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목지 감상. 호러물에서 파훼가 불가능한 설정은 온당할까?(스포)
1.개인적으로 공포영화를 볼때 '클리어가 가능한 구조인가 불가능한 구조인가'를 중요한 요소로 봐요. 실제 영화내에서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배드엔딩이든, 복기해봤을 때 주인공들이 생환 가능한 모먼트가 있었는지를 따져보는 편이예요.
왜냐면 대중을 상대로 한 공포나 스릴러에서 압도적인 불합리함을 경험하게 만드는 건 감독이 못된 예술병에 걸린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영화든 게임이든간에요.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배드엔딩이든 그건 감독의 맘이지만, 상업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생환 가능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게 맞다고 여겨요. 이유는 뒤에 써볼께요.
2.살목지는 어떨까. 일단 필드가 '물'이라는 점에서 귀신들이 유리함을 가져가요. 인간들-펠프스를 포함해서-은 물 속에서는 무조건 약해지니까요. 그냥 귀신들에 비해 물귀신들은 운신의 어려움+산소 차단이라는 이점을 안고 게임을 시작하죠.
그것만으로도 귀신이 충분히 유리한 것 같은데, 이 영화의 귀신들은 놀랍게도 죽은 사람을 낮에 소환해요. 보통 이런 경우는 모든 사람에게는 안 보이고 주인공에게만 보이거나, 밤에만 나타나거나, 생전에 비해 상태가 안 좋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죠. 귀신에게도 얼마간의 페널티는 있어야 하니까요.
3.한데 살목지에 의해 부활한 귀신은 놀랍게도 대낮에 나타나고 여러 사람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생전에 가졌던 전문성까지 발휘해요. 아니 갑자기 나타나서 gps를 잡아주는 놈을 보고 귀신이라고 의심할 관객이 어딨겠어요? 그냥 뭔가 안좋은 의도를 가진 흑막 정도로 생각하죠. 주인공의 선배pd는 귀신이었으면 안 됐어요. 정 나타날거면 밤에라도 나타나던가.
물론 영화란게 꼭 정해진 룰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암묵적인 룰을 마구 어겨버리면 뭔가 허탈하잖아요? 여러분은 안 그런가요.
4.휴.
5.어쨌든 뭐 나는 그랬어요. 귀신이면 귀신다워야지 협력업체에서 온 베테랑들도 못 잡는 gps를 대신 잡아주거나, 자동차 시동 좀 걸어줄 수 있냐고 묻는 귀신은 좀 아니잖아요. 이런 장르에서는 귀신다운 모먼트와 귀신답지 않은 모먼트가 있는데...지나치게 현대 문명을 언급하는 귀신은 짜친단 말이죠.
귀신이 현실세계에 개입하거나 언급하는 강도는 낮아야 해요. 컨저링 1편이 긴장감을 이어가는 이유가 그 선을 잘 타서죠.
게다가 이 정도의 난이도라면 맨 처음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현자 포지션+튜토리얼을 제공하는 역할이었어야 해요. 그런데 할머니조차 조력자가 아니었다니...이건 뭐 클리어하지 말라는 난이도죠.
6.그야 동료들이 하나하나 쓰러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이런 장르에는 부조리하게 패배하는 케이스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뭐 어쨌든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파이널 미션은 강을 건너서 돌탑을 쓰러뜨리는 거죠.
귀신들이 판치는 강을 건너서 돌탑을 쓰러뜨린다? 이 정도 난이도의 퀘스트면 상징적으로도 좋고 대결의 마무리로 딱 좋아요. 그런만큼 확실한 보상이 있어야만 해요. 이 정도 했으면 돌탑을 무너뜨리고 생환하는 결말로 가는 게 관객 입장에서 딱 좋은데...놀랍게도 그 어려운 미션을 해낸 여주인공+전 남자친구에겐 아무 보상도 없어요.
