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에 산 책

새뱃돈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좀 과감하게 책을 골랐어요. 이 나이임에도 새뱃돈을 주네요. 이 돈으로 주식을 사지도 않고, 명절 동안 쓴 돈은 잊어버리고 생긴 돈은 뜻밖의 횡재라고 생각하니 부자 되긴 힘든 사고방식입니다. 사람 가까이 하며 감기도 옮고 운전에 몸과 마음 시달렸으니 묵혀둔 장바구니를 비우면서 스스로를 위로해얍죠.  

택배 상자를 열어 도착한 책을 확인하며 두근두근할 때가 있어요. 이번에 산 책들이 또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의식을 안 했는데 장르의 통일을 이루었네요. 모두 큰 범주로 에세이에 속하는 책들입니다.


먼저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나온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 선집 세 권 세트.

여기저기에서 이분의 이 책들에 대한 상찬을 많이 봤지만 개인적 서사를 글에 녹여 쓰는 글쓰기의 기술, 힌트들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과 이야기]만 훑어 읽고, 정작 작가의 개인적인 서사를 본격적으로 담은 에세이들은 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그냥 세트로 들였어요.

[사나운 애착]

1987년에 나온 책인데 우리 나라에선 2021년 출간입니다. 한국에서 비비언 고닉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책입니다. 현지에서도 자전적이며 회고적인 글을 쓰는 본인 글쓰기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책인 거 같아요. 표지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 '사나운 애착'은 모녀 관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어머니와 딸 사이의 서로에 대한 영향과 애증을 담은 이야기는 아주 오래 되풀이, 변주된 것인데, 책 소개에 의하면 가족 감정을 다룬 책들 가운데에서도 매우 대담하고 심오하여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고 하네요. 

8967359837_1.jpg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미국산 책 제목에 '도시'라는 언급이 나오면 그건 뉴욕이지 않겠습니까.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막상 가 보면 많은 저자들이 그들의 책에서 사랑해 마지않은 혹은 미워해 마지않은 뉴욕의 도시성은 우리 같은 관광객들에겐 전혀 다가오지 않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설사 우디 앨런의 영화에 나오는 주택가를 거닐어본들 겸연쩍을 뿐일 것입니다. 오래 전에 어릴 때 무척 가보고 싶었던 파리에 갔을 때 확실히 느꼈었어요. 책 속의 도시는 책 속의 인물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도시일 뿐 관광객이 현지에 서 있다 해서 그 그리움을 확인할 수는 없음을요. 책 소개가 엉뚱한 방향으로... 

제목은 조지 기싱의 [짝 없는 여자들]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조지 기싱의 책들은 몇 년 전에 읽고 좋아서 출간된 단행본은 다 찾아 읽은 거 같습니다. 19세기 후반의 빈곤한 여성들, 빈곤한 지식인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진일보한 시각을 갖춘데다가 사실적인 내용이 무척 마음에 들어 흥미롭게 봤었습니다. 

이 책은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나고 자란 고닉이 이 도시에서 살아온 나날을 회고하는 내용인데, '사랑의 단념과 우정의 예감'을 담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저번에 읽은 시그리드 누네즈 작가의 책이 떠오르기도 하는 소개 내용입니다. 아마 두 분은 알고 지내실 듯. 뉴욕이라는 도시, 출판 업계, 글쓰기 강의 등 활동 영역이 겹치니까요. 

k892831410_1.jpg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이 84세에 낸 최근작입니다. 84세라니 굉장하죠. 

이 책은 저자가 평생에 걸쳐서 읽고 또 읽은 책과 자신이 맺어 온 관계를 분석하는 내용이랍니다. 이분 역시 실제적인 경험보다 독서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아를 형성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겠죠. 자신에게 중요했던 책들을 다시 읽음으로써 자신의 변화를 확인하고 자아에 대한 인식을 수정, 확장하게 된다는 내용을 세심하게 전개하는 듯해요. 원서의 부제가 '만성 재독서가의 노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책이 세상의 거의 전부인 사람들이 그 책들의 절대적인 힘에 조아리면서 분석하기도 하는 종류의 책인 것 같네요. 

