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에 대해서

 게시판 옮긴 지 한참 지나서야 첫 글을 쓰게 되네요. 글은 되도록 안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게시판은 종종 들러서 눈구경하고 가곤 하는데, 요즘엔 정성일의 평론에 대해 약간의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성일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처럼 저 역시 애증이 섞인 감정을 갖고 있어서, 마침 기회 삼아 제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정성일이 좋은 평론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그가 쓴 글들은 그리 잘 쓴 글들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정성일씨의 이름을 알고 그의 평론들에 관심을 가진 지는 꽤 오래됐습니다만, 감히 말하자면 그의 평론들 중에서 논지가 명쾌하게 드러나고 절로 공감이 가도록 설득력 있는 글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그의 인터뷰들이나 단평들은 비할 데 없이 탁월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정성일은 잠언적 스타일이나 순간의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지, 긴 호흡의 글을 건실한 논리로 탄탄하게 엮어내는 문필가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평론은 여러 다양하고 기발하기까지 한 통찰들이 하나의 전체적인 논리 구조 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한 데 모여 있는 형세를 취합니다(제가 보기에는요). 때문에, 정성일의 장문 평론들은 읽고 나면 거의 대부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거기에 그의 괴상한 문체의 문제가 덧붙습니다. 문체 문제는 정성일 본인도 예전에 어디에선가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 생계 때문에 번역 일을 하게 되면서 자기 문체가 망가졌다고 말이죠. 제가 보기에는, 그의 문장들이 이상한 건, 자기만의 일가를 이룬 스타일이 있기 때문도, 배경지식, 교양이 풍부해서도 아니고 그냥 못 쓴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문장 훈련을 제대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할 정도니까요(가령, 아래에서 제가 다룰 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이 때 이데올로기는 이미 소유한 결론을 내세워서 새롭게 드러난 모순을 단지 낡은 문제틀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스크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구조로 바뀌는 어떤 난처한 교환 관계에 놓인다." 이런 문장은 그냥 번역투가 남아 있는 안 좋은 문장이지, 스타일이 있는 문장이 아닙니다. 전후 맥락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만, 무슨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안 읽히는 것이 아니라 끊어야 할 문장을 너무 만연체로 쓴데다 '마스크 효과'나 '난처한 교환 관계'처럼 무슨 전문용어도 아닌 그저 생소한 표현을 설명없이 집어넣기 때문에 읽기 어려운 것입니다). 가끔 그가 아도르노를 인용하며, 잘 읽히는 글은 사유를 방해하고, 그래서 독자가 사유하도록 독자를 멈춰세우는 글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긴 합니다. 그런데 안 읽히는 글이 다 독자를 사유하게 하는 건 아니니까, 이런 아도르노의 인용만 갖고는 정성일 본인의 글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없죠.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을 구사해놓고 아도르노를 들이대는 건 좀 뻔뻔한 구석이 있습니다. 반면에, 정성일의 라디오 방송을 들었거나 아님 강연을 들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의 말투, 화법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그의 화법, 어조는 스타일이 분명히 있죠.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보기에 정성일은 글보다는 말을 잘 하는 평론가입니다. 


 뭐 이 정도가 일반론이라면, 이 일반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간단한 사례 분석이라고 할까요. 마침 어느 분께서 그의 글 중 마음에 든다고 링크 걸어놓은 글이 있으니 그 글을 한 번 보겠습니다. (http://php.chol.com/~dorati/web/cine21/cine21-660.htm)


문제의 글은, 정성일이 2008년 여름에 쓴, <씨네 21>에 실린 "강철중이 회피하는 것은 무엇인가?-<공공의 적> 시리즈의 반복과 차이를 통해 강우석 영화를 들여다보다"입니다. 제가 이 글에서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논지와 무관하거나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쓸데없이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너무 부당하게 자기의 논지에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들이는 이야기도 있고, 때로는 현학을 과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왜 끼워넣는지 의아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선 첫 부분에서 정성일은 강우석이 원본과 그 원본에 대한 두 가지 이형 판본의 방식, 그래서 삼부작의 방식으로 작업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복하되 차이를 주면서 항상 작업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예로 자살하는 학교 이야기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원본으로 하여 반복되며 차이나는 두 판본 "열아홉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와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따위를 이야기합니다. 평론의 주 대상인 "공공의 적" 세 편도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무리하게 세 개로 도식화함으로써, 중간에 놓여 있는 다른 영화들이 다 빠집니다. "공공의 적"만 해도 이 세 편들 사이에 있는 "실미도"와 "한반도"가 빠지죠. 또 "투캅스" 같은 경우엔 강우석이 제작만 맡은 세 번째 영화까지 포함시키고요. 이런 식이라면 그냥 어느 감독이든 필모그래피에서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들을 세 편씩 추려내면 될 일입니다. 강우석이 항상 이런 식으로 영화 작업을 했다는 건 제가 보기엔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반화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일반화해서 하려는 얘기가 '반복하되 차이를 만든다는 것'에 이르면, 이것은 너무 뻔한 얘기 아닌가 싶어지죠. 대중영화 만드는 사람 중에 반복하면서 차이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시리즈물, 장르물 전부 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반복이라는 행위로 되풀이하고, 그 안에서 차이를 우리가 즐기게 만들고 있다. 그건 한국 대중영화 안에서 그 누구와도 다른 방법으로 대중을 유인하는 전술이다"라고 얘기하지만, 저는 이게 왜 강우석만의 독특한 전술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사소한 트집을 하나 더 잡자면, '반복이라는 행위로 되풀이한다'는 구절도 이상합니다. 반복이란 행위를 되풀이한다? 반복이란 행위를 반복한다? 아니면 반복이란 행위를 통해 되풀이한다? 반복이란 행위를 통해 반복한다?). 