7.나는 살목지가 별로였어요. 이런 진행은 부조리함을 넘어 불합리함을 강제하는 듯한 설정이잖아요. '그냥 살목지에 들어간 것만으로 게임 끝'이라는 건데...그런 식이면 영화 내내 이어지는 등장인물들의 발버둥은 무의미해지는 거죠. 주인공들의 발버둥이 1시간 이어지든 2시간 이어지든, '응 어차피 니네 못살았어 ㅋㅋ'가 되어버리는 구조라면 영화 관람을 하며 긴장했던 시간, 등장인물들에게 이입했던 시간 자체가 다 허무해지는 거니까요.
그래서 상업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생환 가능한 경우의 수가 있어야 하는 거죠. 이런 영화는 초자연적 존재가 있는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목숨을 칩으로 한 대결이 벌어지는 건데, 대결의 룰 자체가 짜치게 적용되면 보는 맛이 없어요.
8.뭐 여기까지는 개인적인 아쉬움이고. 객관적으로 보면 이렇게까지 호평일 영화인가 싶었어요. 위에 열거한 개인적인 아쉬움들을 빼고 봐도 공포 영화로서 그렇게 괜찮은가 갸우뚱. 일주일동안 나왔던 평들을 보면 한국 공포영화로서는 압도적인 호평이었는데...괜히 낚인 기분이예요.
그리고 영화란 건 2시간은 되어야 해요. 1시간 반짜리 영화면 어지간히 압축을 잘 해도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시간이나 캐릭터를 설명할 시간이 너무 적네요. 살목지 주인공이 물을 싫어하는 이유나, pd 선배가 원한을 가진 이유가 좀더 있어 보이는데 전혀 설명되지 않는 수준. 주인공이 영화 시작부터 내내 저기압인 이유도 분명하게 나오지 않고.
9.정리하자면 약간 아쉬운 만듦새+지나친 밸런스 붕괴가 단점인 영화예요. 나루토의 닌자들이나 쓸 법한 수준의 환술에 예토전생급으로 죽은 사람 데려오기만 해도 지나친데, 시공간을 마음대로 제어하는 술법까지 써대잖아요. 어디 안전한 데 숨어서 밤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도 불가능한 파훼법인거죠.
그리고 작중에 '소원을 들어준다'는걸 핑계로 등장인물에게 불리한 소원을 마구 들어주는 마법도 부리는데 이것도 밸런스 붕괴예요. 분명히 돌탑을 쌓으면서 로또 당첨을 소원으로 빈 사람도 있을텐데?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소원을 쉽게 들어줄 정도면 로또 당첨쯤은 손바닥 뒤집듯이 이뤄줘야 하지 않나?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는 초자연적 현상이 양측에 공정하게 작용되어야 해요. 한데 살목지는 귀신의 능력이 등장인물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만 쉽게 적용되는 게 끝까지 짜쳤어요.
뭐 그것도 개별 작품의 컨셉에 따라 다르긴 하겠죠. 이것저것 다 해봤고 심지어 성공했는데도 결국 빠져 나갈 길이 없었다는 걸 깨닫는 주인공을 보며 느끼는 절망감 같은 걸 포인트로 삼는 작품도 있으니까요. 결국 파훼 불가 설정이든 가능 설정이든 간에 설득력과 완성도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와 별개로 지나치게 현대 문물에 빠삭한 귀신은 저도 좀 싫어합니다... ㅋㅋㅋ 비슷한 맥락으로 귀신 들린 앱이라든가, 요즘들어 흔해진 인스타, 인터넷 라방을 하는 귀신들도 아주 별로!
살목지는 안봤습니다만 제기하신 말씀에는 100% 다 동의합니다. 게이머의 승률을 0%로 조작해놓은 도박이 대체 뭐가 재미가 있겠습니까. 피학증 변태들 중에서도 지능낮은 자들 빼곤 좋아할 자가 없을겁니다. 위엣분 일본 호러 언급해주셨는데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라서 그 악명에 비하면 그다지 무섭지도 않습니다. 일단 그물에 걸려든 자들 맹목적을 넘어서 무지성으로 참살해대는데 그냥 자연재해랑 다를게 하나도 없잖아요. 자연재해는 물론 무시무시한 것이긴 하지만 소름끼치진 않죠. 호러를 본다 함은 저 둘 다를 원하고 보는걸텐데 꼴랑 절반만 얻을 수 있다면 재미는 아무래도 반감되는 거고 말씀하신 대로 짜친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