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냥이에게 밥을 주는 것도 일종의 책임이겠죠?

담장 낮고 마당 있는 다세대 연립주택이 흔히 그렇듯, 길고양이들 길목입니다. 

그냥 통로기도 하고 아래층 할머니가 챙겨주는 밥을 먹는 애들도 있어요.

 

한달 반 전, 유독 제 방 창문 아래에 와서 이용이용 울어대는 꼬맹이가 있었습니다. 한 사개월쯤 됐으려나, 말 그대로 꼬맹이였어요. 우리 첫째와 똑같은

갈색 고등어 태비길래 왠지 남같지 않아서 애들 사료를 좀 놔두고 먹였습니다. 사람을 보면 기겁하고 숨는 주제에 밥은 잘 먹더군요.

그런데 걔가 그날 밤부터 새벽까지, 창가를 떠나질 않고 울어대는 겁니다. 만 이틀 사흘은 그랬던 것 같아요.

책임질 수 없으니 섣불리 거둘 수는 없고, 이용이용 울어대니 잠은 설치고, 우리집 애들도 영 신경쓰여하고.

이삼일이 지나니 오지 않더군요. 가끔 창가에서 울면 먹을 걸 주자, 이정도로 생각하고 마무리 지었어요. 그런데 이후로는 눈에 띄질 않더군요.

 

오늘 낮, 우리 둘째가 창에 딱 달라붙어 누가 있다며 아옹아옹 울어댑니다. 왠지 삘이 왔어요 그놈이구만.

역시나 꼬맹이. 저희 집을 통로삼아 낮은 담벼락을 걷고 있더군요. 한달 반만인데, 한창 클 그 나이에 저번에 봤을 때랑 그리 큰 차이가 없는 몸.

역시 꼬맹이에게 길에서의 생활은 녹록치 않은가부다, 싶어 맘이 짠해 방범창 너머로 손을 흔들었더니 멈칫, 하고는 불안불안한 시선으로

절 쳐다보더군요.

 

그리고 오늘 밤, 갑자기 비가 쏟아지지 않았습니까. 일하고 돌아오자마자 비가 쏟아지길래 우와 굿 타이밍, 이러고서 출출한 뱃속을 달랠 컵라면물을

끓이는데, 예의 이용이용 울음소리가 문밖에서 들리는군요. 어이쿠 꼬맹이, 비 피하러 왔나봅니다.

마침 토요일에 사료를 사서 간식캔이 몇 개 있었죠. 하나를 따들고 나가서 제 방 창문 밑에 놓아뒀어요. 먹을 때만 조용하고,

다 먹었는지 이후로 두세시간을 이용이용. 지금도 간헐적으로 들려요. 아마 오늘 밤은 여기서 자려는지.

 

 

지금 마음이 좀, 거시기합니다. 기실 창문 아래 꼬맹이를 위해 창문 아래 밥그릇을 놔두는 일쯤 어려운 게 아니에요. 고양이 하루에 얼마 먹지도 않습니다.

사료도 8kg나 사뒀는걸요.

 

그런데 그것은 다수의 길고양이들을 위해 길목에 사료를 부어두는 거랑은 다른 의미의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저를 망설이게 합니다.

제가 창문 아래 밥그릇을 놔둔다면 그것은 제 창밑을 자신만의 아지트로 발견하고 찾아드는 그 꼬맹이만을 위한 겁니다.

그건 제가 거두지 않았다 뿐이지 어떤 의미에서는 책임이라고 이름붙일 수도 있는 것이에요. 전 전 오지라퍼도 박애주의자도 아닌 데다 지금 저와 함께

사는 두 녀석 만족스레 거둬 먹이기도 빡빡한데 말이죠. 제 마음 속에 그녀석에 대한 책임까지 끼워넣고 싶지는 않단 말입니다.

 

어찌 보면 이기적이지만 저한테는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맘먹었으면 마음이 불편하지라도 않았으면 좋겠는데

무 자르듯 딱 되는 건 아니네요. 뭐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창 밖이 조용하군요. 그치만 아직 안 갔을 거예요. 창문 열면 다시 이용이용 울겠죠.

추운 걸까, 외로운걸까, 캔을 다 먹었는데도 역시 배고픈걸까. 막상 사람 손도 못 타면서 뭐 저렇게 애타게 우는지. 암것도 못해주는 사람 싱숭생숭하게.