 사실, 정성일의 이하 논의는 강우석의 작업 방식의 독특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시리즈 영화의 특성을 논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바르트를 끌어들이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 대목에 현학의 과시와 '비슷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정성일에 따르면 바르트는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은 반자본주의적 행동이라고 얘기합니다. 새 책을 사고 소비하는 게 아니라 있는 책을 또 읽으니까요. 그런데 이 논의를 바로 영화로 가져오면 안됩니다. 책은 한 번 사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을 수 있지만 영화는 두 번 보려면 표를 두 번 사야 됩니다. 영화에서 반복관람 행위는 책을 다시 읽는 것과는 달리 반자본주의적 행동이 아니죠. 글의 논의 초점도 이런 반복관람의 이유, 목적은 더 깊은 이해가 아니라 즐거운 경험의 재현에 있으며, 그를 충족시키기 위해 장르 영화, 시리즈 영화가 생겨난다는 점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르트를 인용한 것은, 제가 보기에는 아예 빼버려도 글을 이해하는 데에 하등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쓸데없는 논점을 추가해서 외려 방해가 되죠. 반복적 독서가 반자본주의적 행동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큰 얘기부터, 책 읽기와 영화관람의 차이라는 문제까지 독자가 생각하게 만들지만 정작 글에서는 이런 논점들은 아예 스쳐가지도 않습니다.


  그럼 정성일은 바르트의 이야기를 왜 넣은 것일까요? 현학을 과시하려고?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정성일은 그 정도의 자기 과시는 이미 졸업한 사람인 것 같으니 말입니다. 차라리, 글을 쓰다가 또는 구상하다가 생각이 꼬리를 물어 연상된 바르트, 쓰다가 논의가 연결되어 떠오른 바르트를 그냥 넣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바르트가 들어간 것은, 이 글이 전체 논지에 따라 잘 퇴고되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정성일 자신의 머릿 속에서 오가는 내적 대화, 독백을 그냥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가설이 좀 더 사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예 일반화해서, 그의 글 상당수는 이렇게 정성일이 자기 자신과 이리 저리 주고 받은 상념들, 단상들을 옮겨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부터,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자폐성, 분명 대화를 주고 받는 데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질문하는지 모르겠고 어디에서 대답이 되는지 모르겠고 왜 논의가 이렇게 튀어버리는지 이해가 안 되는 그 이상한 사고의 흐름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보통 글을 쓸 때에는 그런 자기와의 대화(이 대화에서는 다 전제되고 생략되는 것들이 많죠)를 거치지만, 그런 독백으로부터 벗어나 타자인 가상의 독자와 대화할 때 최종 원고가 나옵니다. 즉, 혼자 사색할 때에는 설명하지 않았던 것들을 글로 쓸 때에는 다 설명하고 해명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정성일의 글에는 그런 부분이 빠져 있거나 많이 부족합니다.


 여기에서 제 논의를 마쳐도 됩니다만, 조금 더 글을 따라가보죠. 정성일은, 이야기의 원형이 있고 그 이야기의 컨벤션만을 가져온 다음 규칙 안에 변형하는 장르물과 아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시리즈물의 차이를 묻습니다. 그런데, 과연 장르물과 시리즈물이 명확히 구분이 될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가 가져온 움베르토 에코의 이야기가 그 차이를 잘 해명해주고 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에코는, 시리즈물의 재미는 그것이 일종의 게임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뻔한 이야기가 새로운 정보들로 포장되어 반복의 지겨움을 면하게 해준다고 말합니다(정성일에 따르면). 정성일은 이 대목에서 정치적인 논의로 옮겨갑니다만, 그 전에 이런 에코의 인용이 과연 장르물과 시리즈물의 차이를 해명해줄까요? 당연히 시리즈물도 결코 똑같이 반복하지 않습니다. 시리즈물에도 변형이 있죠. 정성일은, "그러나 여기에서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의 모형이 있고, 그 이야기의 컨벤션만을 가져온 다음 규칙 안에서 단지 변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시리즈물[...]이 등장했을 때 그 어떤 것도 새로울 것 없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가 에코를 빌어와 이에 대답하는 내용은, 장르물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바와 그닥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 얘기는 이렇습니다. 정성일은 방금의 질문 직전에, 성공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장르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고전적 설명이라고 얘기해놓고, 마치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일 것이 있는 양 방금의 질문을 제기합니다. 시리즈물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바는, 장르물에 대한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후의 내용을 읽어보면 변별점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에코의 이야기도 사실 별반 새로울 것 없이 다들 아는 얘기입니다. 장르물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바는 무언가 겉으로는 새로운 것들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그 구조는 동일하고, 그래서 관객은 차이와 새로움의 표면 하에서 안전하고 또 게으르게 동일한 구조가 반복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는 정성일이 말하는 "장르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고전적 설명"에 이미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런 고전적 설명(또한 상식적 설명)을 제시하고 자신의 논점(장르 영화 또는 시리즈 영화의 정치성)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좋은 글이 되겠죠. 


