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본색 잡담

시라노를 볼까 무적자를 볼까 고민을 하다가 시라노를 봣지만

갑자기 영웅본색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영웅본색은 제가 데뷰작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는 아니지만 제 인생의 영화이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남들이 물었을때도 한 3년전부터는 스스럼없이 그렇게 얘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74년생인데 한창 영웅본색 열풍이 불었을 때는 극장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는 별로 영화에 관심도 없을 때라 일년에 극장을 한두번 갈 때였죠

당시는 저는 친형과 사촌형이 둘 다 대학생에 같이 방을 쓸 때였는데 어느날 두 형이 극장에서 영웅본색을 보고 와서는

잠자리에서 그 영화 얘기를 하면서 좋아 죽는 걸 봤습니다.

궁금해진 저는 어느 토요일 오후 노선이 무지하게 긴 버스를 타고 서울시내를 돌면서 영웅본색 1-2를 동시상영하는 극장을 찾아서 돌고 돌았습니다.

아마도 계기는 나는 잘 모르는 형들의 알 수 없는 세계에 동참하고 싶은 게 그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날 영등포의 어느 삼류극장에서 영웅본색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한 10번 정도는 본 것 같은데 항상 제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정해져 있습니다.

감옥에서 출소한 적룡이 택시 운전을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어느날 다리를 절뚝이는 주윤발이 차 유리창을 닦으면서 이자웅한테 돈 몇푼을 건네받고

우걱우것 밥을 쳐먹고 있는데 적룡이 등장합니다.

목이 푹 잠겨서 편지엔 이런 얘기 안 했잖아 라고 주윤발에게 말하죠, 그럼 뭐 저는 그 다음부터 눈물범벅이 되는 거죠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엔딩의 모터보트 돌리는 주윤발 장면은 그렇게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기억나는 건 오직 그 장면이죠

아마도 영웅본색이 제 인생의 영화라고 하는 건 그 장면을 비롯한 당시 유행한 홍콩느와르영화의 몇몇 장면들 때문입니다.

열혈남아에서 장학우가 어머니집을 찾아왔다가 유덕화를 만나서 도망치다가 잡혀서 나한테 너무 잘해주지 말란 말이야라고 얘기하는 그 장면

천장지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유덕화가 오맹달을 괴롭히는 악당들을 박살내고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말하면서 집으로 갔다가 오청련을 만나서

정돈된 건 싫어라며 땡깡피우는 그 장면, 그리고 앞서 애기한 영웅본색의 그 장면이 제 인생의 영화들인 셈이죠

 

물론 좀 더 감상적인 기억도 있습니다.

서울극장에서 일요일 밤에 첩혈쌍웅을 혼자서 보고 가슴이 먹먹해져서 극장을 나서는데 이름모를 한 아저씨가 괜히 저한테 오뎅을 사주면서

'학생 이게 영화야 그렇지' 라고 반쯤 술주정하시던 그 모습도 기억납니다.

 

유하감독의 비열한 거리라는 영화는 당시 홍콩느와를에 열광했던 감독의 사전적인 의미와는 다른 의미의 자전적인 영화일텐데 그 영화의

원제는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이란 제목이다고 합니다.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 아마도 제가 앞서 얘기한 그 세 장면의 정서를 압축하는 굉장히 적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제가 영웅본색류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겠죠

 

저 옛날의 필름느와르나 아메리칸 뉴시네마 시대의 갱영화들, 청춘영화들은 좀 더 절제되어 있거나 극도로 리얼하거나 지나치게 쿨하거나 해서

감탄의 대상이 될 지언정 열광의 대상이 되기는 좀 힘들죠

개인적으로는 오직 당시의 홍콩느와르만이 그 열광의 대상반열에 오를 수 있는 영화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점점 쿨하게 변해가지만 비루한 것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들에겐 여전히 카니발이 필요합니다.

 

 

 

 

 

 

 

 

    • 오오 글번호가 11111......
    • 저랑 눈물 흘리는 부분이 똑같네요.
      저도 주윤발이 절름발이 되서 비루하게 사는 모습만 보면 눈물이 나더라고요.
      바로 전에 멋지구리한 윤발이형의 모습과 너무 대비되서 그런지...
      꼬봉처럼 부려먹던 이자웅한테 그런 천대를 받는 모습에 울컥해서 그런지...
      밥을 너무 거지 처럼 먹는 모습에 슬퍼서인지...

      다른 어떤 슬픈멜로나 무슨 시한부 삶을 다룬 영화 이런거 보면 눈물이 안나는데...
      영웅본색은 볼 때 마다 눈물이 나요.
    • 역시 만국 공통이네요... 저도 윤발이횽아가 창고같은곳에서 도시락볶음밥? 같은걸 우걱우걱 먹고있을때 송자호가 등장하면서....소마~.... 왜이제야온거야ㅠㅠ 이장면에서 언제나 눈물.....그리고 2편에서는 식당에서 양키갱들을 상대로 쌀의 소중함을 역설할때 개감동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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