흔히 예전에 좋았던 책이나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실망할까 조심스러워지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재감상으로 좋았던 부분이 덜 좋을 수도 있으나 또한 틀림없이 다른 면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과거와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고 작품에 대해서든 자신에 대해서든 오해를 바로잡는 과정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도 요즘은 한 번 읽거나 보는 것은 제대로 본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점점 그렇게 생각하게 되네요. 한 번은 여러모로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 현실은 '한 번이라도 좀 부지런히 봐라'가 되겠지만요.

k142930996_1.jpg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일기와 노트 1941-1995]

벽돌책이라고 하는, 1000페이지 전후면서 한 권으로 나오는 책들 말이죠,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왜 분권을 하지 않는지 이상하다는 글에 어떤 분이 상하로 나누면 상에 비해 하의 판매 부수가 삼분의 이라고 했나 하여튼 엄청 적게 팔리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구입한 하이스미스의 책은 상하 각 500페이지 정도로 나누어져 나왔으나 따로 구매는 불가하고 세트로만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이 있잖아요? 그래서 제 생각에 판매 부수 문제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아무래도 제작비 문제가 아닌가, 분권하면 커버와 디자인 비용 등등이 두 배 들어가서 그런가 짐작하게 되네요.

작가 사후에 발견된 일기 18권과 노트 38권, 8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간추려 책으로 냈다고 합니다. 카프카처럼 본인 뜻과 상관없이 낸 것은 아니고 하이스미스 작가가 출판 관련 지침까지 작성해서 따로 잘 놓아두었다고 하네요. 작가의 오랜 전담 편집자인 안나 폰 플란타라는 분이 선별하고 정리했답니다. 

본문을 펼치니 어쩐지 사전의 느낌이 납니다. 책의 사이즈에 비해 글자 크기가 살짝 작아서일지도. 하이스미스 작가에 관심이 있으시면 큰 선물 같은 책이리라 여겨지네요. 

'글은 내가 살아낼 수 없고 살 능력도 없는 인생의 대체물이다.' - 노트 1950년 5월 17일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꽤나 분명하다. 삶을 즐기려 여행을 하고 별짓을 다 해 봤지만, 내 인생은 주기적으로 너무나 지루해진다. 참을 수 없이 지루해질 때마다 나는 머릿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 노트 1955년 2월 14일

k162135152_1.jpg

[말하라, 침묵이여 - W. G. 제발트를 찾아서]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에서 온 제목일 듯합니다. 제발트가 나보코프 작가의 영어로 소설 쓰기에 대해 쓴 것이 있었는데, 독일인인 자신이 영국으로 건너가서 이민자 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본인의 상황과 나보코프를 연결짓는 면이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캐럴 앤지어라는 전기 작가가 제목을 저리 지었지 않았나, 막 추측해봅니다. 

우선, 글항아리 출판사여 표지를 왜 이렇게 하셨는감요? 그냥 영어책 표지처럼 해도 충분히 멋스러운데요, 너무 무섭습니다. 실물 책은 어쩐지 더 무섭게 보여요. 제발트 작가가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보여야 할 작품을 쓰는 인물은 아닌데? 입을 가로지르는 저 균열하며..... 마음에 안 듭니다!!!(제가 느낌표 세 개는 잘 안 찍는데요..) 호기심 유발? 이 작가의 전기를 표지로 유인하여 사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 책이 1000페이지의 벽돌책인데, 이 중에 주가 150페이지입니다. 이것도 가끔 혼자 해보는 생각인데 주가 이 책처럼 백 몇십 페이지가 된다면 따로 분리해서 나오면 좋겠어요. 읽다가 뒤로 넘겨 찾아 읽기가 아주 번거롭습니다. 책도 좀 가벼워지고 좋잖아요. 전문가들의 판단에 더 현실적인 이유는 있겠지만 이렇게 많은 분량의 미주는 반갑지 않습니다. 

저자 캐럴 앤지어는 '전기 예술'의 대가로 인정받는다고 하고요, 이 책 이외에도 프리모 레비, 진 리스 같은 20세기 작가들의 전기를 집필했다고 합니다. 제발트의 글 특징이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채로 재구성 되어 있고, 읽을 당시에는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지만 정말 그런 것이었는지, 이번 책을 보면 조금은 드러나지 않을까 싶어요. 책 소개를 보면 변형이 있었고 변형이야 당연하지만, 그 과정에 윤리적인 문제도 좀 있고 그런가봅니다. 그러나저러나 제발트 작가가 쓴 어떤 책들은 이미 완성된 예술 작품이며, 그 완결성이 이 전기로 손상되지는 않는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독자입니다.  

k032136577_1.jpg      1526634813_2.jpg










    • 평소 thoma님 책 글에는 댓글 달 일이 거의 없는데 '이 돈으로 주식을 사지도 않고, 명절 동안 쓴 돈은 잊어버리고 생긴 돈은 뜻밖의 횡재라고 생각하니 부자 되긴 힘든 사고방식입니다.' 너무 십분공감이 되서 하하하;;;