 아무튼 이로부터 정성일은 시리즈 영화의 정치성을 논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시리즈 영화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더라도 결국 동일한 구조 속에 들어가며 이 구조는 모든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아예 제기조차 안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거죠. 이건 그냥, 새로움의 포장 속에 있는 불변의 구조라는 장르 영화(또는 시리즈 영화)의 고전적 설명의 다른 판본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그 전체적인 논지에 있어서 정성일의 글이 별반 새로운 통찰은 보여주지 못하는 대신, 자꾸 논점을 벗어나는 인용들, 쓸데없이 주의를 분산시키는 문제제기들 등으로 인해 읽어내기는 고역스럽다는 점에서, 그닥 좋지 못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의 글이 가진 비경제성을 지적하는 것은, 단지 논술문 형식으로 깔끔하게 잘 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들인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 즉 통찰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의 해석이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두겠습니다. 그의 글 후반부에서 하는 얘기는 간단히 추리자면, 강우석의 "강철중1-1"(또는 "공공의 적")이 어떤 대의, 정의의 명분으로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하며 폭력을 행사할 때, 민주주의의 거추장스러운 절차들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고 파시즘의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것입니다. 정성일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면서 추가적인 논점을 제시합니다. 강철중은 체제를 대표해서 체제가 낳은 악과 싸우기에, 악과 싸우면서 체제를 유지하려 할 수록 점점 더 악은 체제에 의해 확대재생산된다는 점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실 지적할 만한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사소하게는 <리쎌웨폰>이 왜 "흉기"가 아니라 "법의 무기"인가부터해서, 왜 강철중이 법치주의, 절차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대립한다고 이야기하는지 등을 거쳐, 어떻게 영화들과 그 영화들이 나온 시기들의 정치적 상황을 무리하게 도식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정당화되는지까지 말이죠. 그 밖에도 도대체 강우석의 반복 속에서 우리가 즐기는 차이는 뭐고, 그의 독특한 전략은 무엇인지(<더티 하리> 같은 선례가 이미 있죠.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강우석의 차이와 반복은 그냥 안티 히어로 시리즈물의 관습 안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습니다) 같은 질문은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또 이런 대목은 어떻습니까. "만일 더 역겹게 만들기 위해서 조규환이 아버지를 죽인 다음 알리바이를 내세우기 위해 어머니를 살려두는 대신 이 광경을 본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 위해서 섹스를 한다면 어떨 것인가? 말도 안된다고?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정성일이 상상하는 상황은 오히려 오이디푸스의 정반대가 아닙니까? 오이디푸스는 친부살해 및 근친상간을 모르고 했고 그 행위에 대한 죄의식을 명확히 인식한 사람인 반면 조규환은 그렇지 않은데 왜 오이디푸스가 그런 상상의 개연성을 뒷받침해줄 사례로 언급되어야 할까요? 오이디푸스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님은 둘째치고라도, 오이디푸스의 예는 오히려 모르지 않고는 결코 존속살해 및 근친상간을 범할 수가 없다, 인간이 본인의 의지로 그런 일을 행할 수는 없다는 주장의 예가 되어야겠죠. 여기에서 정성일의 사고는 너무 성급하고 엉성하게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적할 것들을 다 지적하자면 이 복잡한 글을 더 복잡하게 파헤쳐야 하니 그만두고, 이 두 논점 자체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사실 이 두 논점은 상이한 것입니다. 전자는, 정당한 명분은 있으되 실질적으로 무력한 제도, 절차, 법에 대한 불만의 문제이고, 후자는 작은 악과 그 악을 낳는 더 큰 악 사이의 갈등이라는, 명분 없는 대립의 문제입니다. 저는 이 두 개가 잘 연결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강철중이 민주주의적 법 절차를 무시할 때, 그는 더 이상 체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그 체제가 근거해 있다고 믿는 보다 상위의 차원(정의나 선 같은 추상적 명분)을 대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체제 자체가 바로 형식적 절차의 무력함이란 측면에서 비판당하고 거부당하는 것이, 안티 히어로 영화들의 관습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안티 히어로는 단순히 체제를 대표하여 악과 싸우는 게 아니라 체제와 악 양자를 초월하는 선과 정의의 입장에 섭니다. 강철중은 명분 없는 대립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명분 하에서 싸우고 그래서 그가 초반에 보여주는 비리들은 영화 후반에 이르면 사소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건 그저 무력한 절차주의 내부에서나 문제가 될 것들이니까요. 그러므로 정성일은 강철중보다 "추격자"의 엄중호가 더 나아갔고 더 실재에 다가가 있다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철중은 사실상 비리 경찰로 체제 외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엄중호는 체제가 악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통찰에 이르지 못합니다. 엄중호는 여전히 안티 히어로로서 체제 외부에서 어떤 절대적 명분을 위해 악과 싸우니까요. 이런 안티 히어로 영화의 구조상, 작은 악들을 확대 재생산하는 체제의 악 속에 사로잡힌, 강력해보이지만 꼭두각시에 불과한 집행자의 문제는 제기될 수 없습니다. 그 문제가 제기된다면 그 영화는 더 이상 안티 히어로 영화가 아니겠죠. 정성일은 아마도, 강우석이 안티 히어로 영화의 경계에 서 있고 그 경계의 애매함이 그의 영화들에 주목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강우석은 여전히 안티 히어로 영화의 경계 "안에" 있을 뿐입니다. 그가 아무리 그 경계에 가까이 다가간다 하더라도 말이죠. 어쨌든 이쯤에 이르면 이제 제 논의는 강우석의 강철중 연작에 대한 입장 차이, 해석 차이의 문제가 되어 버리니까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


