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서 온 불사신'

1974년 오사원 감독 작품

유럽 각처에서 인터폴 요원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던 중에 '지나가던' 홍콩 배우가 그걸 목격하고 도와주게 됩니다.
이 일을 사주했던 이태리 마피아는 일개 배우한테 방해를 받은 걸 굴욕으로 받아들여 이 배우를 살해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방법이, 배우니까 영화찍는다고 이태리로 불러내서는 촬영도중에 어찌해보겠다는...
방법이 참 괴상하죠. 범죄조직이 일반인 하나 암살하는 거야 일도 아니게 간단할텐데 굳이 번거롭게 돈까지 들여가면서 영화를 만들고는 촬영 도중에 주인공을 죽여서 제작비를 쌩으로 날리겠다는 거예요.

뭐 어쨌든 그렇게 해서 어린 동생과 함께 로마로 오게된 주인공. 오자마자 바로 킬러가 습격해옵니다. 하지만, 두 형제는 그닥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킬러를 죽입니다.
그리곤 형제는 차례차례 습격해 오는 킬러들을 오는족족, 해맑게 미소짓는 얼굴로 다 골로 보내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마피아 조직원들을 하나씩 조지다 보니 결국 조직을 다 없애버린다는 이야기.
주인공이 킬러들을 처리하는 방법도 불타는 난로에 얼굴을 쳐박아 버린다거나 기관총으로 벌집을 만들어버린다거나 전기로 지져버린다거나... 거의 슬래셔 주인공을 방불게할 정도(물론 장르가 다르니까 잔혹하거나 그렇진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주인공의 직업은 일단은, '배우'ㅂ니다. 동생은 초중딩 밖에 안되어보이는 꼬마고요.

70년대 홍콩영화의 무심함을 볼수 있죠. 아마도 만들고 싶었던 건 차례차례 습격해오는 살수들을 여유로운 태도로 처리하는 무림고수의 모습이었지 싶습니다. 근데 이게 고전 배경의 무협물이나 하다못해 서부영화 세팅만 되었어도 말이 되겠지만, 70년대의 이태리 로마가 배경이라고요. 현대법치사회요. 그러니 실실 웃어대며 사람을 죽이는 주인공은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되는 거죠. 저러고도 감옥에 안간다는게 말이 안되는... 하지만 당시의 홍콩남아들은 그딴 거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되었건 다양한 액션이 계속 이어지면 되는 거죠ㅎㅎ

근데, 주인공이 너무 잘나서, 위기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피아들이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 시도를 하는데 전부다 처리해 버려요. 그래서 대략, 영화의 원제인 [홍콩작은대부] 보다는 우리나라 업자들이 붙인 [홍콩서 온 불사신]이 영화의 내용을 더 잘 표현한 제목이 아닌가 싶네요.(아마도 영화를 보고는 자연스레 그런 제목이 떠올랐을 듯...) 원제에 '대부'가 들어간 건 걍 그때가 [대부2]가 나온 해라서 묻어가려고 그런 것 같고요.

[홍콩소교부/홍콩서 온 불사신]은 양소룡의 초기 주연작이고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극장개봉한 유일한 양소룡 주연작일 겁니다.


대충 골든하베스트가 쇼부라다스에서 독립해 나왔을 무렵쯤에 오사원도 쇼부라다스를 뛰쳐나왔는데, 가화에 합류하지 않고 인디 프로덕션을 차립니다. 그리고는 소씨/가화가 경쟁하는 틈새에서 꾸준히 인디로 활동했죠.
오사원의 첫번째 메가히트작 [아호광룡]에서 무술지도를 한 사람이 양소룡이었습니다.
양소룡은 60~70년대에 쇼부라다스에서 활약한 무술감독인 삼촌 양소송의 영향을 받아 영화계에 뛰어들었고 예명도 양소룡으로 지었습니다.(여담으로 몇년후엔 동생도 양소웅이란 이름으로 무술감독이 되죠.) 양소룡과 같이 연달아 작업한 오사원은 무술감독 양소룡의 기여를 인정해, 전격 주연 데뷰룰 시킵니다.
이게 참 파격적인 일이었는데 양소룡은 어지간한 제작자라면 주인공을 절대 안시켜줄 외모거든요. 실력만 되면 기회를 준다는 거죠. 오사원이 그런쪽으로 유명하기도 하고...

그시기에 오사원은 [아호광룡]을 비롯해 진성과 쿠라타 야스아키가 나오는 영화들을 연달아 만들고 있었고 그 영화들은 일부 팬들이 '마라톤 결투'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끝판왕전이 명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옛날 홍콩 무술영화를 보면 끝판왕전이 엄청 길잖아요. 그래서 류승완이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만들 때도 그걸 모방해서 최종결전을 아주 길게 만들었는데 평이 썩 좋지만은 않았죠. 그시기의 류승완은 예전 홍콩영화에선 아주 길게 싸우더란 것만 기억했던 것 같아요. 싸우는 장면만 10분씩 보고있으면 지루해진다는 걸 간과하고...

