 “네, 그렇고 말고요! 제비들이 새끼를 낳고 사는 곳은 공기가 아주 아주 맑은데요, 여기 추녀 끝, 기둥머리, 버팀벽, 모서리 등 어디에나 제비집이 많이 있는 걸 보니 공기가 정말 좋은 것 같아요~!”라며 필사적으로 아부하는 인간입니다. 맥베스가 언제 우리 한번 마음 터놓고 얘기해보자고 제안해 왔을 때 그는 ‘명예를 지킬 수만 있다면’이란 단서를 달긴 하지만 기꺼이 뜻에 따르겠다고 답합니다. 맥베스가 하여가 부를 때 뱅코우가 정몽주처럼 단심가 부르고 앉아 있진 않았어요.
뱅코우는 마녀들의 예언이 하나씩 맞아 들어가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잠이 들면 ‘망측한 망상들’에 시달리거든요.
“만약 마녀들의 예언이 진실이라면, -맥베스, 그대에게는 예언이 들어맞았지- 그대에게 들어맞은 예언이 나에게 들어맞지 말라는 법도 없지. 하지만 쉿! 입을 다물어야지.”
뱅코우 역시 마녀들의 예언에 충분히 흔들리고 욕망합니다. 그가 맥베스보다 덜 초조해 보이는 까닭은 그의 예언이 맥베스의 것보다 먼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단 맥베스의 예언이 실현되어야 함을 뱅코우는 알고 있습니다.
연극은 덩컨의 아들 맬컴이 왕위에 오르며 끝나는데 그럼 뱅코우의 후손이 왕이 된다는 예언은 어떻게 된 걸까요. 극에는 나오지 않지만 가까스로 도망친 뱅코우의 아들 플리언스를 웨일스 왕실에서 받아 주었대요. 그런데 그 나라 공주를 강간하고 처형당했다던가… 아무튼 그때 생긴 아이가 왕실 집사(스튜어드)가 되었고 그 후손이 스튜어트 왕가를 창시했다네요. 네. 별로 훌륭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8. 그 외
-마지막에 맥더프가 맥베스 머리를 들고 등장하는데, 1600년대 초엽에는 어떤 재료를 써서 그 머리를 만들었을까요?
-셰익스피어는 어떤 출판사 번역이 좋은가요? 저희는 잘 몰라서 이번에 비교해 보자 하고 각기 다른 본을 가져와 읽었습니다. 대동소이했고 뜻이 완전히 다르게 번역된 것도 없었어요. 다만 보통 '간이 콩알만도 못한 놈'이나 '네 놈의 하얗게 질린 낯짝' 정도로 번역된 5막 3장 14행의 'Thou lily-liver'd boy'를 한 책에서만 '간이 백합처럼 흰 놈'이라고 해서 좀 튀었던 생각이 나요. 시인이 번역하신 책이었어요.
-저는 태일사에서 나온 영한대역본 [맥베스]를 추천합니다. 행수가 표기되어 있고, 셰익스피어 시대에 그렇게 읽었음직한 리듬과 템포가 행갈이와 띄어쓰기로 표시되어 있어요. 가령 2막 3장 113행. 맥베스는 자신이 살인범이란 사실을 감추기 위해 호위병들을 죽이고는 사람들한테 덩컨 왕이 승하하신 슬픔에 못 이겨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때 맥더프가 잠시 침묵하다가 "왜 그랬소?"라고 물어요. 그 침묵은 그가 맥베스를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죠. 표기된 띄어쓰기 대로 간격을 두고 읽으면 대사가 입에 더 붙고 재밌습니다. 각운이나 말꼬리 장난도 표현한 거라는데 그건 영어가 짧아서 잘 모르겠고요. 각주가 꼼꼼히 들어가 있고 작품해설도 좋습니다. 펭귄 판과 열린책들 판에는 행 표시가 안 되어 있어 찾아 볼 때 불편했습니다. 펭귄 판의 해설은 책의 절반 분량으로 정보량은 많았는데 해설번역이 저와 안 맞아서 읽느라 힘들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태일사 [맥베스] 2막3장.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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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후기 드디어 끝. 별로였던 작품 씹는 건 쉬운데 좋은 작품 왜 좋았는지 정리하는 건 왜 이리 어려운가요. 셰익스피어는 찰스 램, 메리 램 남매의 이야기책 버전으로 읽어 본 게 다였는데 희곡 모임 덕에 처음 제대로 읽어 봤습니다. 리뷰 쓴다고 뜬금 없이 문자 보내서 마녀 어떻게 생각하냐, 맥베스 부인 갑자기 왜 저런 것 같냐 마구 물어댔는데 다들 친절히 답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다음 모임은 이번 주 토요일(9/14)에 있습니다. 지난번 다 못 읽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마저 읽고 이어서 [유리동물원]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