  어쨌든, 그가 강철중 연작에 대해 제시하는 해석도 제가 보기에는 그리 명확하지도 설득력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강철중 연작에 대해 이런 정도의 이야기라면 이게 과연 그렇게 통찰력 있는 이야기인지 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다들 느끼고 있는 이야기라고 해서 평론가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읽는 데 상당한 수고를 들인 결과 얻어진 이야기가 그런 것이라면 그 때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처럼 저 역시 정성일의 영화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 그의 변함없는 영화 사랑과 열정을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그 태도 면에서 그는 독보적이고 귀감이 될 만합니다. 그에 더해, 그가 영화에 대해 보여주는 미학과 윤리의 관계에 대한 근본 성찰들은 매우 값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의 글 속에서, 그의 분석 속에서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기보다는 그의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보다 잘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정성일의 평론들 중에서, 과연 고전적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만한 영화 분석이나 어떤 독특하고도 체계적인 영화 이론이 있을까요? 정성일은 어쩌면 영화란 무엇이고, 영화 평론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루는 이를테면 메타 평론에는 탁월하나 구체적인 작품 평론에서는 그보다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물론 그의 영화 안목이 뛰어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글을 그리 잘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 정성일 이후 평론가의 자리가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한 미디 빠뜨릴 뻔했습니다. 이상의 이야기들은 당연히 제가 그의 글을 보고 이해한 한계 내에서 판단하고 추론한 것들입니다. 제가 그의 글의 진면목을 몰라보고 완전히 오독했을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본문에 다소 과격할 수도 있는 표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들은 어쨌든 "제가 보기에는"이란 구절의 한계 안에 온전히 놓여 있는 것들입니다.

    • 이 글 꼭 읽어보고 싶은데 제가 눈이 워낙 나빠서, 모니터로는 긴 글을 읽기 힘드네요. 출력해 놓고 시간을 내서 차근차근 읽어볼게요. :)
      한때 정성일 평론가 글을 모아둔 사이트에 하루 종일 들어가서 그의 글을 읽고 그가 말한 영화를 보고...그렇게 지냈던 적이 있었죠.
    • 오, 정성일씨 글보다 더 잘 읽히고 쏙 들어오는 글인 듯.. 뒷부분은 글씨가 일렁거려서 제대로 못 읽었지만, 중반까지는 호오.. 하고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지면이 아니라 모니터로 장문읽기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네요 OTL) 근데 왜 다들 그렇게 애증을 느낄까요, 호호.
    • 좋은 글입니다. 공감합니다.
    • 저도 정성일씨 글은 좋아하지 않는데,
      키노를 애지중지하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때문인지 '증'보다는 '애증'에 가까운 기분을 느끼곤 하죠ㅋ
    • 추천하고 싶은 글이군요. 정성일씨에 대한 불만을 딱 집어 얘기하기 힘들었는데 제대로 짚어준 것 같네요.
    • 막연하게 느끼던 것을 잘 정리된 글로 읽으니 좋네요.
    • 잘 읽었어요. (본문과 별개로 raven님 글을 볼 수 있어서 기뻐요 ㅎ)
    • 오, 명문입니다!
      감사해요.
    • 잘읽었습니다. 정성일씨 평을 보면 한장면 장면마다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죠. 그것에 대해서 설마 그정도로 만들까 하고 의심을 하면 감독을 무시하는거다라고 하고 아예 논의를 막아버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죠.
      그러다가 박찬욱과 대담에서 정성일이 자꾸 사소한거 하나하나 물어보니까 자기는 그런 잘보이지 않는것까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했죠. <엘리펀트>라는 영화의 화면비율 1.33:1을 가지고 왜 영화화면비 1.85:1이 아닐까 하다가 1.33대1의 비율을 폴라로이드 사진의 비율이고, 1회성의 사진을 찍고 있는거고, 중간에 컴퓨터 게임 화면구도를 보여주고, 화면구도를 노트북 사이즈로 만들어서 비디오 게임처럼 실제 인물을 쫓아간다고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다른 영화평론가가 그건 그냥 애초에 TV영화로 기획된것라서 화면비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는 하지 말라고 했던일이 생각나는군요.
    • 정성일씨 글이 어떤 걸 떠나, 개인적으로 영화로 인해 누구보다 행복한 평론가겠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그 애정과 열정은 존중하고 감탄할 만하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 댓글 달아주신 분들 다들 긴 글인데도 불구하고 관심 갖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잊지 않고 기억해주신,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마음의 빚이 늘어가고 있는 '난데없이낙타를'님도 오랜만에 글을 나누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게시판에 가끔 쓰시는 글들은 잘 보고 있습니다.
      정성일씨에 대한 애증은 아무래도 그래도 그만한 이가 영화평론계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좋은 평론가들도 많겠지만 90년대 중후반의 그 영향력을 감안하면 독보적이죠.