우리집 두 남매는 좀 신경쓰는 듯하더니 이내 침대로 올라가서 엉겨 자고 있습니다.

디룩디룩 살찐 첫째놈 배를 보니 바깥 꼬맹이랑 성냥팔이 소녀랑 겹치네요. 아 고양이에 관해서라면 극세사로 섬세해지는 내 여린감성 으쩔꼬ㅠ.ㅠ

    • 저도 어쩌다보니 동네 고냥이들 사료셔틀이 되었는데, 이거 참 말씀대로 골치아파요.
      누가 그 얘길 듣고 '그럼 여행가실때는 어떡해요?' 랬는데, 딱 그렇습니다.;

      이것두라 와서 밥 없으면 기다리지 말고 그냥 오늘은 없나보다 하고 가란 말이다!
      (그 비오던 추석전날 저녁에는 비가 좀 덜하기에 혹시나 하고 나갔더니 차밑에서 무언가 꾸물꾸물... ㄱ-)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말고 밥 주는 사람이 더 있긴 합니다만,
      그래서 아파트 관리소에서 떠돌이 동물들 먹이주지 말라고 공고 붙었어요 ㄱ-
    •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따뜻하네요
      그치만 못해주는것에 절대 죄책감 느끼실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 빠삐용/ 댓글 보니 역시 마음 꼿꼿하게 먹길 잘했다 싶어요. 꼬맹이한테 밥을 주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녀석이 제 고양이처럼 느껴질거고, 만약 집을 오래 비우거나 해서 제가 못 챙겨줬을 때 녀석을 실망시키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서 못견딜 것 같아요. 제가 사람한텐 몰라도 고양이한테는 무지막지하게 무른 인간이라 절대 섣부르게 곁을 줘선 안돼요. 아악 근데 저녀석 지금 또 울기 시작했어요. 이게 무슨 고문이람 망할 꼬맹이.....ㅠㅠㅠㅠㅠㅠ

      사람/ 느낄 필요 없다고 분명히 머리로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죄책감......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더 죽겠군요. 말씀 감사해요:)
    • 아 저는 다행히(?) 특정 고양이에 대한 책임감은 없습니다. 저희동네 고양이들은 딱 한마리 빼고 젖소판이라 개체분별이 안 되거든요!
      한번은 젖소무늬 어미고양이의 뒤를 6마리는 될듯한 젖소무늬 새끼들이 쫓아가는 걸 본적도 있어요. 달마시안 101 보는줄 알았음. -_-

      ...솔직히 걱정됩니다. 근친교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 꼬맹이가 다 크기 전까진 한 번씩 줘도 괜찮을 듯 한데요. 길 고양이 수명은 길어야 2~3년이라더군요.
      다 커서도 잘 먹질 못하거나 사고 등으로 제 명대로 사는 경우가 드문데 어린 고양이라면
      줄 수 있을 때 한 번씩 주는 것이 좋겠다 싶네요. 길 고양이 찾아다니면서 먹이 챙겨주는 분들을 보면
      가끔 갑자기 안보이는 아이들 때문에 안타까워 하더군요.
      그래도 Paul님 창문 밑으로 찾아오는 꼬맹이는 아직 잘 오고 있잖아요.
      꼬맹이도 다 자라서 스스로 먹이 찾는 일이 익숙해지면 Paul님 창문 아래로 찾아오는 일이 줄어들겁니다.
    • 빠삐용 / 길냥이들이 근친교배를 하는 건 환경상 어쩔 수... 저는 불특정 다수의 고양이를 위해 사료를 놓아두는 건 취지는 좋으나 개인에겐 참 번거로운 일이다 싶어 엄두를 못내겠는데, 정말 대단하세요.

      푸른새벽/ 찾아오면 먹을 걸 내주기는 해요. 근데 먹을 걸 다 먹고도 한나절을 안 가고 저리 뭉개고 앉아 울어제끼니 구조를 원하는건가, 그건 못하는데^_T 하면서 지레 불편한 맘이 되어 있답니다. 이녀석 5개월쯤 됐는데 저리 체구도 작고...아이고...생각 그만 해야지 야임뫄 그만 좀 울라긔ㅠㅠㅠㅠㅠ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4693

      예전에 시사인에서 기획기사로 길고양이들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한번 밥을 주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지나다니는 길목에 놔두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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