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니까 봐준다"

PC통신이 유행했던 시절 한동안 푹 빠져서 지냈었습니다. (듀게에도 그런 경험 있는 분들 많으시겠죠.) 동호회에서 요즘 말로 하면 '네임드'로 활동하면서 오프 모임도 나가고 그랬었죠. 공부하겠다고 깝죽 대던 시절이라 전공 관련 글도 활발히 올리면서 게시판에서 토론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에너지가 넘쳤었죠 정말로.

그러다가 어느날 다른 동호회를 갔는데 거기에서 어떤 주제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길래 저도 하고픈 말이 있어서, 원글자의 주장을 나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었어요. 그리고 상대의 반론을 기다리고 있던 찰나에 댓글이 올라왔는데... 그 상대방 댓글이 이랬어요. 


"글 쓴거 보니 학생인 것 같으니까 봐주겠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 납니다만 핵심은 저거였습니다.


학생의 글이 다 수준 낮은 것도 아니고, 나이가 어리다고 다 판단을 제대로 못 하는 것도 아니겠죠. 특히나 나이가 벼슬이 되던 시절은 이미 끝났죠. 하지만 그 때 저는 저 댓글을 보고, 제대로 한 방 맞은 것 같았어요. 그때의 기분을 정 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거구나라는 깨달음이었는지 혹은 이런게 나보다 세상을 좀 더 살았다는 사람의 관용인가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그때 즈음해서 이미 PC 통신에 대한 흥미를 잃고 있었던 찰나에 하나의 trigger로 작용을 했을 뿐인건지. 정확치는 않습니다. 하여간 그 댓글을 본 이후로 여러 다른 사정들이 겹치면서 PC 통신은 차츰 접게 됐어요. 바빠지면서 글도 더이상 안 썼구요.

그냥 그랬다는 거죠.

듀게에 제가 관심을 가지고 글이나 댓글을 보는 몇몇 분들은 뭐랄까... 참 감탄스러워요. 사려 깊고, 현명하고, 핵심을 정확히 짚으면서도 따뜻하고 등등. 저보다 나이 많은 분도 있겠지만 적은 분도 많겠죠. 제가 과연 저 나이일 때에도 저랬었나 또는 저 나이가 되면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더불어, 동호회 활동을 한참 할 당시의 저는 어땠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불킥을... 응?

사실 지난 일주일간 듀게에서 일어났던 여러 일들에 대한 많은 분들의 댓글을 보면서, 보석 같은 분들을 몇 분 발견했달까... 싶어서 몇 자 적고 싶었습니다. 그런 분들을 계속 이곳에서 글로나마 오래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 내지는 욕심이 생기네요. 결국은 그런 분들이 듀게의 정체성이 되는 거고, 그 정체성이 듀게를 계속 오게 하는 힘이 되는 거겠죠.

    • 그런데..trigger만 따로 영어로 표현한 이유가 있을까요?;
      • 쓰고 보니 그렇네요. 별다른 이유는 없고 일할때 가끔 쓰는 단어라 습관이 된 것 같습니다.
    • 마지막 문단, 당사자로서... 공감합니다.
    • 그동안 제가 했던 안다니짓을 일일이 헤아리며 벽차면 우리 집은 원룸이 될 거예요ㅋㅋㅋ
      • 안다니짓 의미를 몰라서 찾아봤네요. 위의 trigger 단어 사용과 함께, 아니 내 어휘 실력이 이거 밖에 안 됐나 싶은데요. 쿨럭...

        옛날 일을 생각하면 정말 그렇죠. 거기에다가, 과연 나는 지금 그 옛날과 비교했을 때 한발씩 전진하고 있는게 맞는지...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참.
    • 그런 분들에게 기부를 해주는 제도를 마련하면 어떨까요? 그럼 집나간 주인장도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거 같기도..
      • 저야 듀게를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그런 분들을 이제야 '발견'한거였겠지만, 그런 분들이 많다는걸 이미 알고 있던 다른 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싶습니다.
        • 원하시는게 토의라면 심포지엄과 원탁토의 중 어디에 더 가까우신건가요? 토론이라면 구성원 이전에 지금의 시스템의 형태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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