      사과식초/그 "엘리펀트" 평은 사실 저는 꽤나 재밌게 읽긴 했었습니다ㅎㅎ 최근 임권택 감독과의 대담에서도 그런 해석의 한계 문제가 불거지긴 했죠. 딱히 답은 없습니다만, 적절한 해석의 한계를 긋는 문제는 항상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 사과식초, raven/ 근데 평론가들의 그런 의미 부여들이 항상 무의미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말씀하신, 얼마전 게시판에도 올라온 임권택 감독과의 대담에서,
      정성일이 지적한 부분들이 감독의 "의도"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읽는 독자들에게 감독의 "무의식"이나 "배경", 혹은 "버릇"을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영 헛다리는 아니었던 것 처럼요.
      (듣는 감독님 본인께서는 좀 짜증이 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
      다만 엘리펀트나 몇몇 경우들과 같이, 그 헛다리가 "지나치게 엇나가서" 작품 해석은 뒷전이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실 때가 많다는 게 참 안타깝기는 하죠.

      윗분들의 말씀을 반복하자면, 저 또한 로드쇼와 정은임의 영화음악 세대로서 애증이 엇갈리는 가운데 "애"가 좀 더 큽니다.
      그리고 그 열정과 애정, 태도와 성찰은 충분히 존중-혹은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평론가 이야기가 게시판에 올라올때마다 반복해서 적는 댓글입니다만,
      저는 이분이 '말'지에 적어내던 영화평들이 그리워요.
    • 이렇게나 명쾌하게 반박하는 글을 너무나도 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정성일씨의 몇몇 비문에 대해, 고등학교 언어 수준의 범위에서라도 접근해서 왜 그게 비문인지 쓰고 싶었어요. 갈가마귀님처럼 이렇게나 간결하고 멋지게 내용에 대해 반박할 수준은 안되고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시 곱씹어 읽어 보아야 할 듯.

      그나저나 영화 평론과는 별개로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는 과연 어떤 것일지 정말 궁금하긴 합니다..
      개봉은 하는 건가요?
    •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오늘 제 생일인데, 그 어떤 선물보다도 이 글이 절 더 기쁘고 즐겁게 하는군요. 잘 쓰여진 글이란 정말 사랑스럽지요. 감사드립니다.
    • 전 반듯하고 정연한 길을 따라 정해놓은 목표로 도달하는 글이 아니라서 더 좋던데요. 길을 헤메는 느낌의 수다 떨기라고나 할까? 그래서 설득력이라는 부분은 별로 생각을 못해봤는데 raven님 방식대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싶네요.
    • 댓글 달아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고 기억해주신 trebuchet, morcheeba님께도 감사드리고요. cksnews님께 이 글이 그렇게 즐거움을 드렸다면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문에서도 적은 대로, 저는 정성일씨의 평론들에서 엿볼 수 있는 반짝이는 통찰들을 높게 평가합니다(물론 무리수로 보이는 것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전체적 구조 안에 하나의 일관된 논리로 잘 엮여 있지 못하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이죠. 헤러웨이나 버틀러의 글들을 읽어본 건 없습니다만, 이들의 글이 정성일의 글과 비슷하다는 '주관적 판단' 하에 양자 모두를 동시에 정당화하거나 부정하거나 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어쨌든,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정성일 평론가는 그 누구보다도 영화의 "논리"를 중요시하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이 점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soboo님처럼 읽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것은 정성일의 의도는 아닐 것 같습니다. 평론이란 객관적 기준 없는 취향들의 장 안에서 결국은 어떤 나름의 객관적 입장을 세우는 작업입니다. 척도 없는 장 안에서 일어나는 척도의 추구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진지한 평론은 이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정성일의 평론이 가려고 하는 자리도 그 긴장 속에 있다고 봅니다.
    • 그렇지는 않을거 같아요. 정성일씨 스스로 말하길 "남의 이야기를 비평하는 작업이 아니라 영화를 만든 창작자인 감독과 그의 영화를 평가하는 관객들을 이어 주는 중계자라고 생각한다."고 했거든요. 그렇게 중계하는데 있어서 뚜렷한 논리적 귀결로 이끌어가는 글쓰기 방식은 왠지 어색할거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엔딩크레딧이 올라오는 순간 '응 뭐야?' 하는 느낌이 드는 영화들이 있죠? 전 그런 영화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에 대하여 '뭔 이야기를 하려는건지 모르겠어. 좋은 영화가 못되'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거에요(적어도 듀게라면)
      다른 사람이 만든 영화를 관객에게 중계해주려는 오지랍 평론가에게 수다떨기식 글쓰기 방식이 가장 그럴듯한거 같아요. 적어도 저같은 관객은 중계인의 수다가 영화를 더 곱씹고 되씹는데 굉장히 부드럽게 작용하고 있거든요.
    •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글이네요.
      위에서 사과식초님이 말씀하신 부분도 그렇지만 정성일의 글은
      종종 그 스스로도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건지 모르는 것처럼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 soboo/정성일씨가 그렇게 중계자 역할을 자임하는 영화들은 우선 정성일씨 자신의 필터로 걸러진 영화들입니다. 정성일의 영화 사랑은 매우 진지하고 그런 만큼 가혹하죠. 그의 글을 읽을 때에는 이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정성일은 늘 영화의 친구라고 이야기하지만 이 영화의 친구는 일관되고 철저한 어떤 논리성과 윤리성을 갖춘 영화만을 친구로 삼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그 질문을 "견뎌내는" 영화들을 사랑합니다. 물론 영화들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평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역시 "응 뭐야?"하는 영화들을 좋아합니다만, "응 뭐야?"라고 질문하게 만드는 평론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평론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한에서 정성일은 그런 타입의 평론가가 아닙니다.