그래서 옛날 홍콩 영화인들은 아주 긴 싸움 장면을 넣으면서도 그게 지루해지지 않도록 요래저래 궁리를 했었거든요. 오사원이 낸 아이디어는 뜀박질입니다.
두사람이 싸우다가는 잠시 중단하고 냅다 달리는 거예요. 그렇게 달리다가 장소를 바꿔서 다시 싸우고, 그러고는 또 달려서 다른 장소에서 또 싸우고. 그런식으로 싸우는 배경이 계속 바뀌니 뭔가 다채롭게 다른 싸움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렇게 해서 진성과 쿠라타가 뛰다가 싸우다 뛰다가 하는 영화들을 만들다, 쿠라타의 상대를 진성에서 무술감독이던 양소룡으로 교체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도 마지막에 양소룡과 쿠라타 야스아키가 달리며 싸우는 장면을 넣기 위해 만든 거고, 앞부분은 장식이죠. 양소룡과 쿠라타가 싸우는데 딴게 뭐가 필요하겠어요.ㅎㅎ

쿠라타는 장철이 [흑객]을 만들면서 일본에서 스카웃해 홍콩영화계에 데뷰했고, 일본인이고 악역이란 한계를 딛고 홍콩에서 스타가 된 인물입니다. 황정리 등이 본격 홍콩진출하기 전에는 잠깐동안이지만 발차기로도 유명했었죠.

근데 야쿠자도 아닌 마피아가 나오는 영화에 뜬금없이 왜 쿠라타가 나오나면, 마피아 보스의 (양)아들이 세명인데 이사람들이 각각 추축국 출신이라서요. 독일, 이태리, 일본. 이 보스도 평범한 정신상태는 아닌듯...

아마도 오사원은 [맹룡과강]의 영향을 받아 로마 로케를 했을텐데, 그래도 [맹룡과강]이 이태리까지 가서 길거리 인증샷만 몇장면 찍고는 영화 대부분을 홍콩 실내 세트에서 만들었던 것과 달리 이 영화는 대부분을 이태리 로케이션으로 찍은 것 같습니다. 결투 장면도 시원스런 야외 배경이고. 그렇다면 돈을 어느정도 썼을 테고(이태리 영화인들과 합작해서 제작비 절감은 했겠지만), 이왕 돈쓴 거 오사원은 같은 출연진으로 로마에서 영화를 한편 더찍고 왔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건 초기 오사원 영화에서 진성/양소룡이 중국무술로 일본인 악당 쿠라타 야스아키의 가라데와 대립하는 구도였는데 실은 진성의 무술 베이스가 가라데였고, 쿠라타야 당연히 가라데고, 양소룡도... 가라데 출신이었다는 거네요. 실제로는 다 가라데 하는 사람들이 영화에선 중국무술 일본무술로 편갈라 싸웠다는...



양소룡은 홍콩에선 인기스타였고, 일본에서도 (아마도 한동안 콤비였던 쿠라타의 덕을 본 것도 있겠지만) 꽤 알아주는 인사였지만 한국에선 이 [홍콩서 온 불사신] 이후 영화업자들이 양소룡 영화를 더이상 안들고 온 것 같습니다. 조연으로 나온 건 몇편 개봉한 게 있지만... 일단 이름이 양소룡이면 이름이 비슷한 다른 유명배우때문에라도 기억할텐데 국내에선 아예 양소룡이란 이름이 언급도 안되었던 걸 보면... 그러다 한참 나중에 주성치가 다시 소환해서 그때서야 이름이 알려지게 된듯...



zmZL53JEoZG32zarRZdE9L7vGqo.jpg




시내에서부터 달리고 달리다 보니 설산까지...(로마 근처에 설산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스코프 영상인데 찌그러져 있습니다.)



양소룡의 동생역으로 맹해가 나옵니다. 맹해가 양소룡보다 몇년 더 일찍 가셨네요.


    • 굉장히 오랜만에 글 올려주셔서 격하게 반가운 가운데, 오랜만에 올려주셔서 그런지 글이 평소보다 더 재밌습니다. '당시의 홍콩 남아들은 그딴 거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에서 웃고 '추축국 출신'에서 또 웃고... ㅋㅋㅋㅋ




      이렇게 호쾌하게(?) 자기 하고픈 거 막 해버린 영화들 좋아하는데요. 어디 볼 수 있는 곳이 있나 찾아봐야겠네요. 아마도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ㅠㅜ

메인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219 이제 명절에 차례를 안지내며(포스트 코로나), 다른 나라로의 여행 132 02-18
218 [웨이브바낭] 핀란드산 존윅이랄까요. '시수' 잡담입니다 6 268 02-18
217 충주맨 퇴사를 바라보며 1 490 02-17
열람 '홍콩서 온 불사신' 1 171 02-17
215 설연휴 영화들_힌드의 목소리, 햄넷, 폭풍의 언덕 8 320 02-17
214 레이디 두아 [넷플릭스] (스포일러 최소) 9 485 02-17
213 Frederick Wiseman 1930 - 2026 R.I.P. 1 138 02-17
212 Robert Duvall 1931-2026 R.I.P. 6 227 02-17
211 [넷플릭스바낭] 아마도 듀게 최초의 '은중과 상연'에 대한 투덜 글이 되겠습니다 14 474 02-17
210 [티빙] 소소하다 못해 하찮기도 하지만 재미있습니다. ‘논렘의 창’ 시즌 1-5 4 187 02-16
209 올해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상 후보들 몇 개 소개해드립니다... 104 02-16
208 올해 아카데미 단편 영화상 후보들 몇 개 소개해드립니다... 1 110 02-16
207 휴민트 보고..유스포 277 02-16
206 올해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후보들 모두 소개해 드립니다.... 110 02-16
205 seedance - something in the soil 96 02-16