      요즘 분위기라면 저도 늦게라도 주식을 시작을 해야하나 싶지만 이럴 때는 사실 이미 늦은 거라고들 그러더군요. 그냥 살던대로 살아야지 뭐 어쩌나 싶습니다. 저도 여윳돈이 생기면 마음의 양식을 채워야하는데 먹는 거 쓸 거 입는 거에만 다 써버린답니다. ㅠ

      • 다행하게도 돈이 많이 드는 분야(팬시 브랜드...등)에 취미가 없어서 그럭저럭 지장없이 살고 있지요! ㅎ


        LadyBird 님, 좋은 영화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삶, 소중합니더...




         

    • '주식이나 코인을 하기엔 난 이미 늦었으니까' 라는 생각은 사실 대략 십 년 주기 정도로 반복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정말로 도전하려면 늦은 시기는 없는 것이 되겠습니다만, 어차피 저 생각을 꾸준히 반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 쪽은 저와 인연이 없는 것이겠지요.




      어쩌다 사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참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처럼 생겼어요. 뭐라 설명은 못 하겠지만 그런 느낌입니다(...)




      이제 반 백살을 조금 넘긴 나이에도 똑똑한 작업을 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데 여든을 넘긴 나이에 저런 책을 써낼 수 있다는 것. 그게 또 칭찬 받을만큼 훌륭하다는 건... 그냥 저와는 애초에 클래스가 다른 사람이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요? 라는 정신승리로 뻘플을 마무리 해 봅니다. ㅋㅋ 적고 보니 승리는 전혀 아니고 패배 인정에 가까워 보이긴 합니다만...;

      • 앞 표지는 하이스미스의 젊은 날 사진들인데 나이든 사진도 저는 괜찮았습니다. 저 미모는 사라지고 살이 붙고 고집과 심술이 많이 보이는 얼굴입니다. 글 쓴다고 맨날 앉아 있고 술담배도 좀 하고 그러면 그렇게 늙을 거라고 예상되는 자연스러움이 있습니다. 한 때는 저런 미모였지만, 요즘처럼 요가나 필라테스 등등으로 자기관리의 압박이 있기 전의 세상을 살며 늙은 모습이 좋아 보였습니다. 물론 전문가의 자신감이나 괴팍함이 새겨진 얼굴이 주는 아름다움이 또한 볼 만하기도 하고요. 


        계속 하다 보면 뭐가 되도 되겠지라는 게 있잖아요. 로이배티 님 보면 끈기가 부럽고 그 말이 생각납니다.  

    • 구입하셨다는 책들을 보니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비비안 고닉의 글이 궁금해지네요. 저는 2월 말 시작하는 프로젝트 때문에 설 연휴도 제대로 못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ㅜㅜ 오늘을 고비로 좀 정리가 되겠지만 내상이 커요 ㅠㅠ 

      • 일상의 지속적인 행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새 책을 열어보는 거요. 


        근데 일이 많으시군요. 얼른 정리 되고 편안한 개인 시간을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고요.

메인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249 [왓챠바낭] '바카리즈무'를 좋아하신다면. '논렘의 창' 정말 짧은 잡담입니다 6 249 02-24
248 Robert Carradine 1954 - 2026 R.I.P. 1 157 02-24
247 이십만 전자, 백만 닉스 5 322 02-24
246 불리트에 나온 로버트 듀발 2 126 02-24
열람 2월에 산 책 6 208 02-24
244 민희진, 하이브와의 주주간 계약 및 풋옵션 행사 소송에서 승소 250 02-25
243 [vod바낭] 이란 영화라는 게 장르가 되어가는 듯. '그저 사고였을 뿐' 잡담입니다 6 297 02-24
242 의미불명 단신 - 에반게리온 완전 신작 시리즈 제작 시동 3 212 02-23
241 [넷플] 무매력 주인공이 최대 약점 ‘나이트 에이전트’ 시즌3 11 234 02-23
240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제목 6 345 02-23
239 듀게 오픈채팅방 멤버 모집 110 02-23
238 2026 BAFTA Film Awards Winners 143 02-23
237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2 342 02-23
236 에반게리온 30주년 단편을 보고(스포있음):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는 어른 195 02-22
235 [쿠팡플레이] 악당이 주인공인 시트콤. '바이스 프린시펄스' 잡담입니다 7 223 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