    • 제가 평론도 예술이(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구요;;
      '응 뭐야?'라고 질문하게 만드는 평론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거죠? 전 무척 좋아합니다. 평론이 답을 제시할 필요는 없죠. 이미 답을 제시하는것들이 너무 많고도 많은 세상이기도하구요. 관객들 스스로 많은 답들을 유추해볼 수 있는 거리들을 들쑤셔주는 것만으로도 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들 쑤셔대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만 어차피 기호의 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 soboo/문제는 정성일이 평론도 예술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래서 그의 평론을 그렇게 읽어야 하는가이겠죠. 평론에 대한 취향과는 별개로 정성일의 평론이 어떤 성격인가가 여기에서 문제니까요. 저는 정성일이 자신의 평론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했으리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최근 인터뷰에서도 나타나듯, 그는 자신의 평론을 그것이 쓰인 시기의 한계에 갇힌 것으로 보고 있으니까요(그는 심지어, 남는 건 영화이지 평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논리적, 일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평론은 답을 내놓는 평론이 아닙니다. 제가 정성일이 답을 안 내놓고 있어서 그의 평론이 안 좋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죠. 논증을 하는 부분에서 논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논증이 없는 부분에서 논증하라고 요구한 게 아닙니다), 생략해도 하등 상관 없는 이야기(내용을 풍부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독자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기능을 하는)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문제 삼는 것이죠.
    • 팬 입장에서 정성일 시비 나올 때마다 싫었었는데 이렇게 근거가 잘 갖추어진 글을 보니까 좋습니다 ^^;;ㅠㅠ raven님의 논의는 정성일의 각 평론에 대한 반론으로 더 걸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일을 비난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문체나 태도에 대해 막무가내로 늘어지고, 대상이 되는 영화와 평론에 관해서 성실하게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던 것 같아요. 내용에 관한 반론이 활발하게 오가면 여러모로 좋을 텐데 말이예요.
      저야말로 글을 잘 못 써서 두 분 글을 파고들면서 평하기는 어렵지만 정성일이 뛰어난 영화 평론가인 것은 무엇보다 영화의 특성에 근거해서 평론을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문체에 관해서 특유의 스타일인지 못 쓰는 글인지는 사실 좀 오락가락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성일의 좋은 평론은 영화의 언어를 바탕으로 생각을 밀고 나가면서 얻어진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해요. 그 표기대로 '쇼트'와 '씬'에 근거해서 영화를 비평한다는 점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간단한데 별 내용이 없거나 현대 이론을 그야말로 교조적으로 따르는 평론이 더 문제라고 봐요. 특히 가까운 몇년 사이에 씨네21에 실렸던 비평들에 대한 불만입니다..
    • 정성일씨는 평론이 하나의 독립적인??! '창작행위'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들어왔습니다. 정성일씨와 이야기를 나눈 지인들이 들려준 이야기로는 그렇다더군요. 그러니 객관적인 증거는 결코 못되겠죠. 어차피 전해들은 이야기이고. 그런데 오랫동안 정성일씨의 영화평을 좋아했던 독자로서 정성일씨라면 그런 태도일것이라고 생각이 되더군요. 이 부분은 결국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끼리의 논의로는 공허할듯 하군요.
      raven님의 이번 글의 의도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성일 글쓰기의 '내재적 한계'를 따저 보시려는거 아니었나요? 그런데 막상 정성일씨 영화평론을 오랫동안 무척 격하게 좋아하고 즐겨온 독자의 입장에서 '길을 헤메는 느낌의 수다'라서 좋다고한 표현한 부분에 대해 단호하게 그것은 평론으로써 옳지(좋지)못하다고 집요하게 단정 지으시려는 것이 느껴지는군요. 무언가 어긋남이 느껴지는거 같아서 이만할게요.
    • 다망/제 논의는 그의 평론 하나에 대한 각론이 아닙니다. 대상이 되는 영화와 평론을 성실하게 비판하려면 일단 그 평론이 그 영화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나부터 들여다 보아야 하는데, 정성일의 평론은 그 "일단 들어보자" 자체가 어려운 평론입니다. 제가 논의한 것은 왜 그렇게 읽기 어렵나에 대한 것입니다. 안 좋은 문장들도 꽤 있고, 논증도 헐거운 대목이 종종 있으며, 요지를 파악하기 어렵도록 논의가 산만하게(불필요한 이야기들도 들어가면서) 전개되기 때문이란 것이 그 이유입니다. 정성일은 그 어느 평론가보다도 장문의 평론들을 쓰면서 굉장히 본격적으로 영화를 다루는 것 같지만, 사실 읽어보면 그가 그 영화에 대해 얘기하려는 전체 요지가 잘 안잡힙니다. 대신 중간 중간 탁월한 통찰들이 보이긴 하지만 말이죠. 제가 보기에는, 직관적이고 잠언 스타일에 적합한 이가 논리를 갖춘 긴 글을 쓰려할 때 잘 정리가 안 되면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도 그가 말하는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데 일단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잘 안 들어오고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 비판한 것이죠.
