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극은 돈만 많으면 괜찮아질까요? 그리고 정도전(가제)에 대한 걱정
어느 순간부터 사극다운 사극은 아예 자취를 감췄죠. 레벨업과 전직으로 수십회를 채우는 RPG 사극이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판타지물이 전부... 여기에 근 몇년 사이에 부쩍 지분이 커진 환빠물도 있겠네요.
매번 사극이 두들겨맞지만 그때마다 반발이 있습니다.(갈수록 이쪽 목소리가 더 커지는게 안습;)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진지빨지 마라'
'고증 일일이 다 따지고 사실에 충실하면 그게 다큐지 사극이냐?'
근데 말이죠. 의외로 사극 매니아(?)라는 사람들의 기대치는 굉장히 낮습니다. 서구의 리인액트 단체의 쇼같은걸 보여달라는게 아니에요.
고증, 극본, 사실에 대한 충실도 등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뭉뚱그려 말하면 '사극다움' '시대극스러움'이라는 어떤 분위기를 원하는 거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역사쪽은 워낙 대중서도 많고 어설프게 아는 척 하기 쉬운 분야라 자칭 전문가가 넘쳐난다지만(심지어 '역덕은 역사전공자보다 더 우수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죠) 실상은 그렇게 깐깐하고 정밀하게 따질 정도의 매니악은 드물어요. 그리고 그 정도로 경륜과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시끄럽게 인터넷 게시판에서 키보드 배틀같은거 안합니다.
그럼 사극 때리는 사람들은 뭐냐? 그 정도로 요즘 사극의 '사극다움'이 상식 이하의 수준이라는 거죠.
일테면 말이 많이 나오는 분야인 갑주와 무기. 이쪽은 좀 과하게 고증 따지는 사람들이 분명 있긴 한데, 재밌는건 오히려 비판하는 쪽에서 'XXX까지 바라는건 무리겠지'라고 먼저 타협한다는 점이죠. 왜냐면 사극 매니아들도 '사극'을 보고 싶은거지 '다큐멘터리'를 보고픈게 아니니까요. 재밌는 드라마가 보고 싶은겁니다.
너무나 뻔히 상식 밖의 엉터리인게 눈에 보이니까 아무리 그럴듯하게 드라마를 짜도 거기에 몰입이 안되는겁니다.
사극다움이란건, 최소한의 진지함이나 인간으로서의 일말의 양심(-_-), 쥐똥만큼이라도 남아있을 '예술가'로서의 책임감과도 동의어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완벽하게 그 시대를 고증하는건 불가능하죠. 관건은 적어도 중등교육을 이수한 사람 정도의 상식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최소수준의 껍데기라는 거고,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극은 어느 순간부터 이 기준선이란걸 아예 포기해버렸습니다. 태왕사신기 이런 판타지물은 아예 논외로 해도 그렇습니다. KBS대하사극이요? 그것도 이미 망작들하고 별도 카테고리로 분류할 깜냥이 못된지 오래죠.
조금만 진지해지고 조금만 '내가 지금 사극을 만들고 있다'라는 책임감이 있으면 되는거거든요. 대사 한마디를 쓰더라도 '이게 시대물다운가?' '배우의 입에서 나왔을때 현대극의 인물이 조선시대로 간듯한 위화감이 없을까?'라는걸 고민 해봤냐는 겁니다. 갑자기 울컥하는데, 이거 고민 전혀 안합니다 이젠.
'진중한 작품을 내면 시청자들이 외면한다'는 헛소립니다. 제작진이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함을 얄팍하게 변명하는거죠. 꼭 중장년층이 아니더라도, 젊고 어린 세대에게도 시대물이 주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작품이 좋으면 어렵고 모르는 말이 나오면 핸드폰 꺼내서 네이버에 검색이라도 합니다. 시대상이 이해가 안되면 지식인에 물어보고 커뮤니티에서 토론도 합니다. 이건 이것대로 사극의 순기능이랄 수 있겠죠.
왜 이게 안될까? 옛날 사극들은 사실 추억에 의한 미화가 많습니다. 그 위대한 걸작이라고 칭송받는 용의 눈물도 막상 지금 보면 허술한 구석이 분명 보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시점 이전의 작품들은 '지금 TV에 송출되고 있는 이 드라마는 사극이다'라는 것을 명백히 선언하는 품위가 있었죠. 만드는 사람도 출연한 배우도 '지금 하는건 사극이다'라는걸 알고 한다는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거요.
돈이 없어서 그런걸까요? 솔직히 이것도 좀 회의적입니다. 제작 환경이라는게 10년 전부다 10년 후에 더 나아지는게 제 상식으로는 맞는거 같은데... 돈 때문이라는 핑계가 사실이라면 앞으로 제대로 된 사극은 영영 못본다는 결론밖엔 안됩니다. 없는 돈이 뜬금없이 생길리가 없잖아요.
저 최소한의 책임감과 '사극다움'을 살리려는 노력만 있다면 출연자로 발음도 안되는 아이돌이나 반짝CF스타가 나와도 상관이 없다는게 제 생각이에요. 오히려 현대극보다도 더 출연자의 질에 관대할 수 있는게 사극이라고 봅니다.
SBS, MBC는... 아예 답이 없죠. 이병훈 RPG도 이제 수명이 다했다고 보고 선덕여왕 나부랭이가 인기사극 행세를 한걸 보면 아예 말을 꺼내기조차 싫어요. 그래도 희망은 KBS인데.. 모르겠습니다. 대왕의 꿈도 망작으로 끝났고 지금 사극팬들이 굉장히 기대하는게 내년 방송할 정도전인데, 저건 도대체 어떻게 만들건가.
최악의 시나리오는 뻔합니다. 그동안 했던대로 하면 됩니다. 정도전은 노예로 전락할 것이고 중국 대륙까지 여행을 다니겠죠. 봉두난발 호위무사의 개칼쇼도 간간이 섞어주고 얼토당토않은 여자 캐릭터 넣어서 로맨스 만들고.. 가장 치명적이게도 환빠의 입맛에 딱 맞는 부분도 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첫 리딩에 이덕일이 와서 강연을 하고 갔답니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죠...
제대로 '진지하게' 만들면 외면당한다는 착각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광개토'태'왕.... 저희 아버지도 꼬박꼬박 보시긴 했지만, 그거 만족스럽게 본거 아닙니다. 그냥 참고 보는거죠. 주연배우 발연기가 문제가 아니라 연출 각본이 엉망진창인 거에요. 배우탓 돈탓 환경탓 시청자탓 남탓만 하지말고 정신좀 차려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