    • 8월님, 반갑습니다.
      soboo/'길을 헤매는 느낌의 수다'가 평론으로서 옳지 못하다는 일반론이 아니라(그런 평론도 있을 수 있겠죠. 별점 평가나 인상 비평도 나름의 역할이 있는 것처럼요) 그게 정성일씨가 지향하는 평론과 일치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정성일의 평론이 가장 진지한 평론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평론은 길 헤매는 수다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제 이번 글의 의도야 정성일 글의 내재적 한계까지도 아니고 그저 왜 제가 정성일의 글이 아이디어들은 훌륭하나 잘 쓰지 못한 글이라고 보는지 설명하려 했던 것이죠.
    • '길을 헤메는 느낌의 수다'라는 표현은 정작 raven님이 정성일씨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인정하여 받아서 해본 제 표현이었어요. 그런 표현이 raven님 기준으로는 적절치 못했던 것이었군요.역시나 애초부처 어긋났던 것이었으니....더더욱이나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 raven/ 그렇군요..인상비평을 문제 삼으면서 저도 평론을 인상적으로 봤네요. 또는 soboo님 언급처럼 정성일 글에 대한 의견은 잘 쓴 글에 대한 생각에 따라 어긋나는 것 같아요.
    • 잘 읽었습니다. raven님 말처럼 정성일씨의 인터뷰는 정말 기가 막히죠. 어느 영화 서적보다 제게 영화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 것이 정성일씨가 여러 감독들과 함께한 인터뷰들입니다. 그런데 정성일씨의 개별 영화비평 중에서도 훌륭한 비평이 많습니다. 전 그의 글에서 놀라운 통찰력을 발견한 적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평론을 추천하자면,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과 <극장전> 비평문입니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8818 (정성일씨의 생활의 발견 비평) /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4&article_id=31538 (정성일씨의 극장전 비평) 이미 읽어 보셨을 수도 있지만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 이 글들이 정말 훌륭한 영화비평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짧게 댓글을 달수밖에 없는 것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raven님은 정성일 글의 요지를 알기 힘들다고 하셨는데,
      raven님께서는 본인의 말과는 달리 대부분을 파악하고 계실거라고 감히 짐작해봅니다.
      그리고 정성일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 정성일 이후 평론가의 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자리는 아마도 허문영이 한발 찜하고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의아한건 다소 논리가 점프하고 장황설이기는 할지라도,
      그건 정성일씨가 지사적 글쓰기를 하는 격문성 글을 쓰는데 자신을 위치시킨 때문이지
      글을 못쓰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초부터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독자라면 나름대로 스킵할건 하고, 몇 몇 통찰과 요지를 받아들이게 되지 않나요.
      <극장전>같은 평론으로 나도 정색하면 이런걸 쓸수있다는걸 보여주기도 했구요.
      오랫만에 씨네21에 글떴다 해서 들어가봤더니, 다큐<호수길>을 추천해서 저같은 사람이 찾아가게도 해주는데요.
      raven님은 그가 좋은 평론가가 아니라는데, 과연 그런가요? 그럼 좋은 '영화선생'정도로 이름붙여야하나요?
    • 회전문/답변 감사합니다. 회전문님이 링크하신 두 편의 평론은 제가 본문에서 지적한 단점들이 잘 안 보이는, 상당 부분을 영화의 흐름과 구조에 대한 분석과 서술로 채운 글들이죠. 이 평론들은 그의 다른 평론들과 달리 읽기 어렵지 않습니다. 정성일이 이렇게만 써준다면 제가 본문에서 거론한 문제들은 제기되지 않겠죠. 그래도 저는 이 평론들이 모범적인, 전범적인 평론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통찰의 가치는 인정하나, 그 표현 형식 면에서 잘 쓰인 글, 모범이 될만한 글이라고까지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제 주관적인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를 논의하자면 또 하나의 긴 글이 필요할 테니 여기까지 해두겠습니다. 정리하자면, 제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종류의 평론은 글의 기본 짜임새 면에서 문제가 있다 한다면, 지금 거론하신 좋은 평론들의 경우에는 내용 전달 면에서는 문제가 없으나 글의 구조, 짜임새가 그만큼 탁월하거나 뛰어나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즉 글의 짜임새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나 또 명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는 것입니다(거듭 말하지만 여기에는 제 주관적인 평가가 들어가 있으니 이 지점에서 입장 차이를 두고 논의를 멈추겠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새벽길/아마 회전문님께 드린 답변 속에 그 의아함에 대한 제 해명이 어느 정도 함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좋은 평론가가 아니라고 얘기한 것은, 그의 평론이 좋은 평론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도 그 내용 면에서가 아니라 형식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그는 좋은 글쟁이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의 글이 그렇게 잘 쓴 글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저는 본문에서 글 하나를 잡아 살펴본 것입니다. 그 때 문제는 제가 취향에 따라 설정한 좋은 글에 대한 어떤 기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글의 논리적 흐름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됩니다. 논지가 제대로 정리 안 된 글인데 좋은 글이라 할 수는 없죠. 그의 글이 장황하고 논리적 점프가 왕왕 있는 것은 그냥 퇴고가 제대로 안 됐기 때문이지 무슨 지사적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사적 입장과 그런 문제는 별개의 것이죠. 다음으로 "극장전" 같은 평론은 그런 일차적인 비판으로부터는 비껴나 있을 수 있는데, 그에 대해서 저는 이제 제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그것도 그렇게 잘 쓴 글, 모범적인 글이라고까지는 못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이 점에 대해 따로 논의할 수 없는 점 양해바랍니다). 이런 비판이 정성일이 영화에 대해 사유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격마저 박탈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말을 더 잘 하는 평론가라고 했던 것이죠. 요약하자면, 정성일은 분명 좋은 평론가이지만 좋은 글쟁이는 아닙니다.
    • raven/답글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이해가 잘 되었고, 의견에 거의 동의합니다. 여기서 '거의'라는 표현을 쓸수밖에 없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뜻 좋은 글쟁이가 아니라고 말하기가 정성일씨에게 미안해서요.^^
    • 새벽길/앞에서 댓글에 대한 인사를 빠뜨렸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 자신도 제 얘기에 "거의" 동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ㅎㅎ 저도 항상 틀릴 수 있고 잘못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허문영 평론가의 글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더 주목해봐야겠습니다.
    • 이 글의 댓글에서도 그렇고, 예전의 글들에서도 그렇지만, 저는 정말로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왜 정성일의 문장(또는 문체,..) 자체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은 것인지요.
      어렵고 복잡한 게 아니라 그냥 못 쓴 문장을 두고 억지로 내용을 판단하도록, 그런 문장에 익숙해지도록 강요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니 '내용은 잘 모르니까 그냥 시비건다'고 못박으시면;;;

      전 그런 문장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비판받을만하다고 생각하거든요.
    • 프로스트 /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요, 사실 제대로 된 문장인가 여부를 판명하는 것은 문체를 따지는 것과도 다릅니다.
      보통 문체라는 것은 '제대로 된 문장'들로 짜여져 있는 글에서 풍기는 글쓴이의 체취같은 것이고, 비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그 아랫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적인 영역이죠. 애시당초 이 논의는 정성일의 이상한, 혹은 잘못된 문장 하나에서 시작된 것인데,
      저는 그 문장이 비문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문인 것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머리카락 하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비문은 비낀 것 같기도 하더군요. 여하튼 이같은 논란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과히 좋지 않은 문장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정성일에 호감을 가지신 분들이 자꾸 이 문제를 '어려운 글'과 '쉬운 글', 지성과 몰지성의 문제로
      치환시키려고 하더군요. 문장 그 자체에 대한 평가와 글 내용의 수준에 따른 이해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 말이죠.
      아마도 적잖은 분들이 정성일에게 상당한 무게의 지적 권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이 됩니다. 더 나아가 좀 시니컬하게
      이 현상을 따져보면 '나는 당신들이 어렵다고 하는 정성일의 글도 읽는 사람이지'하는 지적 허영의 혐의도 없지 않습니다.

      저는 정성일의 글을 이번에 처음 접한 풋내기입니다만, 그의 글이 하나의 스타일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꽉 짜여진
      구조를 갖추어진 글을 쓰는게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의 조각들을 바로바로 잉크에 섞어 흘리듯 글을 쓰더군요. 그리고 그의 글은
      문어보다는 구어의 형태이고, 그중에서도 혼잣말에 가깝습니다. 이게 나름의 맛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기한 점은 그의 글이 담고 있는 교양의 풍부함에 비해 그 틀(문장)이 종종 조악함을 노출한다는 점입니다. 이건 제
      상식에 반하는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정성일이 그 문장이 틀렸다는 것을 인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인지 알쏭달쏭합니다. 전자든 후자든 모두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요. 전자라면 그만큼의 교양을 쌓은 사람이
      글쓰기의 기초에서 약점을 보이는 것이니 희한한 일이 될 터이고, 후자라면 글쟁이가 자기 글의 완성도에 관심을 안 둔다는 이야기니 납득이
      안 되는 일입니다.
    • 프로스트, 칸막이 /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정성일의 문체는 개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해도 그 이전에 문장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장 구조 이전에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적절하지 못한 예가 너무나 많이 발견되더군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적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개별 단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모호한 단어의 사용 때문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론은 시가 아닌데 말입니다.
      글쓰는 사람에게 이러한 것들은 너무나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하지만 정성일의 모든 글이 비문 투성이인 것은 아니더군요.
    • 프로스트, 칸막이/ 동감입니다.
    • http://blog.naver.com/shgurpc?Redirect=Log&logNo=110091980814 , 그외 번역투의 표현, 문장의 길이가 지나치게 긴 경우, 쓰고자하는 내용이 분명히 정리되지 못하는 문장, 정확한 수식관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문장의 전체 의미가 모호한 문장. 따질려고들자면야 문제 삼을 게 많은 문장이었어요. 사실 비문이 아닌 문장을 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특히나 복잡한 생각을 표현하는 경우에는 더더욱요. 하지만 번역도 아닌 글에서 한국의 지성인이 그런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쓴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혹시 제가 정성일 문장을 지적하는 걸로 제가 정성일을 비난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는데, 저는 정성일의 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물론 정성일 씨의 글에 대해서는 저도 많이 읽은 게 없어서 별로 그의 글이 어떻다고 말하지는 못 하겠어요. 제가 처음 정성일의 글을 보았을 때 매력을 느꼈던 건 그의 그 글에서 벤야민이 연상되었기 때문이에요. 저에게는 그의 글이 충분히 매력적인데다, 무엇보다 저를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 좋더라구요. 물론 그의 글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유로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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